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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렇게 살아

by 윤신



산책 겸이라며 한낮의 두 시간을 걸어온 그녀가 말한다.


그녀 : 난 있지. 이렇게 생각해. 모든 건 구성요소의 하나일 뿐이라고 말이야. 사람도 일도 그냥 제자리에서 생을 구성하는 요소인 거야. 좋고 나쁨 없이 연극이나 영화의 하나의 사건, 인물, 소품처럼 제자리에 있는.


그녀의 말간 눈에는 조금의 의심도 불안도 섞여 있지 않다.

나는 묻는다.


나 :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이라 여기는 거야?

그녀 : 아니, 있어야 할 것도 아니야. 그저 있는 거지.


있어야 할 것도 아닌 그저 있는 것. 내 앞에 놓인 물 잔에 사선으로 그어진 햇빛, 등 뒤의 온기, 밤을 줍다 까맣게 그을린 그녀의 손, 알밤 두 개, 그녀의 빛나는 눈, 의자 당기는 소리와 옆 자리 사람들의 말소리, 마시다 만 커피. 이건 지금 우리의 구성 요소가 되는 걸까를 생각하다 나의 것을 꺼낸다. 말하자면 마음을 놓게 하는 것, 마음을 잠재우는 것들.


나 : 음, 비슷한 맥락일지 모르지만 난 모두 지나고 봐야 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모두 지나고 봐야 알 수 있는 거라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당장 기쁜 일도 그렇게 기쁘지 않고 밀어닥친 슬픈 일도 그렇게 슬프지 않게 돼. 지나야 아니까. 이 일이 어떻게 흐를지 지나고 봐야 아니까.

그녀 :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쁨과 슬픔의 파고가 점점 잦아들지. (웃으며) 물론 또 모를 일이지만.

니 : (같이 웃으며) 역시 모를 일이지.


수많은 마음들은 그 끝에 저마다 다른 생의 태도를 가진다. 모두 다르지만 또 어느 한편으로 닮아 있기도 하다. 일주일 전 또 다른 그녀의 말이 떠오른다.


또 다른 그녀 : 온다고 미리 얘기하지 마. 그럼 우리가 기대하잖아. 그러다 무슨 일이 생겨 못 오게 되면 우린 실망할 테니 그냥 올 수 있을 때 와. 그럼 그 깜짝 놀람에 우린 순수히 즐거울 거야. 우리 기대하지 말고 살자, 주지도 말고. 우리 그렇게 살아.


기대하지 않는 삶, 가벼운 인지가 이어지는 삶, 관람하듯 지켜보는 삶.

그리하여 흰 포말을 몰고 오는 격랑보다 가벼운 물살이 살짝 발가락에 닿는 정도의 일렁임에 가까운 물을 닮은 삶. 이건 여자 셋이 습득한 삶의 태도일까 기술일까 따위를 생각하다가, 그렇다면 그 배경에 삶은 모를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겠구나 생각한다. 그럼 그럼, 물론 모를 일이지, 역시 모를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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