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by 윤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라는 말이 있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중 한 명인 에우리피데스의 연극 해결 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개념으로 이야기가 최고점의 갈등을 겪을 때 짜잔 하고 나타나는 신과 그로 인해 급작스럽게 모든 게 해결되는 진행을 말한다. 갑자기 나타나 모든 갈등을 한큐에 해결하는 신의 손길, 이랄까.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말했다. 그런 게 현실 세계에 있다면 일은 편할 겁니다. 정말 편할 겁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일이 현실에도 종종 있음을 안다.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뜬금없이 등장하여 반칙처럼 해결하는 어떤 무언가가 분명히 있음을 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신이라 여길지, 신이 가진 권능의 한계를 어디에 둘 지에 따라 해결되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그렇다면 신은 뭘까. 어렸을 때부터 나는 모든 신을 믿었고 신은 어디에나 있다 믿었다. 작은 돌멩이에서부터 내 앞에 마주한 사람까지 신이 될 수 있다 믿었다. 애니미즘에 가까운 이 신앙은 결국 모든 생명과 사물을 신성시 여기려는 지순한 마음가짐에 더 가까웠던지, 정작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은 시골의 캄캄한 밤길을 걸을 때면 아멘, 나무아미타불을 달달 외며 두 손을 꼭 잡았다. 장대한 자연을 외치는 것보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신을 부르기가 더 쉬웠다. 진절머리 나는 현실을 피해 옷장에 숨어 구해주세요, 나를 이 상황에서 구해주세요 울부짖을 때도 그들을 찾았다. 나를 구하는 게 하느님, 부처님, 이웃님, 예수님, 공자님, 마호메드님, 무슨 신이든 상관없었다. 나를 현재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게 신이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부터 잠시 탄 버스, 타인의 눈인사, 하나의 문장으로 남은 책 한 권, 그 모든 게 신이었다. 인간이 만든 신의 이름은 한정되지만 내게 신은 어디에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아빠를 비롯한 나쁜 남자들에게서 도망치던 엄마는 나와 동생을 서울 큰외삼촌에게 맡겼고 그 삼촌은 또 우리를 할머니집에 맡겼는데 그곳은 큰 도시인 상주나 청주로 나가는 버스도 한 시간에 한대정도뿐이던 깡깡 시골이었다. 나는 그곳에 이 년 가까이 지내며 일 년에 한 번 꼴로 집을 나갔다. 청주로 한번, 상주로 한번. 각각 다른 이유였지만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마음으로 집을 나갔다. 그러나 두 번째가 있었다는 건 첫 번째가 실패했다는 뜻이고 세 번째가 없었다는 건 두 번째가 성공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건 두 번째 나간 가출의 성공에 대한 것이다.

그날 나는 체육시간이 시작되기 전, 모두가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는 어수선한 시간을 틈타 무작정 책가방을 싸서 학교를 나왔다. 전교생 통틀어서 오십 명 남짓의 작은 시골학교였다. 달랑거리는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기울이듯 메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벗어나 이차선 길 건너편에서 손을 흔들고 히치하이킹을 했다. 아마도 트럭이었던 차가 한대 섰고 아무런 갈등도 없이 어린 나는 그 차에 올랐다. 두려울 것도 겁도 없었다. 교복을 입고 있던 내게 운전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덜컹거리며 재를 넘는 시간, 참다못한 내가 먼저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괴로워요. 학교에 있는 게 너무나 괴로워 견딜 수가 없어요. 고작 한 학년 열여덟 명 되는 학급 주제에 우두머리 같은 애가 있거든요, 근데 그 애가 나를 싫어해요. 왜소하고 작은 여자애거든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비웃고 나에게 말을 거는 아이를 조롱해요. 나를 아끼는 선생님을 대놓고 욕해요. 그래서 저는 늘 혼자 칠판을 지우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길을 걸어요. 늘 혼자예요. 사람들 사이에서 오는 고립이 미치게 고통스러워요. 뭐, 그런 말들. 인간은요, 손목을 그어도 죽지 않아요. 어두운 교회 안에서 신에게 빌었어요. 당신이 나를 아낀다면 나를 구원하라고요.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달라고요. 그러나 저는 제자리였어요. 다음번 교회에 갔을 때 제 손엔 커터칼이 있었어요. 손목을 그었죠. 붉은 피가 났어요. 그래도 살아요. 인간은, 그래도 살아요. 역시 그런 말들.


가출이 이사로 이어지고 이 년쯤 지났을까 나를 열렬하게 괴롭히던 아이에게서 편지가 왔다. 소름이 돋고 오한이 밀려왔다. 미안해. 네가 부러웠어. 괴롭혀도 고개를 빳빳이 드는 네가 미웠어. 난 편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용서는 그렇게 쉽게 비는 게 아니야, 용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되는 게 아니야. 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난 그 아이가 측은했다.


다시 그에게 고백하던 시간으로 돌아가 어설픈 기억을 더듬자면 그는 땅인 듯 그저 묵묵히 비처럼 쏟아지는 말들을 받아들였다. 어떤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은 때로 그 앞에 선 존재를 긍정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차를 내리며 가방에 달려있던 작은 키링을 선물했다. 고마움을 표할 게 그것밖에는 없었다. 잠시 신이 되어준 그에게 줄 것이 나에겐 인형 모양의 키링밖에는 없었다. 그렇다. 그는 그 순간 내게 빛나는 신이었다. 나를 긍정하고 구원해 준 사람이자 한 번에 지옥 같은 나락으로도 떨어트릴 수 있던 신, 어두운 교회 안 부름에 늦게야 응답한 나만의 신이었다.


나는 작은 것들의 힘을 믿는다.

서로에게 건네는 따뜻한 온기를 믿는다.

오래된 가구의 광택을 믿는다.

낮게 날아온 나비의 방향을 믿는다.


인간이 신을 이름 짓고 각자만의 해석과 말을 붙이듯 나는 나의 신을 창조한다. 그리고 그 신은 나를 지키고 어느 순간 나에게 나타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실현한다. 나의 신은 거창하지 않은 탓에 해결 범위가 작거나 소소하지만 나는 그들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에게 신은 어디에나 있고 나는 그들을 만나 구원받는다. 하늘이 아닌 현실의 내 자그만 신들은 하찮고 사소한 것들을 돌본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말해 하찮고 사소한 것들에도 가만히 마음을 담아 돌본다는 말이다. 나의 신은 기적보다 흔하고 안부만큼 다정하다.


나의 신은 어디에나 있다.




* 글의 시작을 저만큼이나 거창한 문구로 해도 될까 싶은 생각이 이제야 슬그머니 들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되돌릴 순 없습니다. 나는 매번 그런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_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