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라는 생의 의지

by 윤신


산문을 쓰고 수정하다 그 앞에 멈춰 선다. '증오라는 생의 의지'라는 문장이다. 물론 증오가 생의 의지가 될 수 있는 것에는 의심이 없다. 슬픔이나 우울에 깃든 늘어진 무력감과 달리 그것에게는 날 선 힘이 있다. 인간의 감정, 표정, 일상을 들쑤시고 내면의 구석구석을 펄펄 끓게 만들어 동력을 얻는다. 결국 소진되는 것은 인간이지만 부정적인 힘도 어쨌든 힘이다. 그것도 제 주위 모든 것을 전소시킬 듯 거세게 불타오르는 힘. 거기에 대개 증오에게 몸을 연료로 내어 준 주인은 자신의 어딘가가 닳아도 괘념치 않는다. 핏발 선 안구는 오직 자신의 증오와 분노가 추는 악무惡舞를 지켜볼 뿐이다. 그 춤에 누가 다치고 피를 흘리든 심지어 그게 자신이든 오직 바득 대며 지켜볼 뿐.


문제는 그저 앞 뒤 맥락에서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 증오일까 분노일까 하는 것이었다. 증오와 분노. 얼핏 닮아 보이는 그들은 어떻게 다를까 하고 말이다. 증오처럼 분노도 생의 의지가 될 수 있을까? 물론 YES. 그렇다면 그 둘은 어떻게 다를까. 사전에서의 정의는 이렇다.


증오는 아주 사무치게 미워함, 또는 그런 마음.

분노는 분개하여 몹시 성을 냄, 또는 그렇게 내는 성.


가물거리던 촉감이 단단해졌다. 증오는 사무치도록 미운 마음이고 분노는 분해서 터지는 화 같은 것이다. 증오가 심층 저변에 쌓인 감정이라면 분노는 좀 더 표면에 가닿아 아슬아슬한 감정이랄까. 마치 퇴적 지층과 화산처럼.

물론 그 감정이 내면에 쌓인 빈도와 횟수, 기간에 따라서는 또 다르겠지만 얼핏 나에게는 그런 감각으로 와닿았다. 비슷한 점이라면 둘 다 쌓일 수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동시에 둘 다 사그라들고 해체될 수 있다는 점. 여기서 나는 다시 멈춰 섰다. 나는 그들을 해체하며 살았던가. 혹은 나를 갉아먹게 내버려 둔 채 끌어안고 살았던가.


증오는 나의 어릴 적 친한 친구다. 터지는 화보다 차곡히 쌓아둔 슬픔이나 미움이 나에겐 익숙했고 때로 그 힘으로 공부를 하고 학교를 가고 일기를 썼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부조리와 가난, 차별과 억압, 미움에 대한 증오로 달력의 일부를 채워가며 살았다. 물론 그게 증오인지는 몰랐다. 누구를 향한 증오인지도 몰랐다. 일기장에 엄마를 욕하며 몇 장을 채웠다. 하지만 그건 미워할 대상을 찾지 못해 어린 엄마를 제물로 제단에 올렸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 이젠 헷갈린다. 그건 증오였을까, 분노였을까. 무력한 분노에 가까웠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이제는 상관없다. 시간은 지났고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다. 웬만큼은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고, 혹은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 내가 아끼는 만큼 시간은 반짝이고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나는 안다. 네가 네 마음의 우위에 있어야 해, 아저씨의 말도 이해가 간다. 실행은 어려워도 일단 이해는 간다.

물론 그럼에도 증오든 분노든 한때 나의 어릴 적 친구였음에는, 또 어쩌면 나를 살게 해 준 힘이었음에는 변함이 없다.


아직도 나는 가끔 나를 갉아먹는 감정에 휘둘린다. 두려움, 분노, 증오, 괴로움. 그들은 여전히 일정의 포화도를 지니고 떠다니다 때를 찾아 나를 먹이로 삼는다. 제 몸집을 키우고 저를 발산시킬 구실을 궁리한다. 가끔 그들에게 머리채를 잡히면 나는 그저 아, 네가 거기 있구나 인지할 뿐이다. 그리고 딱 그만큼 그들이 주춤 물러나는 것을 느낄 뿐, 상모를 쓴 것처럼 내 모가지가 돌아가는 것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이 산문에 어울릴 단어는 증오일까 분노일까를 생각했다. 이때 생의 의지를 밝힌 것은 뭉근한 증오였을까, 번득이는 분노였을까. 한참을 적고 지우다 결국 처음에 적은 대로 증오로 둔다. 그냥 미운 것도 아니고 사무치게 밉다니까 그게 더 생의 의지에는 걸맞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 어떤 증오든 얕게 쌓인 봄눈처럼 다 녹아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그렇게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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