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없다. 쓰지 않는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이 문장 앞에 삼켜진 말은 ‘재미있는’이라는 형용사다. 나는 왜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없을까. 쓰지 않을까. 열다섯 장 짜리 단편을 퇴고하다 그만 덮어버리고 어쩌면 이렇게도 지겨운 몰개성의 글을 정성스럽게도 질질 늘여놨을까 생각한다. 나라는 인간이 재미없어서? 아닌데, 나 같은 변종이 또 어디에 있다고. 하기야 변종이라는 게 재밌는 글을 쓸 이유나 능력이 되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래도 변종이면 생각도 신박 발랄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래저래 결국 또 쓸 수 없고 쓰지 않는 상태가 이어지다 결국 내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은 Q에게 물었다.
나 왜 이렇게 재미없는 글을 쓸까?
Q. 먼저 자기가 써야 할 글,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이 뭔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 안에 메시지라던가 네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같은. 넌 뭘 쓰고 싶은데?
질문에 다시 질문이 돌아왔다. 난 뭘 쓰고 싶냐고? 글쎄. 사람 사는 이야기 뭐 그런. 아니 사실은 나 그냥 쓰는 게 좋아. 쓰는 내가 좋아. 관종인가 봐.
다시 Q. 빨리 인정했으면 좋았을 텐데. 너의 그 관종기를.
Q와의 대화는 이걸로 끝났다. 정말 이걸로? 사실 그 후 Q가 이야기의 형태나 갈등 요소 같은 것들을 언급한 것 같기도 한데 내용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빨리 인정했어야 한다는 내 관종기에 묻혀 다른 건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얘기도 했던 것 같다.
Q. 난 네가 늘 이중적이라고 생각했어. 머리는 똑똑한데 현명하지 못하고 몸 관리를 잘하는 거 같은데 맨날 골골거리고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 같으면서 빈틈투성이고, 따뜻한가 싶으면 칼 같고. 뭐, 그런 희한하게 이중적인 사람.
아, 난 그저 내가 왜 재미있는 글을 못 쓰나 고민이었는데 어쩐지 고민이 더 생긴 기분이다. 내 재미없는 글에 이런 깊은 자아진단이 필요했다니. 마치 쏟은 물이 바지를 적시고 팬티까지 적신 기분이다. 분명 이 문장을 두고 Q는 말하겠지. 이것 봐. 너는 변태야.
이대론 안 되겠어 다음날 M에게도 물었다. 또 어떤 말을 들을까, 또 어떤 내가 튀어나올까 조금 걱정하면서.
M. 재미에도 종류가 있는 것 아닐까. 정 아니면 인물이나 상황을 적어 포스트잇에 붙여 두고 그들의 순서를 바꾸거나 하면서 이야기를 재배열해 봐도 되고.
재미에도 종류가 있다니 M은 따뜻한 사람이다. 그리고 M이 말한 것처럼 포스트잇에 정리해서 구조나 역할을 바꾸면 확실히 이야기가 더 재밌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야기의 구성보다 사람 이름이라던가 문장 하나에 꽂혀서 이후에 벌어질 일도 모른 채 써내려 간다는 데 있다. 가끔은 노래 한곡, 혹은 단어 하나나 감각 하나가 열 장의 이야기를 불러낸다. M. 이거, 꽤 잘못된 거 아닐까.
M. 만약 네가 여행을 간다고 생각해 봐. 그럼 넌 뭐부터 할 거야?(나라면 여행 가는 곳 근처의 카페를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아마 모두들 다른 지점부터 시작할 거야. 어떤 사람은 숙소부터 예약할 거고 어떤 사람은 그 지역 명소부터 찾아볼 테고, 또 어떤 사람은 관련 책부터 찾아볼 수가 있겠지. 소설을 쓰는 것도 같을 거라고 생각해. 모두 다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는 거라고.
오, 그럴싸하다. 모두 다른 지점에서 시작하는 글쓰기. 예를 들면 내 경우엔 여행지의 카페에서 시작하는 글쓰기. 정해진 공간에서 무작위 한 배경음악과 식물, 특유의 냄새, 실내의 변화하는 조도, 내뱉어지는 언어와 미리 정해진 이름, 그 속 사물의 관계, 그 모든 것들이 감각적으로 나를 둘러싸는 순간. 혹은 그 자체로 발화되는.
하지만 M의 말은 '내 글은 왜 재미없을까'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 내 방식에 대한 위안으로 계속 써도 된다는 격려에 가까운 것으로 느껴졌다. 괜찮아, 써도 돼. 재미는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은 써도 돼.
쓰지 않고 생각만 오래 하다 보니 재미란 과연 노력인지 능력인지를 생각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내 노력이 부족한 것인지 능력이 부족한 것인지. 결과는 점점 시무룩한 쪽(둘 다 부족하다는 사실)으로 흐르다 문득 어제 난데없이 이거다! 하는 순간이 왔다. 이래서 내 글이 재미없을 수밖에, 하고 쓸데없이 눈을 반짝이는 순간이 말이다.
나는 파주 지혜의 숲을 좋아한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이건 슬슬 그 순간을 끌어내기 위한 순서다. M 이 말 한 포스트잇의 배열을 바꾸는 것과도 같다. 아마도.) 책이 많다는 것도 나무가 많다는 것도 이유다. 우리 집을 가득 채운 책과 식물은 내가 짊어지고 책임져야 할 무게가 있지만 타인의 것에는 무게가 없다. 내가 돌보지 않아도 잘 굴러가는 상태는 얼마나 위로가 되고 휴식이 되는지. 여하튼 어제 그곳에서 그는 한 권 쏠게!라는 말을 했고 나는 한참이나 책장 사이를 둘러봤다. 고전을 살까 신간을 살까. 소설을 살까 인문학 서적을 살까.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그러다 한 권. 드디어 한 권을 골랐다.
그리고 여기서.
책상에 앉아 고심해서 고르고 고른 책의 제목과 내용을 보다 순간적으로 수긍하는 순간이 왔다. 어쩔 수 없지. 내가 정 이렇다면 어쩔 수 없지. 책의 제목은 「연필로 쓴 작은 글씨」, 저자는 로베르트 발저. 이 책은 1929년 그가 베른의 발다우 정신병원에 들어가 아주 작은 종이에 빼곡히 적은 메모를 나중에 타인이 정리해 출판한 책으로 작가가 몽당연필 하나와 잘게 자른 메모지에 적다가 누가 보면 나쁜 짓이나 부끄러운 짓을 한 것처럼 얼른 숨겼다던 글이다. 그럼에도 쓰기를 그만두지 못한 글. 누가 읽지 않아도 멈추지 못한 글. 아,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이 쓰고 싶어 멈출 수 없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거 아닐까 하고. 애초에 내가 자주 읽어 내려가던 글에 멋대로 정의한 조미료 같은 재미가 들어 있기나 하던가 하고. 결론은 쉽게 났다. 재미 따위 생각하지 말고 내가 쓰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글을 쓰자. 어떻게 쓰던 Q는 관종이라 할 테고 M은 괜찮다고 할 테고 그는 또 한 권을 책을 사 줄 테니 그냥 쓰고 싶은 걸 쓰자. 잘게 자른 메모지에 어떻게든 휘갈겨 쓰고 싶은 글을 쓰자. 재미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가볍고 발랄한 마음으로,
그냥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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