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쓴 적이 있다. 얼음산 수면 아래 거대하고 투명한 질량처럼 어쩌면 세상의 모든 요소에서도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뒷면 혹은 난데없지만 온기나 감각의 축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이분법 분류. 하지만 거기엔 맹점이 있다. 시세포가 없어 상이 맺히지 않는다는 망막의 작은 타원형 부분처럼 그냥 지나치고 마는 함정이 있다. 눈을 뜨고도 놓치는 사소한 퍼즐이 있다.
1월 셋째 주에 책을 만든다는 수업을 들었다. 한 달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게 한 달 만에 실제적인 무게와 물성을 지닌 진짜 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주는 가벼움보다도 내게 '책'이라는 사물은 일련의 프로세스를 거친 단순 개체라기보다 고이 모시는 숭배의 대상에 가까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첫 일주일은 책에 들어갈 글을 고르는 것에서 퇴고, 제목과 표지 결정, 목차설정, 인디자인 편집을 했다. 그것으로 지난한 선택의 과정은 끝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다. 당연하다. 그건 그저 첫 일주일이었다.(물론 이때 시작한 퇴고와 인디자인 작업은 마지막 인쇄가 나오기 직전까지 눈이 벌게 질만큼 했다. 흔히 넘겨보는 한 페이지의 종이 안에 얼마나 골몰에 찬 누군가의 시선과 품이 있는지 이젠 이름 없는 책 한 장도 두 손들고 읽어야 할 지경이다) 그리고 작업된 파일을 가제본으로 인쇄하기에 앞서 독립서점에만 개인적으로 책을 돌릴지 교보나 알라딘 같은 대형 서점에도 넣을지 고민했다. 대형 서점에 입고하기 위해서는 책 뒷면의 바코드인 ISBN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정해진 출판사가 있거나 다른 경로를 통과해야 했고 안 그래도 정해진 일정에 그런 수고로움은 외출하기 전 떡진 머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모자를 써서 숨기거나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워 샤워실로 가서는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물을 틀다가 고개를 숙이고 정수리부터 물을 뿌려야 하는 습관적이고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한 맨질한 머리칼.
복잡할 때는 최대한 문제들을 단순화시키고 번호를 매긴다. 예, 아니오로 대답을 하고 길이 막힐 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사다리를 타듯 선택지를 지워나간다. 흔히들 선택은 하나를 고르는 일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선택이란 다른 다수들을 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어렵다. 게다가 지나친 생각은 핑계를 만든다. 그러니 있는 힘껏, 그냥 하기로 한다. 간단하게 생각하기 위해 모든 고민에 이진법을 사용한다. 1과 0, 그러니까 예스 아니면 노.
책을 만들건가?-> YES -> ISBN이 필요한 대형 서점에 넣을 것인가?-> 고민 끝 YES.
그렇게 하루 만에 출판사 사장이 되었다. 굳이 없어도 되는(독립서점에만 넣을 경우는 필요 없다) ISBN이지만 잠시동안 머리를 싸매고 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교보에 책을 넣기 위해서 최소 한 달마다 드는 비용이 있는 줄도 모르던 때다. 어쨌든 청에 지역청에 찾아가 직접 출판사까지 차리고 세금도 내니 순식간에 1인 출판사가 만들어졌다. 2-3주 차의 일이다. 그리고 3주 차. 이제는 가제본을 들고 인쇄소를 직접 돌아야 하는 일이 남았다. 판형 규격, 무선제본, 인디고, 옵셋. 온통 처음 들어보는 선택지 투성인 데다 그 세계는 그냥 우리가 '종이'라 부르는 팔락이는 낱장들을 아르떼 100g, 랑데뷰 울트라 80g, 아트지 200g 같은 외계어로 말하는 곳이다. 인쇄되는 글자의 농도까지도 퍼센트로 맞춰지는.
