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갗, 흰 숨, 손톱 거스러미, 민트 사탕, 파랗게 염색한 머리카락, 손자국, 층층이 쌓인 기억과 시간, 그림자 일부, 애정 낱개.
새벽 세시.
살아가는 일이 마치 나를 조금씩 떼어내는 일 같다는 생각을 했어. 자다가 덜 깬 눈과 부스스한 머리로 꽤 진지하게 말이야. 산다는 건 마음이 가는 사람이나 공간, 시간에 나를 베어내고 쌓고 깎아두고 쓸고 묻고 떼내어 두고 오는 일이 아닐까.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게. 혹은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남겨진 그것들은 나를 대신해, 아니 새로운 나로 거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마도 오래전, 나의 어린 조각들까지.
때문에 나의 조각 하나는 지금도, 키가 큰 식물이 가득한 로열 보타닉 가든에서 햇볕을 가득 받고 뛰어다니고 있을 테고 다른 조각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동쪽의 모래사장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백석의 시와 함께 뒹굴고 있겠지. 어느 작은 조각은 어린 엄마를 기다리며 동생과 까만 밤이 올 때까지 문 앞에서 내기를 할 테고, 또 다른 조각은 귀가 붉은 여우에게 그가 장난치는 것을 키득키득 바라볼 테고. 또 어느 조각은 가엽게도 할머니가 살던 집 근처에서 아직 울음을 참고 있겠지. 빛의 결정만큼 쪼개어진 그들은 엄마의 등에서 도서관에서 우에노의 킷사텐에서 불꽃놀이 안에서 아이의 귓불에서. 그렇게 누군가의 곁이나 어느 자리에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야. 나의 마음을 대신해서 나는, 작은 나들은.
그들과 만날 일이 있을까. 이미 한참이나 떨어져 나와는 달라졌을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나는 미처 어제의 내 마음도 알아채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러다 아, 하고 새벽의 나는 작게 감탄했어. 혹시 그럴 때가 아닐까. 왜 그럴 때 있잖아. 어느 순간, 울컥임이 일고 잠깐 멈추어 돌아보게 되는. 살갗이 돋는. 익숙한 기시감이 드는. 시야가 흐려지는. 갑자기 몸 안쪽 어딘가 꽉 차서 숨을 멈추게 되는. 눈을 감게 되는. 주먹을 꼭 쥐게 되는. 얕은 전율이 느껴지는. 누군가에게 덜컥 전화를 걸게 되는. 다이빙대에서 떨어지는 몸처럼 어느 한순간이 청범, 하고 밀려오는.
그럴 때가 아닐까. 나들과 내가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은.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조각과 나는 어떤 파동을 일으키고 연결된다는 생각. 한때 한 몸을 했던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기도 전에 겹쳐지고 만다는 생각. 너구나. 너였구나. 지나고 먼 공간과 시간을 넘어 나와 작은 나들은 그렇게.
새벽의 생각은 늘 그래. 엉뚱하고 난데없지. 하지만 꽤 그럴싸하지 않아? 입자처럼 떠돌아다니던 나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라니. 어딘가 마음이 기울었던 곳에 베어 두고 온 나들과의 조우라니. 그래 맞아, 이건 다 새벽 세시의 생각이야. 작은 빵조각처럼 떼어진 작은 나들이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 그러다 우리는 우연히 겹쳐지기도 하고 알아채기도 한다는 생각. 하지만 상상해 봐. 곳곳에 셀 수 없이 많은 나의 마음들, 너의 마음들, 그의 마음들이 있다고 말이야. 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단단해져. 잘 살아야지, 나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조금 명랑한 나들이 늘어나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하지만 역시 이건 다 새벽 세시의 이야기지. 꿈과 현실의 경계가 얕은 새벽 세시, 꿈이기도 현실이기도 한 새벽 세시의.
그래, 이건 전부 새벽 세시의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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