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당신이 쌓아둔 언어가 있다. 서랍 속 연필 사이에, 식탁에 비스듬히 세워둔 책에, 창문 밖 나무를 스치는 바람에, 제비나비의 푸른빛에 당신이 말하려던, 혹은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있다. 당신의 머리를 떠돌던 단상과 낱말은 어떤 형태를 띠지 못한 채 새벽안개처럼 사라지기도 하지만 당신은 안다. 언젠가 그것들은 다른 색과 질감으로 발화될 것이다. 당신의 언어로 빛나고 피우고 쓰일 것이다.
어느 소개서의 ‘좋아하는 것’이라는 공란에 ‘언어’라고 당신은 표기한다. 누군가는 달리기, 누군가는 숲을 적어 넣는다고, 언어를 좋아하는 건 어떤 뜻인가요. 또 다른 누군가가 묻는다. 언어는 모든 것이에요. 자신을 표출하고 타인이나 사물과 소통하고 경계를 허물거나 세우는 것, 자신을 드러내고 숨기는 것, 하나의 현상을 다각도에서 발견하는 것, 있는 것을 있는 대로 보거나 혹은 그 반대의 것, 공백이 밑줄로 완성되는 것, 그 모든 것이 언어예요. 좁게는 지금 내가 발음하는 말이나 하품이 될 수도 넓게는 나무가 내뱉은 숨이 될 수도 있는 그것을 저는 숭배해요. 허, 그러면 달리기도 숲도 하나의 언어라고 당신은 얘기하겠군요. 그는 무미하게 얘기했다. 그렇죠! 인원이나 속도가 다른 달리기도 늦은 오후 함께 걷는 숲도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는 거죠! 당신은 환희에 차서 대답했다. 그건 허무맹랑해요. 사랑이 모든 일의 해결책이라는 것처럼 대책 없고 허황된 거라고요. 그의 말에 당신은 웃으며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사랑이 모든 일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걸요. 물론 사랑도 결국 하나의 언어겠지만요. 그가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떠나고 당신은 생각했다. 언어가 아니라면, 그것들이 언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그가 떠난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당신은 그와 당신의 간극조차 언어에서 생겨났다는 것을 알아냈다. 각자가 규정한 언어의 범위와 한계는 생각보다 우리의 말과 행동, 사고에 깊이 관여한다. 당신이 말하는 귤과 그가 말하는 귤은 아침 일곱 시의 바다와 오후 다섯 시의 바다처럼 다르다. 어떻게 하면 그 간극을 없앨 수 있을까. 당신은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언어를 다른 이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당신은 쓰기 시작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다양한 형태의 언어를 단순한 언어로 번역하고 타인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당신은 주위에 쌓여 있던 언어에 색을 입히고 나열했다. 가끔 그것은 잘 전달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괜찮겠다고 당신은 생각했다. 당신에겐 쌓아둔 언어들이 넘쳐났고 애초에 당신은 사람들이 가진 각자의 언어가 좋았다. 실로 꿴 조각보처럼 조각조각 붙여진 경험과 상황이 개별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어쩌면 그 다양함이야말로 언어의 원천일지도 몰랐다.
최초에 터지는 홑소리는 ㅇ;이응이었다. 응, 으앙, 아야. 그리고 이어지는 미음;ㅁ은 평생에 걸쳐 발음할 단어를 만들어 낸다.
엄마, 마망, 마마.
이것 봐, 졸리지, 맘마, 배고파? 엄마의 간단한 말은 아이의 본능을 잠재우고 아이는 그들의 입을 보고 흉내를 내며 말의 기초를 배운다. 엄마가 발음하는 세계는 고스란히 아이를 품고 아이는 그것들을 꿀물처럼 빨아들일 것이다. 엄마, 이것 봐, 졸려, 맘마, 배고파. 언어는 사랑으로 전이된다. 그러나 당신은 확고하다. 그 이전 최초의 언어는 이미 눈 맞춤이나 웃음소리라고, 혹은 엄마가 떠 먹여주는 쌀미음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발음되지 않는다고 해서 언어가 아닌 건 아니야. 당신은 확신했다.
묽게 내리는 어둠, 금빛으로 빛나는 산등성이, 천천히 식어가는 커피 잔의 온기, 이름 모를 이의 눈인사, 호두나무 잎의 냄새, 투명한 물의 시원함, 전시회의 그림, 강아지가 흔드는 흰 꼬리, 쏟아지는 비의 리듬, 적운란이 이동하는 속도, 반가운 연락, 유리와 빛이 만들어낸 무지개, 밀려드는 사람들의 말소리, 시동을 켜자마자 나오는 라디오, 적절한 시기의 적절한 행운.
여전히 당신 주위에는 언어가,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정의하고 사랑하는 언어가 당신의 세계를 채우고 흘러넘치고 있다. 당신은 다시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이 언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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