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 쓰라고, 쓰렴, 써라, 쓰길 바라.
어조를 바꿔대며 머릿속에서 중얼대는 목소리의 볼륨을 낮추고 찬물을 마신다. 유리창 너머에서는 잎을 찢을 듯 열을 내는 태양이 있다. 잎의 무늬는 엽록소의 결핍으로 생긴다던가. 그러면 이런 날은 무늬 없는 잎들만 태어나겠네. 같은 지붕과 같은 마당과 같은 색의 집들이 펼쳐진 뉴저지의 어느 마을처럼 이 집이 내 집인지 저 집이 내 집인지 헷갈리는 잎들이 아, 여기도 저기도 모두 내 세상이구나 하고 태어나겠네. 그러다 맞는 첫서리에 깜짝 몸을 움츠리겠네. 하지만 이건 내가 쓰려던 말은 아니고 쓰려던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새빨간 매니큐어가 손톱 끝부터 벗겨져 끝내 가운데만 덩그러니 남았다. 왼손 약지는 영국, 오른손 중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왼손 엄지는 우리나라. 하지만 우리나라는 섬도 아닌데. 다 벗겨진 매니큐어를 남겨 두는 마음은 게으름인지 키치에의 늙은 갈망인지. 빨간 섬들이 키보드 위에서 길을 잃었다.
반복, 무수한 반복, 엄마,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맺고 또 지나면 다시 꽃이 핀대, 그렇게 생이 계속 이어지는 거래. 인간도 꽃처럼 다시 피면 좋을 텐데, 죽고 살고 죽은 동안은 긴 잠을 자고. 하지만 여기에는 쓰고 쓰지 않는 반복만이 남아 있고.
호리지차. 보리차를 닮은 단어를 삼키다가 모서리에 입안을 다쳤다.
나는 잘 쓴 글을 보면 화가 나. 화가 나서 종이를 찢어 염소처럼 씹어 먹고 싶어 져. 음절 하나하나 뚝뚝 잘라다가 잘근잘근 씹고 삼켰다가 다시 구역질을 해 씹고. 질투는 힘이라는데 나의 질투는 식욕으로 이어지는가 봐. 저렇게 빛이 투명하게 비치는데도 전구가 없이는 글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글자들을 이렇게 씹어 먹고 있다니. 쓸 것도 없는 빈 화면에 주저앉아 있다니.
호리지차는 반복에의 차이. 다친 입안을 혀로 쓸어내린다.
동의어 반복은 비경제적이에요. 그녀의 말을 떠올리다 글을 쓰는 것에도 경제가 들어갔구나, 그래서 내가 서툰 거구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생략의 미학. 모두 다 지워버리면, 이 글을 죄 지우면 백자로 빚어질까
<-Backspace 키를 주욱 누른다. 모두 지우는데 36초가 걸렸다. 다시 돌리는 데는 10초가 걸렸다. 반복. 다시에의 반복. 그러나 거기에는 호리지차가.
독자, 독려하는 자. 나의 독자는 오로지 나라서.
이런 날 빛 아래 있으면 나의 무늬가 펴질까. 태생의 결핍이 채워질까. 자비 없는 태양에게 찢긴다면 나는 더 이상 나의 독자도 될 수 없을 텐데. 아아, 그러나 거기에는 자유가. 더 이상 읽거나 쓰지 않아도 되는 일생의 해방이.
쓰라고, 얼른 쓰라니까, 써, 써, 쓰라고.
중얼댐이 외침이 되도록 내버려 둔 채 오후 두 시를 걷습니다. 올릴 수 있는 만큼 볼륨을 올려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게. 오직 쓰라고, 얼른 쓰라니까, 써, 써, 쓰라는 말만이 반복되고. 유일한 독자는 소리로 가득 찬 진동 속에서 붉은 손끝의 섬, 빛에 발화發火가 시작되는 지점을 쳐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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