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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에 대해 쓰려고 했다. 하나 깎으면 하나 더 깎게 되는 복숭아에 대해서. 흐흐, 웃으며 박스에 복숭아를 담고서는 난데없이 꿀밤 맞아라 하며 아이의 이마를 톡 건드리던 과일가게 노인의 자신만만하던 복숭아. 그러니까 복숭아. 이름도 형태도 껍질의 부드러움도 모두 향기롭던 복숭아에 대해서.
아마 올여름은 몇 가지로 기억될 것이다.
난생처음 맛보는 과일이라 말할 수 있을 만큼 달큼한 복숭아와 정지한 사거리, 사고, 또 사고, 부서진 핸드폰, 렉카를 기다리던 뜨거운 시간, 핸드폰의 남은 할부 개월, 보험금, 차 수리비, 마포 경찰관들의 붉은 뺨, 블랙박스, 쾅, 쾅, 또다시 쾅, 천장의 sos 버튼, 0으로 남겨진 핸드폰 사진과 데이터. 복숭아를 쓰려고 했는데, 나는 그저 복숭아와 이 뜨겁고 긴 여름을 쓰려고 했는데. 손에 꽉 차는 달콤함을 지울 만큼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형태 없는 잔상들이 너무 많다. 잘근잘근 내 생각을 씹어먹는 요물 같은 것들이 너무너무 많다.
물놀이에 가져갔다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진 핸드폰을 들고 수리센터에 가니 직원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새로 구매하셔야겠네요. 사소한 문제일 줄 알았는데 깨진 화면으로 물이 들어간 모양이다. 물이 한번 들어간 이상 고칠 방법은 없어요. 이건 전원은커녕 데이터고 뭐고 복구할 수도 없겠는데요. 그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 왜 저런 말을 웃으면서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네, 네, 따라 웃었다. 웃으니 정말 웃고 넘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한 번의 안 좋은 일은 우연으로 여길 수 있지만 두세 번의 안 좋은 일은 시련으로 여겨진다. 혹은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구절인,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의 시험으로도 여겨진다. 또 그것도 아니면 나의 태생을 되돌아보게 하거나 재수 없는 년 같은 악질의 욕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런 크고 자잘한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법한 사고일 뿐이라는 이성, 멘탈을 잡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든 그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대하는 나의 인식과 선택과 행동이라는 건강하고 멀쩡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절대로 인생이 죽어! 죽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웃기시네, 다시 일어서려고? 비웃는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넌 절대 회복할 수 없어, 따위의 생각은 더더욱 해서는 안된다.
어디서든 배울 점을 찾는다. 큰 사고에서 자잘한 일들에 이르기까지. 나는 무엇을 배웠을까. 배웠을까? 글쎄. 사고가 난 지는 채 이주일도 되지 않았고, 여태 핸드폰도 없는 상태다. 그러니 아직은 현재진행형이다. 배우고 있다고 믿기로 선택했을 뿐이다.
그래도 어떤 일이든 그 순간만으로 좋고 나쁨을 단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일들은 지나고 봐야 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야를 줬는지, 선택을 줬는지, 좌절을 이겨낼 힘을 줬는지 지나고 봐야 아는 것이다. 나쁜 일이 있었으니 이제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흔한 말은 순전히 본인에게 달렸다. 제 철에 제 물. 때에 따른 사람과 말, 행동, 일이 있지만 그것들은 언제나 그랬듯 자유로이 흘러갈 것이니 내가 무엇을 새로이 붙들고 보낼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일단 한 알 남은 여름의 복숭아를 먹고. 놀란 마음을 달래느라 신경 쓰지 못한 몸도 돌보면서. 100%의 과실. 노인이 깎아준 복숭아처럼, 실수를 열매로 만들 궁리도 해보면서. 언젠가 이 여름을 잘 익은 무언가로 떠올릴 수 있도록. 알베르 까뮈도 말하지 않았나. '원칙은 큰 일에나 적용할 것. 작인 일에는 연민으로 충분하다.'
아아,
하지만 우선 어깨가 뻐근하니 스트레칭 먼저. 제때의 회복을 우선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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