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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l 05. 2024

돈 주고 사지는 않아요



  칠월 내 비가 내린다더니 1일에서 2일 넘어가는 새벽부터 비가 왔다. 이러다 정말 한 달 내내 비가 오는 건 아닐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아끼는 운동화가 축축해진다던가 축축해진 운동화가 제대로 마르지 않는다던가 방금 건조한 빨래가 금세 젖은 빵처럼 눅눅해진다던가.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다. 아까는 차에서 내리고 우산을 쓰기 애매한 거리라 잠시 비를 맞았는데 금방 어깨 부분이 젖어버렸다. 비가 오는 여름날은 어느 실내든 에어컨을 쌩쌩하게 틀어 공기가 차다. 손바닥의 온기로 젖은 어깨를 몇 번 꾹꾹 누르면서 이런 식이면 여름감기도 먼일은 아니겠네,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비 오는 날은 좋다. 봄비, 여름비, 가을비, 겨울비. 계절에 섞인 비는 각각 다른 물성과 냄새를 지녀서.


  뺨에 닿는 비와 젖어버린 몸, 뛸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 어릴 때는 일부러 비를 맞기도 했지만 지금은 무리다. 무턱대고 비를 맞다간 일주일을 골골대며 앓아누울 것이다. 대신이랄지 비 보기를 즐긴다. 큰 창 건너편에 비가 떨어지는 모습, 바다가 비를 삼키는 모습을 보며 이유 없는 후련함을 느낀다. 후련함. 생각해 보니 그것이야말로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 같아 칠월 내 비가 와도 좋겠네, 밑도 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창밖에 고양이가 비를 맞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건 기분 탓일까).      


  비가 와서 좋은 점은 낮잠이 달다는 것과 나가려는 의욕도 없이 집안에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점이다(모든 면엔 장단이 있는 법. 같은 이유로 비 오는 날 아침은 더없이 힘겹고 의욕이 없어 절인 배추처럼 축축 처진다. 꼭 퇴고하고 있는 지금처럼).

  비가 오면 바깥이라는 선택지가 사라진다. 집 혹은 어떤 실내. 후련함과 동등할 만큼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내 안을 살피는 일이라는 생각을 얼마 전부터 해왔다. 회복하기. 내가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란 글쓰기, 알아채기, 책 읽기, 나를 살피기, 피아노 연습하기(완전 생초보다), 정리하기 정도. 어쨌든 나를 재정비하는 시간.

      

  뜨거운 물을 들고 한 손으로 책을 펼치다 몇 개의 책갈피가 떨어졌다. 며칠 전 간 레이첸 콘서트 티켓, 일주일 전 전시회에서 산 미니 키티 파일, 몇 년 전 그린델발트 레스토랑에서 챙겨 온 냅킨.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자국들. 책갈피를 돈 주고 사는 일은 잘 없다. 거의 없다. 사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상에는 작고 예쁜 종이들이 넘쳐나고(집에 있는 아이가 생산해 내는 것도 어마무시하다) 그것을 버릴 방법을 모른다. 여행지에서 들고 온 명함, 아이가 그린 그림, 전시회 티켓, 누군가의 손 편지, 사진, 영수증, 엽서, 커피 쿠폰, 도서관 대출 이력서. 뭐든 책갈피가 되어 읽다 만 책 사이에, 읽고 난 책 사이에, 읽을 책 사이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린다. 나를 봐. 여길 봐. 얼른 나를 찾아 이 면을 갈라줘. 알아채야 할 것은 마음뿐만이 아닐지도.

      

  벌써, 칠월.


  칠월은 무섭네, 하고 일기장에 적고는 이 무서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했다. 아마도 조급함. 빨리 잘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나를 두고 가는 시간에 대한 서운함이겠지 생각하다가 그래도 대견하네, 했다. 무서움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안을 바라보다니. 어쩌면 이건 시간이 체력을 빼앗은 대신(에라, 이거라도 줄게 하고) 건네준 배려이자 나이 듦의 혜택 같은 게 아닐까. 스미듯 천천히 침잠하는 시간은.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챙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무탈하기를, 별일 없지만 그걸로 괜찮은 하루가 이어지기를. 땅을 뚫을 만큼 쏟아지는 억수를 보며 손을 모았다.  


  보통은 글을 쓰고 제목을 단다. 종종 제목을 먼저 짓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이미 써 둔 제목이 글과 맞지 않을 땐 수정한다. 오늘의 글은 아무리 봐도 [돈 주고 사지는 않아요]와는 맞지 않다. 하지만 이번만은 그대로 둘까 싶다. 한 달 내 온다는 비도 마음에 쏙 드는 책갈피도 안을 살피는 시간도 나는 돈 주고 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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