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쉼이 필요하다, 고 적으려다 오타가 났다. 쉼을 너무 느릿하게 적는 바람에 ‘수미’라고 쓴 것이다. 이틀을 엄청난 걸음과 무게와 책, 관계에 매달리느라 손가락마저 지친 걸까.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만 좋아하는 것들도 내내 붙어 있으면 지치기 마련이고 이럴 때면 살짝 빈틈이 필요하다. 그것도 혼자서, 누구의 방해도 애정도 없이 가만히 제자리를 찾아야 할 시간이.
나는 그것을 종종 틈이나 쉼이라고 부르고 어떤 이는 동굴, 또 어떤 이는 자기만의 방이라 부른다.
그런데 수미. 분명 나에겐 그 이름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어머니가 일본인에 아버지가 네팔인이었던, 그러면서도 정작 본인은 호주에서 살고 애인이 태국인이라 단순히 그것만으로도 국제 평화를 외치고 싶게 만들던 수미. あのね, You can just call me SUMI chan. 주로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말했고 나는 그녀를 수미짱이라 불렀다.
우리는 시드니 달링하버 어느 호텔 1층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좁은 바다를 낀 항구 앞이자 아쿠아리움 바로 옆에 있던 호텔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가끔 철썩이던 물결과 그 앞을 날지 않고 걷던 산뜻한 주황색 발의 갈매기들, 물속의 젤리피쉬, 점심으로 먹던 아보카도와 반숙계란, 루꼴라 샐러드 뭐 그런 것들만 남아있다.
이름 따위, 그곳의 이름 따위는 없다.
여하튼 수미는 이름 따위 모를 그곳에서 함께 일했고 함께 사기당했다. 호주는 주로 주급으로 급료를 계산하는 데 언제부턴가 사장은 슬금슬금 주급을 미루기 시작했고 수미 다음으로 친했던 미키는 일주일 정도 급료를 떼였을 즈음 그곳을 당장 그만두고 바로 옆 아쿠아리움에서 황제펭귄과 아델리 펭귄의 차이를 설명하는 일을 시작했다. 간략하게 그를 설명하자면(안 해도 되지만) 그는 180cm의 키에 잘생긴 호주 남자로 말끔한 남자 손님이 오면 나를 밀치고 주문을 받으러 가던, hey, 저 남자 엉덩이 죽이지 않니 같은 말을 하던, 매번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상습적으로 지각하던, 얼굴을 알게 된 첫날 젖꼭지 피어싱을 보여주던, 자신의 인생 노래는 뮤지컬 위키드의 Defying gravity라며 두 손을 펼쳐 주저 없이 불러대던 사람이자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고작 일주일의 급료만으로 재해를 벗어난 사람은 그뿐이었다.
미키가 펭귄 곁으로 가자 직원들은 하나둘 젠가에서 나무 블록을 빼듯 근무 시간표에서 자신의 시간을 조금씩 빼다가 이내 텅텅 비웠고 가게에 남은 건 고작 나와 수미, 셰프 정도가 되었다. 사실 사장이 파산했다는 얘기는 진작부터 돌았다. 그가 도박에 빠졌다는 얘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그곳 외에도 몇 개의 비싼 레스토랑과 모델 같은 와이프, 역시나 어린 모델 같은 자녀들이 있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가 그까짓 도박으로 그 큰돈을 모두 날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거라고 멍청하게 생각했다.
언제부터 체납 딱지가 붙었는지 모르겠다. 언제부터 라테를 만들 우유가 끊긴 지도 모르겠다. 달걀도 고기도 아보카도나 루꼴라도. 하지만 체납의 결과는 조금씩이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이행되었고 나와 수미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바보 같은 가게를 떠나고 있었다. 우리는 자주 얘기했다. 에이 설마. 응 설마. 설마가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잘도 まさか마사까(설마), まさかね마사까네(설마) 같은 말을 반복했고 결국 그 마사까가 현실로 이뤄지고 나서야 우리의 순진함에 웃었다. 뭐든 금방 해결될 거라는 사장은 해외로 도피하고 전기마저 가게에서 달아난 뒤였다.
