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자기 앞의 생
살짝 땀이 밴 피부를 좋아한다. 배어 나오다 못해 셔츠 아래 흐르는 땀도, 그것을 쓸어내리는 축축한 손등도 좋아한다. 거기엔 여름의 냄새가 있다. 여름비와 작열하는 태양 사이에서 오가는 습하고 더운 공기가 있다. 그 감각의 언저리에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나라는 인간 저 끝 먼 구석에 숨겨 둔 유년이라는 시절이 있다. 숨겨도 자꾸만 몸을 드러내는 올챙이의 몸처럼 굴곡진 어린 시간이 있다.
더운 지방에서 태어났다. 지금이야 더우면 수학공식처럼 에어컨을 틀어대지만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엔 선풍기도 없었다. 가난만 있었다. 혼자 나와 동생을 먹여 살리느라 스타킹에 올이 나가는 것도 모르고 일하던 엄마에게도, 밥을 하겠다고 반 장난삼아 주인집 마당의 가지를 꺾어 볶아대던 열두 살의 나에게도, 그런 나를 졸졸 따르던 동생에게도 빌어먹을 가난만 꼬질꼬질한 태를 내며 찰싹 들어붙어 있었다. 가난은 어디에나 있었다. 달셋방 계약이 끝나 바로 옆집으로 살림을 옮길 때 끌던 리어카 안이나 살짝 올이 풀린 소매에도 가난은 뗄 수 없는 택처럼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아니, 자르려 해도 자를 수 없는 얇은 막의 포장지처럼 가난은 우리를 덧씌웠다.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가난에게서 숨을 수는 없었다. 미국의 모병 포스터처럼 가난의 손가락은 언제나 날 가리키고 응시했다.
중학교 때쯤에야 집에 선풍기가 생겼다. 당시 엄마의 괴짜 남자친구가 산속 절에 찾아가 ‘이 무더운 여름, 집에 선풍기조차 없는 가난한 가정이 있습니다.’하고 갈취하다시피 받아온 것이다. 파란 날개의 선풍기는 여전히 엄마의 집에서 쌩쌩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여름을 좋아한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환희의 여름만이 아니다. 장마가 지난 뒤 흐르는 구정물 같은 것, 아니면 퀴퀴하게 부패한 음식 쓰레기의 냄새나 길가에 배를 드러내놓고 죽은 매미의 신체도 여름의 일부다. 나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듯 나의 가난도 외면하지 않는다. 이 글은 그런 이야기다.
일주일 동안 고향에 다녀왔다. 기차에 내리자마자 훅, 하고 폐를 스치는 더운 온도에 웃음이 났다. 낯익으면서도 익숙해질 수 없는 공기다. 칠 월 말 햇빛은 빛이라기보다 선에 가깝다. 날카로운 날로 살갗을 따갑게 하고 눈이 부시다 못해 멀게 하는 공기의 선부림. 여름은 있는 힘껏 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작은 저항이라도 하듯 손바닥으로 작은 차양을 이마 위에 만들지만 여름을 막을 길이 없다. 목 등으로 땀이 흘렀다.
역에서 익숙한 번호의 버스를 타고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뜨겁고 시커먼 아스팔트 대신 나의 유년이 그려낸 지도 위를 달렸다. 기억에 여름의 냄새가 겹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내 창밖으로 눈을 돌려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바뀐 영화관 자리와 그 사이로 재개발에 실패해 철거되지 못한 슬레이트 지붕, 폐가의 모둠으로 남겨진 골목들을 보았다. 어린 나는 그때 비행기가 되어 저 모든 길 위를 날았다. 양손을 펼치고 유영하듯 공기를 가르고 내리막을 내달렸다. 가진 것 없지만 없는 만큼 자유로이 길 한복판을 깔깔거리며 잘도 잘도 날았었다.
엄마의 집에는 아직도 내 방이 있다. 그 집을 떠난 지 십 년이 되었건만 내 방은 아직 주인이 떠난 줄도 모르는 듯 예전 얼굴을 그대로 하고 있다. 책상과 낮은 의자, 먼지 쌓인 일기장과 책들. 시간을 이동한 듯 나만 커버렸다.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바닥에 벌렁 눕는다. 엄마 남친이 남기고 간 선풍기는 털털거리며 돌아가고 머리맡에는 시원한 녹차가 놓여 있다. 이곳은 천국과 다름없다. 가난이 베푼 은혜가 있다면 작은 것에 기뻐하는 마음일 것이다. 책의 첫 장을 들춰본다.
「그들은 말했다. “넌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 때문에 미친 거야.”
나는 대답했다.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어.”」
책의 주인공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열네 살 소년 모모다. 책에는 창녀들과 버려진 아이들, 그들을 돌보는 다리를 저는 늙은 로자 아줌마, 죽음, 사랑, 그리고 가난이 나온다. 난 이 책을 모모와 비슷한 무렵에 읽었는데 읽자마자 단번에 이 책이다! 라고 선명하게 느꼈다. 나를 구원해 줄 책, 존재를 긍정해 줄 책, 조건 없이 사랑해도 될 증거가 되는 책, 그것은 바로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이었다.
