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목소리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월간 ****인데요, 로 시작한 대화는 2-3분 정도 이어졌다. 내용은 간단했고 그 사람이 원하는 바도 명확했다. 내가 보낸 원고가 그들의 문예지에 당선이 되었다는 것과 등단 후 문인협회에 가입할 수 있다는 것. 아침부터 괜히 기분이 좋았던 게 이 때문이었나 설레발쳤다. 그래, 그건 설레발이었다. 단 몇 초짜리로 끝난 설렘의 보이지 않는 경솔한 발.
대신 그는 조건이 있다고 했다. 내 원고가 실릴 문예지를 50권 구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권에 15,000원이니 75만 원. 구매해서 지인도 좀 나눠주고 여름 한 철 베개로도 삼고 어긋난 테이블이 있으면 밑에 받쳐두기라도 해야 한다는 것. 잠시 고민했다. 지금 생각하면 고민할 거리도 아닌데도 그랬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간단한 일인데도 코앞에서는 아득하다. 나이가 들 수록 가까운 것들이 흐릿해지는 건, 신의 선의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 오십 권의 구매면(이제는 아예 당선이라는 생각은 배제되었다) 이제부터 나는 독립출판 작가가 아닌, 출처는 잘 알 수 없지만 어딘가에는 존재할 문인 협회에 등록된 작가가 될 수 있다. 50권이면 박스 한 권 정도 될 테니 집구석 어딘가 받침대로 쓸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한 권씩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줄 수도 있는 일이다. 생각은 비틀리다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알지도 못할 누군가의 인정을 돈을 주고라도 사고 싶은가?
일초 정도의 틈을 두고 그에게 아니라고, 당신들의 오십 권을 나는 구매하지 않겠다고 했다. 아마 그런 조건이 있는 줄 알았으면 거기에 응모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알겠다고, 그렇다면 나의 당선은 무효로 돌아간다고 답했다. 입안이 썼다. 등단, 이라는 달콤한 단어가 날아간 뒤의 입안은, 그 달콤함을 돈으로 엮어 파는 이를 마주한 마음은 굉장히 썼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등단 장사'라는 말이 있다. 등단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받기도 하고 나의 경우처럼 몇십 권의 구매를 종용하기도 했다. 상패 제작비를 내고 등단했다는 글도 있었다. 만약. 오십 권이 아닌 열 권 정도라면 어땠을까. 어느새 돈의 감각으로 등단을 재고 있는 나를 보다가 '한국 문인 9할은 가짜'라는 기사를 보고 뜨끔한다.
글을 쓰는 일로 인정받기란 어렵다. 시나 에세이의 경우 더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잠시 '인정'이라는 말에서 멈춰 생각해 본다. 인정받지 않으면 더 이상 쓰지 않을지. 인정받아야 나의 글은 글로써 확인되는지. 인정이 없다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인지. 돈을 주고 사는 인정이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인지. 여러 '지'들의 의문에 희미한 마음이 명료해진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나는 인정받지 않더라도 계속 쓰겠지, 하는.
늦은 오후, 취한 목소리였다. 진짜로 취했는지 취하지 않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취한 목소리. 돈으로 사지 않은 나의 등단은 그냥 그렇게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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