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할 때 만난 연인이 있다. 젊은 우린 자주 배가 고팠고 몸안 어딘가가 열정으로 들끓었지만 가난한 연인은 어딜 쉽게 갈 수도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다. 우리의 시간을 채운 건 적당한 한 끼와 하루 커피 한잔, 빛에 따라 얼굴을 바꾸는 거리, 미묘하게 다른 날씨, 부서지고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 앞 벤치, 버스 안, 전화 너머 목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는 수많은 걸음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나의 시간을 채운 건 무수한 길과 차고 넘치는 걸음들이었다. 산책이라 이를 수 없는, 방황을 기본으로 한 끝없던 걸음들.
멀리 살아 멀리 애틋한 응원을 보내는 일이 많았지만 사랑은 그들을 끌어당겨 놓지 않았다. 그렇다. 난 그들이라 적었다. 지금의 내게 그 둘은 먼 타인처럼 느껴진다. 들뜬 열정과 부끄러움, 설렘, 좌절 언저리의 현실, 관계와 거리, 애정과 존경, 몸에 대한 갈망, 치장,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아주 먼 타인의 것처럼 낯설 뿐이다.
그들은 가끔 만났다. 가끔 만나 예의 연인들이 하는 것들을 흉내 내거나 탐하고 대부분의 시간은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리워만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깊거나 얕은 대화는 늘 부족한 어떤 것으로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런 선택들을 하는지 그들은 알 수 없었다. 그저 계속 먼 자리에서 그리워하며 추측할 뿐이었다. 의문을 가진채, 이유를 모른 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침묵할 뿐이었다. 사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껍데기를 까고 속을 드러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 연인은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겁이 났다.
가난한 연인은 차비를 쓰면 밥값이 걱정되었다. 선택의 기준은 취향보다는 가격표로 되도록이면 싼 것, 싸지만 괜찮은 것을 골랐다. 취향이라는 게 그렇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은 돈이 들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까지도 돈이 든다. 숨 막힐 정도로 큰 폭의 캔버스에 담긴 모네의 수련이나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얹는 유기농 올리브 오일, 시향의 오케스트라 연주는 직접 마주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알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여유가 필요하다. 거대한 스펙트럼에서 자신의 것을 고르는 선택과 여유. 그것은 시간 외에는 가진 게 없는, 시간마저도 돈을 위해 전부 쓰는 젊고 가난한 연인에게는 가질 수도 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로 어린 우리가 그저 유행을 따랐던 건, 따를 수밖에 없었던 건, 몰취향 이어서라기보다 가난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헤어지고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나이 든 우린 재정적으로 여유로웠고 어떤 면으로는 부끄럽지 않았다. 솔직하게 그 시간을 복기하고 부족 lack을 이야기하고 그때는 감히 먹지도 못할 참치 회 같은 음식을 먹었다. 다른 점이라면 더 이상 연인이 아니라는 점뿐이었다. 그는 말했다. 왜 그때보다 지금이 더 편할까요. 그러더니 혼자 답했다. 그때 우린 너무 가난했지요. 너무 어렸지요.
지금의 나는 신맛의 커피와 책과 그림 전시회를 좋아하고 여러 형태의 가방과 안경을 산다. 익숙한 곳에 있는 것도 즐기지만 배경이 멋진 새로운 곳에 나를 두는 것을 좋아하고 유행에 맞는 옷보다 내 몸의 형태에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아낀다. 폴 스트랜드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좋아한다. 걷는 것은 여전하지만 무목적의 걸음이 아닌, 휴식과 풍경을 위한 완벽한 산책에 가까운 걸음을 한다. 누가 봐도 취향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이제 나는 나를 안다. 적어도 일부분의 나를 안다. 그리고 또한 안다. 이 모든 취향은 내가 지나온 모든 경험과 시간의 집적이다. 방황과 무수한 시선, 몸에 두른 유행의 변화, 걸어 다니며 만난 만남과 색, 형태, 그 모든 것들이 골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는 상당한 시간과 품, 실패와 돈이 들었다.
가난도 어찌할 수 없는 치기 어린 젊은 연인.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생각하다 에르노의 문장이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자신이 어떤 말들을 이제는 사용하지 않으면 그 말들이 사라졌다고, 자신이 먹고살만하면 가난이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바깥 일기 81면, 아니 에르노」
있을 것이다. 분명 여전히 나의 바깥엔 젊고 가난한 연인이, 서로의 곁을 훔쳐보고 무연히 공터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걷곤 하는 미숙한 연인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의 테이블 옆자리에서 기차역 혼잡한 인파 속에서 SNS 메신저 속에서 후미진 영화관 뒷좌석에서 식당의 웨이팅 줄에서 지하철에 미어 드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을 것이다. 서로의 손을 잡고 등을 쓰다듬고 어깨를 기대고 입을 맞추며 쑥스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있었고 지금도 그리고 나와 당신이 죽고 만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젊음과 사랑이라는 단어는 가난과는 딱히 관계가 없다. 내 경우엔 그랬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의 수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한다. 가난하나 젊은 그들. 가난하나 사랑하는 그들. 그들은 그걸로도 얼마나 충분하고 아름다운가를. 나는 그들이 자신을 알기 전에, 알기 위해 내딛는 벌거벗은 발바닥을 추앙한다. 결여는 그들을 단단하게 할 것이다. 맨 몸과 맨 마음으로 서로를 덮고 받치고 껴안을 이유가 될 것이다.
그들, 이미 나에게서 떠나갔으나 세상을 가득 채울 그들. 나는 언제고 그들을 격려하고 응원할 것이고 그들의 찬란한 방황의 걸음과 가난한 젊음을 속절없이 부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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