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화였을까란 생각은 왜 나라는 존재는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라는 의문과도 같다. 주어진 것과 꺼내어진 것, 내부와 밖, 끊임없는 욕구와 체념들이 뒤엉켜 내가 되고 영화가 되었다는 말이다. 말이 조금 어렵다. 쉽게 얘기하자. 그 시작은, 반항이었다.
나는 겉도는 아이였다. 순전한 타의로 여섯 군데의 초등학교와 세 군데의 중학교를 다니며 부딪히던 타인의 시선과 무리 짓는 아이들의 거드름, 모종의 기대가 스민 눈빛은 매번 익숙하면서도 어렵기만 했다. 또 어떤 역할이 나에게 떨어질까. 나는 늘 나였지만 사람들은 내게 자신의 시선을 투영시키고 배경을 입혔다. 쟤는 엄마랑만 산대. 쟤는 서울에서 왔대. 어떤 날의 나는 공부를 꽤나 잘하던 학생의 신분이었고 어떤 날의 나는 집 나갔다 돌아온 날라리였으며 또 다른 날의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는 불우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저 나를 살았을 뿐인데 내게 입혀지는 여러 이름들이 어쩐지 불편했고 그것들은 모두 나지만 또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열두 살 즈음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 갔다. 폭력이 습관이던 엄마의 남자 친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교하던 보통의 날, 엄마 손에 잡혀 서울로 가는 버스에 태워졌다. 이건 정말 태워졌다, 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날벼락처럼 전학 가며 친구들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도, 아끼던 물건 하나도 챙기지 못한 데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상황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십 대는 항상 그랬다. 생이 주는 물은 빗물이든 흙탕물이든 꿀꺽꿀꺽 마시며 때로는 그 물에 유영하고 잠기던 시간. 생이 건네는 파도에 던져지던 시간이었다.
목적지도 모르던 버스 안에서 나는 생각했다. 만들자. 나를 만들자. 내가 결정할 수도 어쩔 수도 없는 불행은 뒤로 두고 천성이 환한 사람인 척 연기를 해보자. 가진 게 많은 아이처럼 여유로워 보이자. 타자가 나를 단정하기 전에 내가 나를 규정하자.
물론 열두 살의 아이에게(사실은 어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내면의 페르소나를 하나씩 꺼내도 그 수엔 한계가 있고 대부분은 미숙했다. 흉내를 내는 것과 살아내는 것은 서울말과 대구사투리처럼 다른 이유다. 그래서 매번 결국은 익숙한 자신으로 돌아가버렸지만 철 따라 이사할 즈음이면 조물조물 또다시 새로운 나를 만들곤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만은 유일하게 한 번의 전학 없이 다녔다. 나를 꾸밀 필요가 없었는데도 다른 사람인양 구는 게 꽤 재밌었던 모양인지 그즈음 연극을 시작했다. 김유신 장군의 아내도 되어보고 방자랑 썸 타는 향단이도 되고 어느 날엔 태고의 여신이나 까마귀도 되었다. 눈빛, 몸, 손끝을 조명아래 쓰며 다른 배우와 관객과 호흡했다. 무대 위에선 누구도 나를 무언가에 덧씌우지 않았고 나의 상황을 판단하지 않았다. 연기하는 역할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생이 정육면체라면 연극은 단면처럼 심플했다. 졸업 시즌, 엄마는 국문학과나 교육학과를 선택하길 원했지만 나는 멋대로 연극영화과에 지원했다. 나 대학 붙었어. 연극영화과야. 엄마에게 통보하듯 알렸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통쾌했다. 내게 지워진 생의 무게와 타인의 가면을 엄마에게 던져두었던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대학에 가니 나보다 더 자신을 표현하는데 능숙하고 환장한 사람들이 넘쳤다. 그들은 음으로 그림으로 연기로 영상으로 자아와 타인, 관계를 뿜어댔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두고두고 후회할 실수를 연극 중에 했다. 여기서 컷. 글이 길어질 것 같으니 그 얘긴 생략한다. 어쨌든 그 이유로 연극에서 멀어졌다. 거짓말이다.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가 아니라 다시 슬퍼질 것 같아서다.
연극을 멀리하고 영화를 배웠다. 얼핏 비슷한 듯 하지만 그때의 내게 두 영역은 테이블과 의자처럼 달랐다. 연극이 직접적인 감각의 소통이라면 영화는 충분한 계획과 계산 하에 반복된 시스템이랄까. 연극이라면 순간으로 넘어갈 장면을 영화는 바스트샷, 숄더샷, 롱샷으로 분절해 나눠 찍었다. 물론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앵글 주위를 서성이던 붐 마이크, 희게 빛나던 반사판, 여기저기 널려진 스크립트, 감독의 액션! 뒤에 찾아오는 몰입과 고요, 오디오에 흡수되던 배경음.
당시 과제는 주로 실습이었다. 나 역시 주위에서 매주 찍어대는 독립영화의 미장센을 돕거나 시나리오를 썼다. 간혹 배우로도 참여했지만 그때는 이미 연극을 시작하던 심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참여가 아닌 간접적이고 미약한 도움에 가까웠다. 어차피 할 거 최선을 다했다면 좋았을 텐데 치사한 미련과 후회가 남아 뭔가를 진심으로 대하기 어려웠다는 게 지금의 변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접속사를 좋아하는데도 왠지 글 쓴 이후로 처음 쓰는 것 같다. 기쁘다) 어느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치면 영화배우로 나온다. 13년 여름에 찍었던 영화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면서 나도 덩달아 올라간 모양이다. 또다시 누군가가 씌워둔 프레임이지만 이런 건 나쁘지 않다. 오히려 한 것 없이 이렇게 얼굴을 들이밀어서 괜찮은가 싶은 정도다. 하기야 늘 그랬다. 타인이 정의했던 ‘나들’은 때로는 유약했지만 때로는 나보다 더 강하고 멋졌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썩 괜찮은 사람인양 착각하게끔 했고 생을 잘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곤 했다. 고마울 따름이다.
열두 살의 나처럼 다시 생각한다. 나 역시 누군가를 착각하게 만들겠다고, 당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규정해 주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나의 한 시기, 전심을 쏟았으나 내 주위 어느 자리에도 연극이라는 단어는 없다. 대신 변두리에 머물던 영화가 남았다. 그게 사는 건가 싶다가도 다시 생각한다. 장르를 넘나들고 시즌을 넘어서며,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인공인 개인적인 영화사를 쓰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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