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거기에 있다

by 윤신


어느새 숲이다. 햇빛은 일정하게 모든 면면에 닿아 부서져 반짝인다. 그에 반사되는 진하고 연한 초록의 계열, 바람에 흔들리는 목이 긴 풀, 길고 넓은 잎과 가까이 뛰어다니는 벌레들. 메리 올리버는 길에서 폴짝폴짝 뛰어가는 메뚜기에게 말했다. - 넌 네가 하는 일을 참 잘하는구나!


숲의 아침은 고요하다. 생명들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깨어나 벌써 하루를 시작한 참이다. 조금의 빛과 온도차에도 민감한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호흡을 하고 계절을 감각하다 밤이 되면 잠에 들 것이다. 한 주먹의 햇빛만큼 다른 하루를 보내고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푸른 9월의 아침, 그렇게 나는 비에 젖은 산길을 걸었다.


발밑에서 부러지는 나뭇가지, 물에 젖은 흙, 풀벌레 소리의 간격, 늦여름에 돋아난 아카시아의 연둣빛 잎, 모든 것 사이에 비치는 하늘, 넓게 핀 붉은 버섯, 내게 붙어 나를 따르는 그림자.

그 모든 것은 내게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나를 따른다. 서로에의 완벽한 복종, 혹은 완벽한 독립. 저마다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이 그들은 완벽하다. 중독처럼 숲은 나를 이끈다. 숲에 오고 싶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나는 숲에 놓여지고 싶었다. 원래 이곳에 소속되어 있던 생물처럼 흔들리고 정지되고 싶었다. 적막한 숲 사이에 미아처럼 서 있고 싶었다.


나무의 뿌리가 벌겋게 나체를 내미는 이곳에서 나의 언어는 통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닿지 않는 그들의 말이 숲을 채우고 나는 그 사이를 조용히 걷는다. 떡갈나무의 넓은 잎이 툭, 떨어진다. 그들의 교향곡은 이어지고 나는 아주 천천히, 떨어진 잎의 크기만큼의 보폭으로 더없이 천천히 걷고, 걸음은 점점 더 느려지다 마침내는 멈춰 선다. 어제는 내내 비가 쏟아져 내렸다. 숲은 제 몸 그대로 비를 받아내고 빨아들이고 내쉬고 있다. 축축한 숲의 호흡을 들이마시고 나는 다시 걷는다. 아마 이 산책은 긴 여정이 될 것이다.


이 숲엔 내가 좋아하는 길이 있다. 탁 트이고 구불구불한 길을 얼마쯤 걸었을까. 아마 이쯤이었던 것 같은데 아직 그 길이 나오지 않아 불안해진다. 그 길을 지나쳤을까, 내가 너무 늦어 그 길이 달아나 버렸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아직 산의 낮은 지면 사이로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은 바다가 보이기 직전 왼쪽으로 꺾어져 있다. 아마 조금만 더 가면 길이 나올지도 모른다. 나의 조급함을 쓸어내리며 변함없이 나와 다른 생명을 호위할지도 모른다. 젖은 낙엽이 발자국과 숲의 배경음을 깊게 삼키는 사이 나무 사이로 거리를 가늠하다 문득 제자리를 지키는 일은 누군가에게 위로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다고 여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길에 이름을 지어 줄까.


인간은 아끼는 것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애정이라 여긴다. 언젠가 자작나무의 눈이 가득하던 어느 숲에서 누군가 ‘YS길’이라고 나무판에 적어 걸어둔 것을 보았다. 나의 이니셜과 같아 놀라면서도 그런 이름은 아무래도 별로라 여긴다. 교토에 있는 철학의 길처럼 어떤 생각을 던져주는 이름이면 좋겠다. 평온의 길, 사색의 길, 기쁨의 길.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펼쳐주는 무엇이면 좋겠다.

산의 내리막에 다다랐다. 아무래도 그 길은 지난 것 같다. 오다가 바다가 보였던가, 어떻게 내가 그 길을 지나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상관없다. 그 길은 내가 걷지 않아도 그곳에 있다. 여전히 제자리에서 누군가를 호위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숲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숲의 누군가가 사라져도 지나가도 혹은 멈춰도 숲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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