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아끼는 분의 책이 나와
간단한 감상을 올립니다.
책을 읽는 행위에는 여러 의도가 있다. 시간을 빨리 삼키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탐하기 위해서, 혹은 책 읽는 자신의 모습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 굳이 따지자면 나는 주로 책 속으로 숨는 편이다. 손안에 든 것이 도피라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며시 하지만 뻔뻔하게 책을 펼쳐 그 안으로 숨어든다. 현실의 감각을 제로로 두고 난민처럼 그 안에서 방황한다. 비겁하지만 합법적 도피라서 누구도 나를 책 밖으로 끄집어낼 수는 없다.
그 마음으로 이 책도 읽었다.
깊은 바다색의 표지를 펼쳐 어김없이, 책 속으로 도망갔다.
제목은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 한눈에도 슬픔이라는 단어와 마조렐 블루가 잘 어울리는 커버다. 상실을 치유하고 회복을 가져다준다는, 정화, 고독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파랑. 난 이 안에 잘 숨을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찰나 책 속에서 어쩐지 무심한 듯 다정한 사람을 만났다. 자신이 싫어하는 계몽이나 훈계를 당신에게도 하지 않겠다는, 하지만 악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한 선한 것만을 보지 않겠다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도 단정 짓지도 않는, 얕은 파도에 휩쓸리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났다. ‘원래 그런 슬픔은 없어’ 그러니 너는 네 슬픔의 유일함을 의심하지 않은 채 타인의 슬픔에도 정의 내리지 않고 그 불편함을 기다려야 해. 나지막하게 낭송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자는 잔잔한 울림을 주는 작은 이야기들을 담고 싶었다고 서문에 일렀다. 책을 다 읽고 덮은 지금 가만히 생각하니 아마 반은 맞고 반은 아닌 것 같다고 여긴다. 잔잔한 울림에서는 긍정이, 작은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까닭이다. 책은 문학과 음악, 영화를 빌어 작가의 철학이 담겨있는데 개인적으로 한참 아껴온 콘텐츠들이 작가의 시선으로 넓혀지고 깊어졌다. 작은 이야기의 경계를 생각한다. 미미한 내 존재의 사유와 예술의 감각은 이 거대한 세계에 비해 세미하나 나에게는 전신을 통한 전부다. 그의 작은 이야기가 나에게는 결코 작은 이야기가 될 수 없는 이유다.
작은 이야기小說이자 작은 눈小雪, 소설.
그의 언어가 흩날리는 눈으로 치환되어 땅에 닿고 사람들의 어깨에서 녹는 상상을 한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야기들이 퍼지는 상상을 한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쓰시마 유코, 아니 에르노,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쳇 베이커, 쁘띠마망. 책에서 언급되는 리스트 가운데 아끼지 않는 것이 없고 그의 말들에는 여진이 없는 것이 없다. 쉽게 읽히나 빠르게 넘겨지는 책은 아니다. 무심한 그의 태도는 무관심이 아니라 중립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닌 건 아닐 테니까요. 강요도 으름장도 없이 찬찬히 자신의 말을 겹겹이 쌓아간다. 새로운 것을 새로이 보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보는 그의 시선이 더 새로운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두 번 읽었다. 두 번째 읽으면서도 어느 한편에서는 다시 한번 멈칫하고 마음이 울컥이기까지 했다. 파랑의 시간. 해방감, 치유, 정화의 시간. 이 책은 내게 그렇게 남을 것이다. 슬픔보다는 안도, 위로의 책으로, 도피보다는 위안의 책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파아랑의 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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