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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l 01. 2024

'못'의 변명


  어제저녁즈음인가 책을 읽다 한 해의 시작에 보는 첫 나비는 미처 작년에 죽지 못한 나비,라는 문장을 읽고 잠깐 슬퍼졌습니다. 부드러움이 움트는 계절의 날갯짓을 보고 죽음의 유예를 떠올리다니. ‘첫’이라는 단어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마지막'을 떠올리고, 어린 살결 같은 날개로부터 예고된 무덤을 떠올리다니, 하고요. 그러나 조금 솔직해지자면 요즘 내 시야의 명도와 채도를 확 끌어내린 건 남의 글이 아니라 나의 글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쓰지 못했다는 사실. 쓰기 위해 앉는 일, 쓰려는 일도 남의 글을 읽다가 오는 가벼운 슬픔처럼 쉬우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해요.


  동시에 '못'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안 한다와 못한다는 엄연히 다르지요. 어느 언어든 대체로 그 언어만으로 강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영어나 독일어, 스페인어, 알파벳을 쓰는 언어라면 강조하고픈 글자들을 대문자로 쓰고 일본어의 경우에는 보통히라가나나 한자로 쓰는 단어를 가타카나로 적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읽고 설렜던 문장 Zur kunst gehört liebe(love belongs to art)을 볼까요. 사랑은 예술에 속한다는 말. 그 말 어디에 대문자를 넣을지에 따라 느낌은 조금씩 달라요. 사랑 LIEBE을 대문자로 쓴다면, 역시 사랑이지, 우리가 아는 그 사랑이야말로 예술에 속할 수 있는 어떤 것이지,라는 느낌에 가깝다면 예술 KUNST가 대문자일 경우에는 사랑도 결국 예술에 속할 뿐이라는, 예술의 거대하고 축적적인 영역이 더 강조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느낌은 전부 다를 테지만 적어도 쓰는 이는 의도를 지니고 쓸 수 있어요. 작게 낮춰 흘리듯 발음하는 정관사나 조사를 부각해 또 다른 의미를 집어넣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그들의 언어로는 그 자체로도 하지 않는 행위의 이유가 '못'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를 강조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물론 지면이나 문서에서는 한글도 가능해요. 제가 첫 문단에서 쓴 것처럼 작은따옴표를 쓰거나 글씨의 기울기를 이용해 다른 느낌을 줄 수도 있고 눈에 띄길 원하는 문장을 드래그한 뒤 B(굵게)를 누를 수도 있어요. 글씨를 키우거나 또는 작게 줄일 수도.

  그러나 언어 그 자체로서, 그러니까 언어가 가진 스펙트럼만으로 어떻게 그 글이 밑줄을 친 듯 눈에 띌 것인가 하는 건, 어떻게 적어야 내가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다는 것을 어필할 수 있을 것인가, 같은 건 다른 문제지요.


  되돌아가서 '못'의 변명을 하자면 쓰지 못하던 첫날은 지난밤 쓴 글의 여운과 피로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었어요. 조금 쉬어도 좋겠단 마음, 한껏 게으르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지요. 둘째 날은 일상에서 주운 단어와 단상을 어떻게 결합하고 이어 붙일지에 대한 고민. 자다가도 말똥한 정신이 되어 떠오른 생각과 걷다가 흘린 말들, 앉아서 삼킨 책의 언어가 침대와 책상, 온 집안에 뒤엉켰어요. 그리고 또 거기서 하루 이틀. 뒤엉켜 헝클어진 말을 종이 실패에 감아 한 줄씩 뽑아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며칠을 미뤘죠. 하루가 이틀이 되긴 어려워도 이틀이 일주일이 되기는 금방이지요. 설마 이대로 쓰지 못하는 몸이 되는 건 아닐까 괴로워하다가 언제는 또 쓰는 몸이었나 하고 웃었어요. 굳이 거기서 자책까지 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태만과 자괴는 유년의 절친처럼 찰싹 붙어 있더라고요.


  겨울장마. 어제는 없는 단어들이 모인 세상을 생각했어요. 텅 빈 그곳은 누가 꺼내 쓰는 일 없이 적막하겠지. 알아보는 이 없이 외롭겠지. 그림자가 덮는 이불, 개미의 속눈썹, 볕의 속내, 차가운 온천, 터진 계란 흰자. 어쩌면 그곳은 인간의 미숙한 상상력이 이름을 붙이지 못한 세상일지도요.


  뜨거운 보리차에 김이 서리는 걸 무연히 보다가 무엇이든 써야지, 하고 마음먹었어요. 없는 것을 상상하는 마음으로 가진 것을 정리해야지. 실패에 엉킨 말들을 하나씩 추스르고 꺼내는 데 필요한 것은 상상일지도 몰라. 겨울의 한끝에서 맴도는 나비를 보고 봄의 볕에 대한 기대가 아닌 미처 죽지 못한 죽음을 떠올리게 한 것은 그러한 쓰는 마음일지도.


  쓰지 못한 날도 결국은 쓰는 날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지금도 조금은 그래요. 쓰는 행위가 꼭 글자로 남겨야 하는 건 아니라고. 그리고 쓰여진 모든 말은 그 자체로도 모두 중요한 것이니 강조될 글자나 문장이 없는 게 좋은 거라고도. 뭐, 잘은 모르지만 적어도 '못'은 그렇게 생각한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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