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라고 쿨하게 말하고 싶지만 차마 못하고

feat. 청춘, 산울림

by 윤신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스물일곱의 김창완이 부르는 <청춘>은 담담하다. 푸르름의 한가운데에서 이 여름 같은 계절이 갈 것을 안다고, 그것은 마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흔하고 뻔한 일이라고 노래한다. 얄랑대는 기타를 배경으로 조금의 동요도 없이 가버릴 청춘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가버릴 청춘은 아직 가지 않은 청춘이다. 언젠간 가겠지만 아직 가지 않은 것. 아직 가지 않았기에 이 물러감은 사사롭지 않다.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고 이십 년 뒤의 자신을, 자신의 주위를 상상한들 상상은 상상이다. 청춘은 아직 그의 곁에 시퍼렇게 머물러 있다.


지난주 토요일 다섯 살 아이를 데리고 이대역 근처 작은 예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오븐 점토로 열쇠고리를 만드는 체험 수업이었다. 다섯 살 아이도 가능할까요? 조심스런 질문에 작가는 흔쾌히 환영했다. 여차하면 자신도 도와주겠다고, 하지만 별문제 없이 만들 거라는 대답도 함께였다. 그런데 정작 가보니 문제는 점토가 아니었다. 퍼렇게 떠다니는 청춘이었다. 나와 아이를 제외한 참가인들은 대부분 관련 젊은 미술작가였고 그들은 그들만의 관심사와 소담을 나누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겐 그들의 공통된 이슈가 있다. 젊음이 있다. 나와 아이는 풍선에 매달린 실처럼 달랑댔다. 어떤 관심사도 나이대도 생활도 맞지 않는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괜히 왔나, 해결도 못할 마음을 썼다.


오븐 점토는 딱딱한 성질이라 오일을 발라 부드럽게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아이의 점토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이, 살갗에 편한 섬유를 입겠다고 맘먹고 장만한 캐시미어 카디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옷을 주으며 떨어진 청춘은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살 수도 주울 수도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조물조물 점토로 둥근 원을 만들다가 아이 얼굴을 만들었다. 딸아이는 아직도 단단하기만 한 점토에 오일을 묻혀 조물대고 있었다. 엄마, 이것 봐. 코끼리야. 어쩌다 꼬인 긴 형태를 만들고는 뿌우, 코끼리 흉내를 냈다.

그사이 난 코끼리 무리가 아닌 회한의 어디쯤을 헤맸다. 젊은 나는 왜 저렇게 적극적 이질 못했을까. 하고 싶던 일에 왜 자신을 갖지 못해 실컷 방황만 했을까 같은 감상으로까지 흘렀다. 불현듯 난 단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면 몽땅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마도 이 청춘의 상실에 대한 감각은 순간의 일이 아닐 것이다. 페스츄리의 얇은 층처럼 차곡차곡 쌓이던 것이 하필이면 거기서 불쑥 터졌을 것이다. 거울을 볼 때마다 피로한 밤이 늘 때마다 좁아지는 인간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알지만 외면하던 것들이 그들의 푸름 속에서 포말처럼 터졌을 것이다. 아는 것을 알지 않으려는 망각, 프로이트는 이런 것을 '자발적 망각 혹은 유도적 망각 motivated forgetting'이라고 했던가.


영 찜찜한 기분이 되어 돌아와서는 아는 언니와 그 일에 대해 얘기했다. 대충의 간략한 요약을 듣던 언니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짧게 말한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런 데 익숙해지는 일인 거 같아. 주위로 물러나는 것,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 환희의 시간이 가고 밀려가는 시간이 되는 것. 물론 저마다의 생에서는 주인공이겠지만.


두리뭉실 어설픈 것보다 정확하게 인지하는 게 인정하기에 좋다. 나는 나의 청춘이 지나갔음을, 꿈에 대해 열렬히 토론하고 눈을 밝히는 시간은 지났음을, 나라는 인간은 현재 엄마라는 하나의 역할로 규정되어 있고 그다지 흥미를 꺼낼 수 있는 인물이 아님을, 깔끔히 인정했다. 아니, 여기서 깔끔히는 빼자. 생각해 보니 그렇게 깔끔하지는 않았다. <은교>에서 나온 인용문, 그러니까 시어도어 로스케의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나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를 굳이 들먹이며 언니, 나이 드는 게 왜 벌처럼 느껴져야 해, 난 그런 거 싫어하고 질척댄 것도 같다. 하지만 그것도 인정하자. 싫은 건 싫은 거다. 나는 나이 드는 게 벌처럼 느껴지는 게 싫다. 명랑하고 싶다. 가볍고 후련한 마음이고 싶다. 나도 아직 마음은 젊은 작가 못지않다고 우기고 싶다.


저도 이 노래를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청춘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습니다.


콘서트 장에서 김창완은 청춘을 부르기 전인가 후인가 이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갈 줄 알았지만 그렇게 빨리 갈 줄 몰랐던 것. 아직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가 되어 버린 것. 아마도 그게 청춘인가 한다.


물론 난 아직 청춘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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