무난하다고 통용되는 종이를 선택해 인디고 출력으로 한 권을 제본했다.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절대적 개인 기호에 맞춘 민트 표지도 마음에 들었고 판형의 크기, 손에 넘겨지는 종이의 감도 좋았다. 늘상 떠오르던 생각, 이걸 이런 식으로 해되 되나, 종이를 내어주는 나무에게 실례가 아닐까 같은 것들이 깃들 정신이 없었다. 그냥 했다. 마감에 맞추려 안간힘을 썼다.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일을 밀어붙였다. 나는 사실 '무리하지 마'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 세상에는 무리하지 않고서는 이뤄지지 않는 일이 더 많다. 하지만 보통의 '무리하지 마'라는 말은 지금처럼 이 한순간에 쏟아부을 무리를 저장하라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렇게 난 2주 전 한 권의 책을 냈고 열세 군데의 독립서점에 입고완료 했다. 언제까지고 미뤄두던 일을 순식간에, 대략 삼사 주 만에 해치워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단숨에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물 한잔을 벌컥 마시고 나니 자잘한 구멍들이 보인다. 맹점. 그냥 물이 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쳐버려 있는 줄도 모르던 구멍, 무심결에 지나친 자잘한 생활의 구멍들.
아침부터 아이를 보내고 빨래를 하고 네 군데에 입고택배를 보낸 다음 어제를 생각했다. 보이지 않게 정신없이 밀어닥치는 일을 해낸 다음, 보이는 현실을 간과한 결과의 총합체였다. 아이는 일주일째 아팠고 나 역시 그랬다. 아이는 한 달째 이불에 오줌을 쌌고 미운 5살은 시작되었으며 그 한가운데서 나는 얕은 우울을 앓고 있었다. 어젯밤이다. 병원에서 사이좋게 진료를 받고 주사를 맞은 딸과 나는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뛰며 춤추는 아이를 진정시키고 밥을 먹이며 나도 먹느라 진을 뺐다. 별다른 것 없는 일상. 문득 울컥 눈물이 났다. 왜일까. 인스타로 출간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왔다. 순간 무엇을 축하해야 할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밥을 먹이느라 애를 먹는 일상엔 변함이 없었다. 몰아친 태풍을 잠재우는 한 달의 여정을 끝내고 나니 그동안 꾸역꾸역 버텨낸 일상이 튀어 올랐다. 맞아, 사는 건 일이었지. 점점의 비가 직선을 이루듯 점점의 일이 이어진 게 하루였다. 아이는 우는 내게 뽀뽀를 하더니 다시 돌아가 댄스삼매경에 빠졌다. 아이의 꽃망울처럼 터지는 흥이 장마처럼 버거웠다. 그러다 문득 보이지 않는 걸 좇다가 보이는 걸 놓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책 작업을 하느라 소홀했던 아이와의 시간과 귀 기울이지 못했던 대화와 가족들의 감기, 한참 미뤄둔 커튼 빨래가 떠올랐다. 기본적으로 채워야 할 응당의 시간과 소진된 체력이 현실로 눈앞에 섰다. 빤히 보이는 나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 보이든 보이지 않든 거쳐가야만 하는 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하고 생각을 길게 이어 붙이는 일.
아빠는 총을 가지고 빵야빵야 쏘는 걸 좋아해요. 아이는 반짝대는 눈으로 말했다. 이것도 어젯밤의 일이다. 그 말에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면 엄마는 뭘 좋아해? 아이는 내 눈을 보며 골똘히 생각하는 까만 빛을 냈다. 그리고 대답했다. 엄마는요, 설거지 좋아해요. 말문이 막혔다. 아니야. 그거 내가 좋아서 하는 거 아니야. 나 설거지 싫어해. 난 글 쓰고 글 읽는 거 좋아해. 그렇다. 종국에는 내 취미는 설거지가 아니라고 강력히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난 했다. 해냈다. 책 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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