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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해부도

by 윤신



그녀 말이 옳다.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식물세밀화보다는 식물해부도에 가깝다. 활짝 핀 꽃의 얼굴, 꽃과 줄기, 열매의 내부, 식물의 표면, 꽃이 지고 난 자리까지. 그녀가 그려온 그림에는 식물의 구조와 생애가 모두 담겨있다. 인간의 생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평균 몇십 년이라면 식물은 일 년마다 생의 주기가 바뀐다. 한 종의 식물 세밀화를 그리기 위해 그녀가 일 년을 기다리는 이유다. 반복하는 식물의 생의 주기 가운데 하나를 그리는 그녀, — 거기까지 적고 잠깐 생각한다. 그런데 인간도 비슷하지 않나. 대신 계절이 아닌 상황에 따라 피어나고 지고 열매를 맺고, 또 피어나고 지고, 인간도 여러 주기를 겪는 것은 아닌가.


지금 문득 떠오른 그녀의 말. 식물은 이동하지 못할 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부터 미열이 났지만 평소 좋아하던 작가라 그녀가 궁금했다. 글이나 그림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그녀와 만나고 싶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느껴지는 인상 같은 것이 있고 나는 그 첫인상을 믿는 편이다. 보통 첫인상은 3초 안에 결정되지만 나는 더 오랜 시간을 들이려 한다. 얼굴 표정, 어조, 눈빛, 자세, 걷는 걸음, 물건을 대하는 태도, 쓰는 어휘, 웃음. 그들 역시 표면적인 것들이지만 알려주는 바는 상당하다. 그녀는 부드러운 웃음에 눈빛이 선했다. 계단을 내려갈 때도 한발 씩 조심스레 내디디는 사람. 차분하고 다감한 성정일 것 같아, 혼자 생각하며 그녀의 말들을 들었다. 그녀는 2시간을 꽉꽉 채워 조근조근 식물에 대한 애정을 털어놓았다. 식물의 이야기는 늘 흥미로운데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된 사실도 많다.

; 이를 테면, 흰 목련이라고 모두 백목련은 아니라는 것. 소나무와 잣나무의 차이는 이엽과 오엽에 있다는 것. 일본, 독일, 영국 - 정원과 식물세밀화가 발달한 나라는 모두 외세침략을 했다는 것. 개나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식물로 개나리와 똑 닮은 흰 꽃나무의 이름은 미선.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산 식물은 은행나무 -> 침엽수 -> 양치식물 -> 수생식물 순서라는 것. 꽃에는 갖춘꽃과 안 갖춘꽃이 있다는 아마도 어릴 적 배웠을 것까지.


"제가 국립수목원 식물세밀화가로서 면접볼 당시 질문이 뭐였을까요? 다들 식물에 관한 것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가 받은 질문은 '산 잘 타는지?' 였어요. 일을 시작하고 나서 받은 첫 선물도. (여기서 잠시 호흡을 멈추고 웃으며) 등산화였답니다."


매 계절 매 달 산을 오르고 길을 걸어 식물을 관찰하는 삶. 차곡차곡 쌓은 신문 사이에 식물을 넣어 매일 갈아주며 느리게 식물을 말리며 살펴보는 사람. 지형과 온도에 따른 식물과 그들의 변화를 누구보다 빨리 아는 삶. 이 시기면 그곳의 어느 꽃이 만발하겠구나, 떠올리는 사람. 적고 보니 삶과 사람이라는 단어는 그리 다르지 않다. 의미도 생김새도.


얼마 전 나팔꽃이라 여기던 꽃이 메꽃이라는 걸 알았다. 꽃잎의 색이 연분홍이라 이런 나팔꽃도 있네, 했는데 아이의 책을 읽어주다 그 둘이 서로 다른 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메꽃. 메꽃. 처음 들어본 이름을 몇 번 입안에서 굴렸는데, 오늘 그녀가 메꽃을 이야기했다. 메꽃은 우리나라 자생꽃이지만 나팔꽃은 그렇지 않다고.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뺨 같은 메꽃을 떠올렸다. 예전 할머니 집 앞 여름마다 보던 그 꽃도 나팔꽃이 아니었겠구나, 생각하다가 메꽃을 보고 아이에게 이건 나팔꽃이야, 하던 것도 생각났다. 하지만 이젠 그 말을 정정하려면 다음 여름까지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녀는 만약 우리가 꽃이나 식물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지 않고 가려진 것들을 잘 보게 된다면 식물이 계산적이고 치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바다 곁에 사는 황근의 씨앗이 가벼운 것도 그것을 바다로 띄워 보내기 위함이고, 장미의 가시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벌레를 쫓기 위해서 모두 아래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멀리 널리 번식하기 위해 자신의 형태를 바꾸고 설계하는 식물.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렇게도 말했다. 몇 년 전 영국에서 RHS Lindley Pomme 컬렉션에서 1800-1900년대 사과의 세밀화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인간의 입맛에 맞춰 사과는 개량되고 키워지기에 그 수많은 품종의 사과들이 지금은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인간이 모든 식물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말은 모든 식물을 지켜낼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오만일 테지만 지금의 인간이 다수의 동물과 식물을 소멸시켰다는 말만큼은 사실이 아닐까. 자신의 입맛대로 환경을 바꾸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까지 적다가 이제 그만 적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아니까. 아는 말을 다시 쓰는 건 의미가 없으니 이제 그만, 그만.


노트를 들고 가지 않아 가방에 있던 이제니 시인의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이라는 시집 맨 뒷장에 메모를 했었다. 아이는 옆에서 빤히 보더니 제일 위쪽에 작은 꽃을 하나 그리고 '꽃 이야기'라고 적었다. 나는 이 시집을 평생 버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계속 식물해부도를 그렸으면 좋겠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사람들이 먼 이국의 꽃보다 바로 집 앞에 필 들꽃과 나무를 더 자주 들여다보면 좋겠다. 미선아, 명자야, 이름 부르며 계절을 지나면 좋겠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에는 '발화 연습 문장'이라는 몇 편의 시가 있다. 그 가운데 몇 줄을 옮기고 글을 마친다. 왜 이 부분을 골랐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아마도 그냥. 살아남고 살아남으려는 모든 생명을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옮겨놓기 위해서.




살 아 남 은 말 들 을.

살 아 남 으 려 는 말 들 을.

어 딘 가 에 서 어 딘 가 로.

옮. 겨. 놓. 는. 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발화연습문장', 이제니




그녀에 대한↓


https://sidecollective.notion.site/1c09579c268a80388aeeeb7575788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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