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떠올린다. 약간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고 푸른 물과 그 속을 유영하거나 걷는 몸, 물의 저항, 몸을 타고 흐르는 물살과 낮은 파고, 수면에 닿는 물방울, 부딪히고 터지는 흰 포말, 푸른 양수의 포옹, 가벼운 몰입, 손이나 다리를 뻗는 동작이 가진 단순성과 반복, 중력과는 다른 물의 장력, 맨 몸에 가까운 자유.
나에게 있어 그것은 고요나 안온으로의 회귀, 혹은 지치고 가라앉는 마음에 부력을 밀어 넣는 일이다. 오늘처럼, 시작이 피로하던 오늘의 아침처럼 끝을 모르게 마음이 흐트러진 날이면 떠올리는 것들 - 빛이 꺾이는 수면과 일렁이는 물결, 투명과 푸른색의 경계 어딘가.
그리고 그 가운데 빨간 수영복 같은 것.
*
바람이 미친 마음처럼 불던 날 집집마다 베란다에 내놓은 잎이 긴 식물들이 온몸을 풀어헤치고 비를 맞았다. 거리는 조용했고 오직 비와 바람만이 제 세상인양 존재를 드러냈다. 태풍이 온다고 했을까, 이미 태풍의 한가운데일까. 주 week마다 렌트비를 내던 스튜디오의 커다란 창문을 열고 높고 낮은 건물들을, 짙은 색으로 번져가는 그들의 몸을 지켜봤다. 머리칼과 얼굴에 닿는 비가 나쁘지 않았다.
나는 서른한 살이었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던 일은 내 일이 아니었고 연애 상대도 내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뭘 해야 할지, 어디서 살아야 할지, 누구를 만나야 할지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그날도 누구를 기다렸던가. 하기야 그 당시 난 무엇이든 기다렸다. 사람이든 일이든 장소든 기다리면 올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게 내 일이라 여긴 지도 몰랐다.
비바람을 온 얼굴로 맞아가며 젖은 콘크리트 건물들을 바라보다 무심히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직사각형의 푸른 수조를 닮은 수영장이 있는 자리였다. 양변이 긴 사각의 물. 수면에 물방울이 튀기도록 비가 오는데 누군가 수영을, 그것도 새빨간 수영복을 입고 하늘을 바라보며 배영을 했다. 가슴과 배로 비를 한가득 맞으며 등으로 물살을 헤쳤다. 부드럽게 턴을 하고 자유형, 다시 배영. 비가 와도 상관없다는 듯 아니 더 즐겁다는 듯 오래 물속에 머물렀다. 내 머리가 온통 비에 다 젖을 때까지 그녀는 빨간 점으로 물 안에 계속 머물렀다.
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멎고 멀리 오렌지빛 하늘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늘 종잡을 수 없던 날씨였다. 사는 것도 날씨와 같을까, 중얼대며 건조기에서 수건을 꺼내 머리를 말렸다. 창을 열고 다시 수영장을 봤다. 빨간 수영복의 여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푸른 수영장의 빨간 수영복. 그것은 하나의 상像처럼 각인되어 몸과 마음이 쏟아질 것 같은 날이면 다시 내 앞에 선다. 모든 것이 그대로다. 나는 어김없이 비를 얼굴로 맞고 수영장에는 가벼운 몸으로 빗속에서 유영하는 그녀가 있다. 뛸까. 뛰어서 저 물에 나도 함께 풍덩 들어갈까.
나는 아직도 뭔가를 기다리며 일상의 부력을 꿈꾸는 지도 모르겠다.
*
할 일 없이 피드를 내리다 하나의 영상이 몇 번이고 반복되도록 내버려 뒀다. 바다와 하늘, 파란 계열의 레이어 한가운데에서 빨간 비키니를 입은 노인이 걷고 있는 영상이었다. 어깨와 등이 까맣게 탄 노인이 라피아햇을 쓰고 허벅지까지 잠긴 수면을 헤치며 책 한 권을 손에 쥔 채 읽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짧은 영상은 계속 반복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 바람 소리, 바람이 밀어내는 바닷소리도 반복된다. 감탄했다. 그것은 동작이 들어간 휴식,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쉼이었다. 그 느리고 단순한 행위가 주는 안락함이라니. il dolce far niente 달콤한 게으름. 누군가 적은 댓글을 보며 게으름의 정의를, 게으름의 특권을, 게으름이 주는 나른함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더없이 매력적이던 바다 한가운데서의 읽기.
그러다 오래전 비 오는 날 수영하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들이 건네는 평온과 무심함, 고요 같은 것들이 겹쳐졌다. 보통의 휴식을 넘어선 뭔가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 이를테면 그들에게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시간에 대한 고집과 가벼운 일탈에의 의지 같은 것이 있었다.
노인이 책을 읽다 고개를 든다. 바다가 있다. 푸른 바다와 문장의 나열. 그 숨 막히도록 조화로운 리듬 가운데 다시 한번 빨간 비키니가 있다. 푸른 물과 빨간 수영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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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쉰다. 숨을 쉰다는 것을 의식하고 다시 한번 숨을 쉰다. 그리고 또다시 물을, 약간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갑고 푸른 물을, 그리고 그 가운데의 빨간 수영복을 떠올린다. 찰싹, 발끝에 차가운 물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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