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이 나를 키웠다. 쏘다니는 길거리의 네온사인과 회벽면, 이름 모를 풀들, 모르는 사람들이 나를 키웠다. 가족은 내게 무심했고 바깥은 방황하는 십 대 여자애에게 관심이 많았다. 값싼 일회성의 관심이든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이든 상관없었다. 싫으면 뒤돌아서면 그만이었고 세상에 그보다 쉬운 건 없어 보였다. 환심을 사고 여지를 남기는 것. 유쾌한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혹은 다 아는 척 연기하는 것. 그저 슬쩍 건네는 웃음이면, 넘어질 때 내미는 손이면, 오늘을 잊게 하는 무언가라면 환영이었다. 버려지고 방구석을 뒹굴어대는 생에 충실할 이유가 내겐 없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바깥에는 그런 애들 천지였다. 엄마가 없거나 아빠가 없거나 그들에게 맞거나 하는 그런 애들. 싸구려 관심을 애정이라 착각하려 하는, 진짜 애정이 뭔지 잘 알지 못하는 그런 애들, 나 같은 애들. 그런 애들이 모여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공터에서 가만히 앉아 있거나 서로를 좋아하거나 미워하거나 하는 정도였다.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감정과 타인도 모르는 사정을 붙들고 별 것 없는 바깥을 더 열심히 쏘다니는 것 외에는 알지 못했다. 비슷한 냄새가 나는 무리에 섞여 자신을 숨기고 순간을 사는 것 밖에는.
우린 한없이 어렸고 바깥은 빛났다. 누군가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의 잎을 잡으면 시험을 백점 맞는다고 했다. 시험 기간 열다섯 살의 아이들은 나무 아래 내내 낙엽에 손을 뻗었다. 늦은 밤, 그네에서 발을 구르며 목이 아프도록 노래를 불렀다. 버스 종점에서 종점까지 두 번을 왕복했다. 여자 애들 열명이서 인생 처음 바다를 찾아갔다. 친구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길게 뻗어가다 흩어졌다. 좋아하는 아이가 떠난 버스 정류장 자리에 앉았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아이가 입시 학원 문을 열고 파로마! 크게 외치고 도망갔다. 나머지는 키득거렸다. 이름이 뭐야, 모르는 아이가 고백을 했다. 한 번에 빙수를 세 번이나 연속으로 먹었다. 외상으로 먹은 핫도그 값을 내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어렸고 바깥은 무해했다.
며칠 전 뉴스를 봤다. 디스코팡팡이라는 새로운 어린 바깥과 그곳을 더럽히는 어른에 대한 기사였다. 내가 십 대일 때도 보통 어린 남녀가 모이고 음악소리가 큰 곳에서는 좀 잘 나가는 남자의 리드가 있고 여자의 동경이 있었다. 잘 나가는 애들은 턱을 들고, 따르는 애들은 시시덕거렸다. 어른들은 어린것들이!라고 얘기했지만 그들은 당당했고 부끄럽지 않았다. 부끄러울 일도 없었다. 바깥 out은 안 in에서 지친 자신을 위로하는 곳이었다.
뉴스를 보며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를 생각했다. 아마 어린 그들은 잃을 것이 없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언젠가의 나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은 순간의 감정을 따르는 것이라 여겼을지 모른다. 혹은 단순히 어딘가에 숨거나 속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호르몬은 터질 듯 분출하고 외로움을 견디기에는 여리고 고독을 감당하기에는 어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다시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다 바깥이 이렇게나 무서운 곳이 되었을까.
바깥이 기른 사람으로서 나는 바깥을 옹호한다. 모든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느 누구도 잃을 것 없는 사람은 없다. 그걸 알면서도 그것을 제 맘대로 이용하고 갈취하는 어른에게 화가 났다. 또 그걸 선동하고 따르는 아이에게도 화가 났다. 물론 내가 어렸을 때도 바깥은 무서웠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나의 바깥에만 어떤 호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바랄 뿐이다. 나는 그저 바라고 바랄 뿐이다. 모든 바깥아이들에게 다정한 호위가 있기를, 그들의 흔들대는 마음에 불안정한 표정에 외로운 마음에 빛이 들기를. 또 무섭게 바란다. 그들을 괴롭히는 바깥사람들에게 엄벌이 송곳처럼 쏟아지기를, 자신의 유년을 결코 잊지 말기를.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호위의 빛이 될 수 있기를.
아아, 그보다 더 먼저 바란다.
그들이 바깥에 나오지 않아도 충분히 안에서 위로받기를, 진심 같은 거 유치하지만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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