책을 읽으면 그 책에서 가장 좋았던 대목을 일기장에 적어둔다. 그때 쓰던 붉은 일기장이 용케도 책장에 있어 꺼내 찾으니 다름 아닌 하밀 할아버지와 모모의 대화다.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산다고 생각했던 로자 아줌마가 매월 돈을 받고 자신을 돌봤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모모가 질문하는 장면이다. 그대로 옮겨보겠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어린 나는 왜 이 부분을 적었을까 하고 바닥에 드러누운 어른의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어린 나는 인간이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명한 하밀 할아버지가 고개를 숙일 만큼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 적확한 진실에서 고개를 돌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차피 한 번 사는 생을 부끄럽지 않게, 자신과 타인을 기꺼이 사랑하면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생을 선택하는 것.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사는 것. 아마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이 ‘사랑해야 한다.’로 끝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닳아서 반질거리는 교복 무릎처럼 내 유년은 조금 부끄러웠다. 가족을 버린 아버지도, 구멍 난 양말도, 잘 씻지 않아 기름진 머리도, 남자를 포기하지 않던 엄마도, 늘 주변을 맴돌던 가난도 부끄러웠다. 그래서 거짓말했다. 거짓도 반복하다 보면 진실인척 믿게 된다. 나조차도 그렇게 된다. '나의 아버지는 폭력을 휘두르다 도망간 것이 아니라 잠시 일 때문에 지역을 떠났고 집엔 에어컨도 선풍기도 다 있다. 내게 부족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류의 거짓말은 이 책을 한참 읽을 때까지도 맴돌았다. 내 생이 부끄럽고 더 나아질 것 없는, 거짓으로 싸매야만 하는 오물 같은 것으로 느껴질수록 더없는 거짓으로 나와 타인을 속였다. 아니 어쩌면 타인은 속지 않았을지 모르니 나만을 속인 건지도 몰랐다. 나를 미워한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모는 달랐다. 태생적 불행에 둘둘 말려서도 생을 긍정하고 제가 가진 모든 걸 잃고서도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절하도록 빛나는 긍정이었다. 그즈음 온전히 이 책 때문은 아니지만 내 주변에서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엄마의 괴짜 남친이 철새처럼 우리 집에서 몇 계절을 나고 부터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엉뚱했다. 네 마음은 어디 있니? 가끔 마음이 널 이길 때가 있니? 누구도 내게 묻지 않던 낯선 질문들을 해댔다. 생에게 방치되었다고 믿었던 우리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며 작고 쓸데없는 것에 눈을 빛내기도 했다. 깃털 같은 구름, 길게 뻗은 숲길, 희게 터지는 포말. 스치고 사라진다고 소중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작고 유약하다고 힘이 없는 건 아니라고, 너를 보라고, 너는 얼마나 강한 사람이냐고, 낯간지런 말을 잘도 해댔다.
말에는 씨앗 같은 힘이 있다. 씨앗이 움트고 가지를 틀었다. 어쩌면 난 정말 괜찮은 아이일지도 몰라, 작은 금으로 시작한 균열은 거짓들이 산산조각이 나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고서야 끝이 났다. 온전한 나였다. 선택할 수 없는 생의 조건보다 주어진 선택에 마음을 쓸 수 있는, 강한 나였다. 가난과 불행을 한 데로 싸잡은 나의 시선과 헤어지는데 그러니까 내가 나를 불쌍해하던 유년과 헤어지는데 뚜렷한 계기는 없다. 엄마와 그의 이별도 아니다. 그저 밀물처럼 서서히 밀려오는 말과 나무처럼 자란 자기 긍정, 아이처럼 뛰어다니고 탑을 쌓듯 책을 읽던 시간들이 있었을 뿐이다. 기억하자. 모모는 마지막에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 맨 시작은 나 자신이어야 할 것이다.
가난을 그냥 가난으로, 나를 그냥 나로 바라봤다. 나에겐 누구보다 씩씩하고 멋진 엄마가, 사랑스러운 동생이, 작은 것에 기뻐하는 마음이 있었다. 가난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그 시절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된 즈음 나는 더 이상 유년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헤어지는 동시에 성장했을 것이다. 혹시 아는지 모르겠다. 닳아서 반질거리는 교복 바지는 빛에 반사되면 윤슬처럼 반짝거린다.
일주일이 지났고 여전히 여름이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는 가방에 넣어온 ‘자기 앞의 생’이 놓여 있고 이 책에는 나의 유년의 냄새가 스며들어 있다. 남은 여름, 나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나의 유년과 다시 조우하고 이별할 것이다. 대신 이번에는 진짜 에어컨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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