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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은 스물넷이었다

by 윤신


우리 둘은 스물 넷이었고 열일곱이기도 했으며 스물이기도 했다. 시공간의 간격을 두고 멀리 떨어진 비눗방울처럼 우리의 기억은 내 안 어딘가를 공기처럼 떠다니다가 만나서 터지고 또다시 둥실 부풀어 올랐다. 예민한 성정, 누군가의 부재, 웃음 코드. 둘은 거울을 보듯 서로를 보았다. 쌍둥이처럼 닮았어, 한 명이 말했고 다른 한 명은 그 입을 따라 했다. 그 거울이 한참이나 왜곡되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잊고 있던 그녀를 부른 건 작년에 알게 된 스물넷의 두 친구였다. 열넷 혹은 열일곱부터 알게 되었다는 그들에게서 서로를 열망하는 선선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런 아이가 있었지. 한때 내게 아마도 그 비슷한 감정을 먹이처럼 던져 준 아이. 푸르도록 흰 시절을 공유한 아이. 연애하듯 만나고 연애하듯 헤어진 아이. 고등학교입학식에서 처음 본, 짧은 단발의 얼굴이 둥글고 하얗던 웃음이 수줍던 그 아이. 손을 덥석 잡는 나를 동그란 눈으로 빤히 바라보던 아이. 숱이 많은 머리를 짧게 쳐내고 안경을 쓴 코가 적당히 작고 속쌍꺼풀이 얇던 아이.

한때 우리의 스물넷을 열일곱을 스물을 살던 아이.



나는 처음부터 그 아이가 마음에 들었다. 일상을 별종이라는 무기(나름의 생존전략이었다)와 과장된 웃음으로 치장하던 내게 평범한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 아이가 좋다, 고 생각했다. 선뜻한 마음이었다. 시끌한 강당의 첫 입학식에서 내 옆에 선 단정한 아이. 지금도 그 하루는 온전히 그 아이의 얼굴로 남아있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그러니까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두줄로 세울 때 곁에 선 사람이 다른 애였다면 어땠을까. 나의 유년은 사람의 손금만큼이나 다른 선을 하고 다른 모양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고등학교는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 같은 줄과 열의 자리를 주고 같은 번호를 매긴다. 그래서 오해가 생긴다. 저 아이는 늘 나와 같은 사이를 두고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이삼일 감지 않은 머리를 펜으로 꽂아둔 나를 이해했으니 그 어떤 나도 이해할 거라고, 말간 얼굴로 교복처럼 비슷한 옷을 입고 늘 그랬던 것처럼 떡볶이와 튀김만으로도 행복할 거라고. 이건 마치 당시 유행처럼 퍼졌던 이론과 같이 인간 성격의 형태가 단순히 A, B, AB, O 이렇게 네 개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일하다. 단순하고 간결해서 아름답지만 어리석다. 자, 다시 지난 우리로 돌아간다. 일률적인 그 시기가 끝에 이른 겨울, 각자 지망하던 대학의 합격 발표가 난 뒤 그 아이는 사라졌다.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아이 집 근처일 듯한 골목을 다녔다. 학교에는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할 아이도 애초에 그 의자도 없어졌다. 고등학교는 일 년 주기마다 학생을 뱉어낸다. 더 이상 정해진 일과도 책임져 줄 선생도 없는 사회에 졸업장을 내밀며 간단히 밀어낸다. 지금부터는 알아서 해. 생애 두 번째 혼란이 인다. 첫 혼란은 8살 입학의 시기였다. 자유에서 억압으로 그리고 다시 자유로. 쏟아지는 시간과 선택지에 혼미한 정신을 붙들고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댔다. 나에겐 동지가 필요했다. 함께 휘청이면서 텅텅 빈 미래에 대한 방향을 모색할 쌍둥이 같던 그녀가. 물론 여기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왜 이 사람(=나)은 3년 동안이나 친했다면서 그 아이의 집을 몰랐을까. 3지선다 예시를 들어본다.


1. 정말 가까운 사이였지만 자신의 근원이라 할 수도 있는 집을 치부로 여겨 숨겼다.

2. 집이라는 개인적인 공간을 타인에게 내 보이기에 찜찜했고 결국 서로는 타인이라는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자신을 온전히 내 보이기에 각자의 존재는 너무나 유약했다.


결론은 나도 모르겠다. 3지 선다에서 뽑고 정리하기에 인간의 정신은 복잡한 게 당연하지 않을까, 정도가 대답이 되겠다. 여하튼 그 아이는 마술쇼에서 붉은 벨벳의 천 뒤로 대상이 사라지듯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한 달 만난 애인이 사라진 것처럼 애가 닳은 나는 그 아이의 흔적만 찾았다. 그리고 아마 몇 달 뒤 전형적인 나쁜 애인처럼 연락이 왔다. 잘 지냈어? 웃음 기호가 뒤따랐던 것도 아닌 것도 같다. 상관없었다. 공백이 무색하게 우리는 여전했다. 숨이 넘어가도록 웃는 말간 청춘이 서로의 얼굴에 다시 떠올랐다. 하지만 몇 번의 계절을 지나고 웃음과 지긋지긋한 오해와 자기기만의 시간을 넘어 또다시 숨고 기다리는 빈 시간들이 채워졌다. 관계는 침몰하는 배처럼 서서히 가라앉는다. 불신과 자기 방어, 합리화, 질투, 온갖 감정이 뒤섞어든 구멍에 물이 들어가고 결국 바닥으로 잠겨든다. 우리 각자 잘 지내기로 하자. 그래, 자신의 몫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되자. 자신의 각오를 작별인사에 녹이는 어설픈 어른이 된 우리는 결국 서른 다섯 즈음 우리를 그만두기로 했다. 우리라는 테두리를 지우고 각자의 삶을 살며 우리라는 집합을 과거의 시제 속에 던져놓기로 했다. 우리는 우리를 그만뒀다.



오랜 연애가 끝난 뒤 다시 시작하기 어려운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혹은 만나온 시간이 얼만데 같은 것들이 있다. 이건 우정에도, 아니 모든 관계에 해당된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여러 색채의 날들 중에 꼭 좋았던 것만 편집해 눈앞에 들이댄다. 이것 봐. 이렇게 좋았잖아. 이만큼 잘 맞았잖아. 다시 이런 사람 만날 것 같아? 새로 알아가는 그 번잡한 과정을 다시 해야 한다는 부담감 역시 만만치 않다. 하지만 관계의 퇴색을 되돌릴 수 있는 건 불안과 부담이 아닌 신뢰와 변화다. 서로를 향한 믿음과 조금씩 열리고 일어나는 변화가 있어야 우정이든 사랑이든 다시 뭉근한 불이 인다. 해가 떨어지는 하늘처럼 은근히 하지만 확실히 제 온도와 색을 펼치는 것이다. 신뢰와 변화. 그렇다. 도덕책 표제어 같은 그 단어들이 인간의 손을 맞잡게 한다. 집 나간 며느리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가을 전어보다 진심을 고하고 조금씩 변하는 다른 가족이라는 얘기다. 그게 며느리든 친구든 연인이든 다른 가족이든 외계인이든.

어느 책에서 '멀어지는 일의 간단함'이라는 문구를 봤다. 그러나 멀어지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멀어지는 이들의 속에는 몇 번이나 곱씹어 대는 후회와 눈에 보이면서도 애써 모른 체하는 외면, 모든 불안 사이사이에서 흔들리는 희망들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수없는 반복과 끝내의 결단.



이제 와서 후회는 없다. 너라서 좋았고 덕분에 그때가 좋았다. 난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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