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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기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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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신 Jul 20. 2020

육아일기가 아닌 '어쩌다' 내 일기

 20191114





어쩌다 육아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첫 문장을 쓰고 가만히 소리 내어 읽어본다. '어쩌다'만큼 육아와 어울리지 않는 부사가 또 있을까. 10개월의 고행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출산이라는 고통의 의식을 치러야만 시작할 수 있는(그렇다. 그 모든 시간은 육아의 시작을 위한 준비운동에 불과하다) 그 육아를 말이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봐도 어색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우울 수 없는 데도 이유가 있다. 한 번도 엄마가 될 거란 상상을 한 적이 없는 탓이다. 



4년 전 처음 알게 된 자궁 내 제자리암이 몇 년 사이 세네 번이나 재발했다. 반복되는 수술에 아가를 품는 건 무리이자 욕심이 아닐까 막연히 생각했다. 

의사들은 항상 건조한 리듬으로 최악의 상황을 말한다.


"자연 치유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도 하지만, 심각하면 자궁을 덜어내야 합니다."


서른셋의 나이에 '암'이라는 막연한 공포에 휩싸인 내 앞의 의사는 건조한 얼굴이다.

그 얼굴을 응시하며 뱃속에서 꺼내져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궁을 상상했다. 

'당신은 A형입니다'를 얘기하듯 무심히 말하는 그의 말투를 탓했던 건 내가 무척이나 겁에 질렸기 때문이고 겁에 질린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이었을 거다. 



계속되는 재발에 의사는 말했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이러면 안 되는 일 때문에 난 몇 번이고 색 바랜 수술복을 입었다. 수술실로 가는 걸음은 '임신'에서 멀어지는 걸음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 걸을 필요도 없었다. 매번 난 휠체어를 탔고 젊은 남자 의사가 수술실까지 밀었으니까. 

포기는 때론 자의나 타의가 아닌 '누구에게나 그럴 수도 있는 일'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아기를 갖고 싶었다거나 꼭 엄마가 되어보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다. 10대 때의 '엄마'란 태어날 때부터 '엄마'인 존재였고 20대 때의 '엄마'란 모든 여자가 되는 미래였으며 30대 때의 '엄마'는 돼도 되고 아니어도 되는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육아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아윤이가 태어나고부터,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남겼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른다. 난 연애만 하며 평생 혼자 살겠다던 여자였다. 

누군가가 인생에 대해 확언하듯 던지면 난 되던진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 어떻게 될지,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


물론 거의 100% 확실한 일들도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인생의 불확실성의 입장을 고수한다. 누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확실히 뜨지.'라고 하면 난 '그렇긴 하지만 또 모르지.'라고 대답할 거다. 



생각지도 않던, 내 인생에서 무의식적으로 제외되었던 이름이 내게 입혀진다. 온 하루를 뒤흔든다. 

초보 엄마는 너무나 서툴다. 아기의 첫 목욕엔 온 방안에 물이 다 튀어 올랐고 노란 똥 기저귀를 보고는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그렇게 엄마의 일상에 쩔쩔매면서도 매일 '일기'라는 명목으로 끄적거렸다. 그 나름의 끈기에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던지 한 번은 어느 사이트 메인에 내 일기가 올랐다. 

단순히 내 짧은 글이 올랐단 사실보다도 아윤이의 사진이 많은 이들이 보는 곳에 게시되었다는 게 어딘지 뭉클했다. 내 얼굴이 걸렸다면 분명 이런 감정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다의 길을 걸어 난 육아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몇 시간마다 분유를 먹고 하루에 한 번 똥을 싸고 드문히 낮잠을 자는 아기의 일상을 지켜보고 기록한다. 사실 아기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단 내 감정의 기록이다. 그러니 이건 육아일기가 아닌 그냥 내 일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기의 하루라기보다는 구구절절 온통 내 얘기 아닌가. 


난 아마 내일도 육아일기의 탈을 쓴 '내 일기'를 쓸 거다. '어쩌다'의 길을 돌고 돌아 '어쩌면' 육아일기가 아닌 '어쩌다' 내 일기. 

하지만 그 속엔 늘 우리 아가가 있을 것이다. 


보드랗고 하얀 가슴에 귀를 대면 콩콩콩콩, 빠른 심장박동마저 날 미소 짓게 하는 우리 아가가 주인공으로 내 일기와 함께 조금씩 성장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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