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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été

by 윤신



아홉 시부터 네 시까지,


베란다에서 읽고 마셨어. 쌀쌀해진 탓에 양모 담요를 무릎에 두고 앉아 빗줄기가 유리에 와 부딪히면 비가 오는구나, 창문은 열어둔 채로.


책상 앞으로 고양이가 지나간다. 소리도 없이 가벼워. 제법 통통한 녀석인데 어쩌면 저렇게 조용할까. 언젠가 누군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언니의 걸음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어. 그녀는 나의 걸음이 도둑고양이를 닮았다고 했어. 도둑이나 도둑고양이가 얼마나 몰래 걷는지 알 순 없지만 그냥 고양이도 움직임의 조용함에서는 지지 않겠지.


무겁던 나의 시간도 고요히 지나가. 뜯기지 않은 이미 지난 달력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심술궂었던 주제에 꽤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났다. 나 혼자 뜨거운 여름인 줄 알았는데 각자마다 뜨거움에 덴 이야기가 있더라. 요가를 함께 하던 언니는 만나기 전날 나에게 '들어줄게, 내가 다 들어줄게'라고 했는데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었어. 나도 누군가에게 '들어줄게, 내가 다 들어줄게' 하고 말해야지. 들어준다는 말은 꼭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 들자는 말 같아. 나도 싱싱한 물줄기처럼 속이 다 시원하게 그 마음을 주위에 흩뿌려야지 그렇게 생각했어.


하루는 말간 얼굴의 모녀와 쏟아지는 비를 맞고 깔깔거리고

또 하루는 기분이 시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말에 다행이라 여기면서


le été- 여름. 이미 여름은 지나갔지만.


몇 가지의 루틴을 두고 하루를 보내고 있어. 그 가운데에는 일어나서 이불 정리하기 같은 일상적인 습관에서부터 프랑스어 공부하기, 자기 전 십분 명상하기 같은 즉각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프랑스어는 하루 이삽십 분씩 하는데 이게 정말 실생활에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야. 매일 되지도 않는 R 발음을 하는 나를 두고 며칠 전엔 그가 영상을 보냈거든. '아이스크림'도 '얼음'도 '거울'도 '얼다'도 '얼어붙은'(정확히 하면 이 단어는 Glacé )도 다 Glace라는 같은 발음의 단어의 뜻이라는, 프랑스어의 난해함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내 수준은 거기까지 조금도 미치지 못하니까 '아, Glace에는 그런 뜻들이 있구나, 또 이렇게 배우네' 하고 생각했지. 그건 요새 내 하루를 보내는 마음가짐이기도 해.

그리고 변하지 않을 것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다면, 내가 변하기.


오후 다섯 시. 아직도 비는 그치지 않고 창도 여전히 열려 있어. 저녁은 그가 사 온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먹기로 했는데 괜히 기분이 좋다.


밤은 오겠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것이나 해도 내가 있어도 내가 없어도 밤은 오겠지. 오늘도 좋은 밤이길, 짧은 프랑스어로 인사한다. Bonne n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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