쉼의 오타가 아니라도 가끔은 수미를 생각한다. 말려 올라간 입꼬리 언저리에 진한 점, 동양인치고 넓은 골반, 어린 시절부터 어쩔 수 없이 익혔다던 5개 국어, 불 꺼진 가게 유리창에 던지려다 만 돌멩이(수미는 이러다 우리만 잡혀간다고 말렸다), 그녀와 그녀의 애인이 만들어준 태국 가정식, 집 나간 고양이 심바를 찾으며 울던 그녀의 얼굴, 괜찮아하고 말하며 씩 웃던 웃음, 뭐 그런 것들. 그녀는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렸지만 어쩐지 나보다 더 성숙했다. 그녀에겐 뭐랄까, 익숙한 쾌활함과 여유가 피부에서 뿜어져 나왔다.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폐뿐만이 아닌 온 피부로 호흡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신으로 산소를 들이마시는 덕에 고산병에도 안 걸린다는 것이다. 수미도 언젠가 히말라야에 다녀왔다는 말을 했다. 그녀도 아는 것 아닐까. 전신으로 호흡하듯 차분함과 고요를 마시고 내쉬는 방법을, 그것을 환한 여유로 변환시키는 기술을 그녀는 모두 습득한 게 아닐까. 아, 물론 성숙함에는 가슴과 골반 같은 신체적인 볼륨도 들어가 있긴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 보면 그땐 정말 힘든 시기였다. 새벽 여섯 시 반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한 달 꼬박 일한 돈을 받지 못했고 무엇보다 겹겹의 거짓말로 점철된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에 뜨악했다. 사장은 맨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걱정할 일이 아니야. 무서울 만큼 뻔뻔했다. 아니, 혹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가 판돈으로 잃은 돈에 비해 내가 받지 못한 급료는 걱정할 만큼이 아니라고 진정 그렇게 생각한 지도 모를 일이니까. 인간은 결국 자신의 저울과 무게만을 바라본다. 급격히 기울어진 나의 추를 그가 알 턱이 없다. 이방인의 갈 곳 없고 둘 곳 없는 사정 역시.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시간은 모두 지났다는 것이다.
사장이 증발된 뒤 우리는 잠시 돌멩이를 들고 머뭇거리다 하염없이 빈 길을 걸었다. 할 수 있는 건 결국 받지 못할 임금을 위해 노동부 같은 곳에 항의하고 신고하는 것 정도겠지만 이럴 때야말로 잠시 제자리에 서야 한다고 우린 말했다. 심바가 가릉거리는 침대 옆 바닥에 누워 새로운 일쯤이야 어떻게든 또 금방 구할 테니 마음을 편히 먹자고 서로를 안심시키듯 웃고, 카페이던 그녀의 집 1층을 빌려 이참에 작은 파티라도 여는 게 어떻냐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주머니에 더 나은 대안도 여유 부릴 통장도 없지만 한없이 가벼운 청춘들이었다.
다시 쉼, 그리고 수미.
오늘의 오타를 그때 알았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수미짱, 나 있지. 쉼이라는 말을 쓰려다 네 이름을 썼어. 한글로는 네 이름과 쉼이라는 말에 들어가는 자음과 모음이 같거든. 그런데 어쩐지 그러고 나니까 네 이름이 마치 휴식 같은 느낌이 들었어. 휴식, 좋다. 우리 잠시 쉬는 걸로 하자. 그것도 괜찮을 것 같아, 아마도 이렇게 우린 이야기했을 것이다.
오늘의 밤으로 지쳤던 이틀은 끝이 난다. 내일 아침에는 조금 게을러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써본다. 일부러 다시 써본다. 내게는 때로 수미가 필요하다. 잊히지 않는 이름이, 그것을 떠올리며 입꼬리 하나 씨익 올리는 순간이, 그 모든 감각이, 그리고 깊던 얕던 찰나 같은 쉼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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