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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n 26. 2024

물과 시간에 대해서


 해가 지는 동안의 시간이라는 단어가 있다. 물이 밀려나가는 동안의 시간이라는 단어도 어디에나 있을 것이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시간의 간격. 그 정도의 차이와 물낯의 무늬. 이러한 지독한 시간의 반복들을 분명 누군가는 간략한 단어들로 적어 두었을 것이다. 당신도 알겠지만 간조의 모래는 발이 푹푹 빠진다. 빠진 자리에는 손끝을 적실 정도로만 물이 고이지만 여기는 여전히 바다. 빠져나간 물은 어느샌가 이전처럼 차오를 것이다.


 밀물이 나간 자리에 죽은 고기가 몸을 드러낸다. 갈매기가 날아와 그 몸을 채갔다.


 비가 왔다. 물을 머금은 초록의 숲과 나무가 만져질 듯 선명해서 이만큼 물기가 선명했던 어느 날들과 어느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들이 섞인 어느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들은 물을 가득 머금고 있는데도 수채가 아닌 아크릴의 붓칠로 남아 떠내려가지도 섞이지도 못하고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며 가끔 발가락이나 몸의 어딘가에 찰싹하고 붙어버렸다.

 습도의 기억은 무섭네, 하고 와이퍼로 밀려오는 시간들을 밀어냈다.


 그리고 미리 적어버린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


 며칠 전 도서관에서 노트북 자리를 예약해서 쓰다가 자리를 떠나기 전 종료 시간을 적을 때였다. 시작 시간은 13시 17분. 대략 한 시간 정도 머무른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14시 17분이라고 쓰고 나오려는데 시계를 보니 14시 10분이었다. 17분이 되려면 아직 7분이나 남았고 7분은 해가 지기에도 물이 멀리 빠지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면서 어쨌든 도서관으로서는 어떻게 적든 상관없을 기록이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미 종료되었으나 종료되지 않은 시간. 오지 않았으나 올 것이 분명한. 내가 적고 도서관을 떠난 뒤면 이미 종료되고 사라질 시간. 프랑스어에는 전미래라는 시제가 있어 거기에는 도착한 미래에서 이미 뒤바꿀 수 없는 과거* 가 있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아직 오지 않았지만 분명히 다가오고야 말 미래에 대한 시제도 있지 않을까. 노트를 펼쳐 ‘아직은 없는, 그 시간에서 나를 기다려. 찾아갈게’라고 짧게 적었다. 그 시간이 언제인지, 그리고 '없는 시간'이라는 말에서 없는 것은 과연 시간인지 생략된 주어인지, 혹은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없는 것인지를 생각했다. 이미 17분은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멈추거나 흐르거나 뒤죽박죽이거나 되살아나는, 지나갔거나 돌아오는.


 종일 비가 내린 탓에 오렌지빛이 길게 퍼지는 일몰은 없다. 단지 회색빛 공기와 물먹은 콘크리트와 식물만이 제자리에서 가만히 숨 쉴 뿐이다. 정적. 별 것 아니지만 그것뿐인 순간. 엔초비 필렛과 선드라이 토마토, 케이퍼가 담긴 메뉴를 주문해서 먹었다. 접시에는 흔적도 없이 ‘이미 사라진 음식’과 식용 꽃이 덩그러니 남았다.


 없는 시간에서 내가 이제 여기엔 물이 없네, 라고 말을 하면 나를 기다린 누군가는 그래도 여기는 바다야, 하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오지 않은 시간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정말 있다면 그게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거라고], 목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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