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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걷던 문장들

by 윤신



책을 읽다 멈출 때가 있다. 작가가 그려낸 평면의 세계가 나의 살과 골격으로 입체적인 몸을 가지는 순간. 단어에서 단어로, 문장에서 문장으로, 타인의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로 차원이 이동하는 순간. 책에서 희미하게 가을이 시작하는 냄새나 축축하게 젖은 아이의 손, 오렌지빛 꽃의 선명함, 여름밤의 선선한 바람이 만져질 듯 가까워지는 순간. 이를 테면 모. 과. 열. 매. 순전한 네 음절에서 자동차 안에서 진동하던 유년의 달큼한 냄새나 모과차의 뜨거운 온기를 떠올리는 아주 사적인 순간.


쓰는 기쁨과 읽는 기쁨에 비슷한 점이 있다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쓰다가도 읽다가도 불쑥불쑥 기억이 말을 걸어오는 데 있다. 잘 지냈지, 말 걸어오는 기억의 말간 얼굴을 보며 어쩌면 내가 너를 까맣게 잊고 살았을까, 놀라고 만다. 네 눈가에 점이 있구나, 깨어진 앞니는 그대로구나, 기억의 얼굴을 찬찬히 더듬는다. 그 얼굴이 너무 편안해 안도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다. 울컥 눈물이 나는 것도 나중의 일. 나는 불쑥 꺼내어진 기억의 손을 꼭 잡는다. 펼쳐둔 책 앞에서 숨을 고르며 그때의 냄새를, 그때의 기도를, 그때의 나지막한 빛을 떠올린다. 방황하고 유예하던 날들이라 여기던 날들이 이렇게나 소중히 남을지 왜 그때는 몰랐을까. 불안을 끌어안고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종이에 인쇄된 '해질 무렵의 산책'이라는 일곱 음절에서 번지는 분홍색 하늘과 희게 빛나던 산등성이의 윤곽, 더위에 지쳐 천변에 앉거나 누운 사람들, 그녀의 옆모습, 간간이 흘리던 웃음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새까맣게 잊고 있던 시간. 그 시절 우리는 여름 한 철 집 앞 신천을 따라 길게 산책했다. 길이 끝나는 곳까지 돌아 걸었고 가끔은 앞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아리만하던 물가의 아기 오리들은 점점 자라났다. 그녀는 늘 나보다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질러 갔다. 내 스물의 여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에 편안한 그늘이 지는 기억들이다. 봄마다 내가 좋아하는 쑥떡을 사다 주고 '넌 쓰는 게 좋니' 하며 파란 표지의 두꺼운 노트를 무심히 건네던 그녀와 매일같이 걷던 물가의 산책로.


어떤 일은 너무나도 사소한 나머지 행복이라 여기지도 못하는가 보다. 지나고 나서야 붙들고만 싶어지는가 보다. 그때 그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몇 살 어렸다. 한참 어려운 어른이기만 하던, 호탕하게 웃던 그 젊은 얼굴을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


첫 줄을 고친다. 나는 책을 읽다 멈추고, 나의 기억을 읽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가만히 웅크려 겨울의 따뜻한 굴 속의 작은 동물처럼 그 기억에서 잠시 머무를 때가 있다. 거기에서 어린 엄마를 다시 만나 또다시 긴 산책을 하고 돌아와 곤히 긴 단잠을 잘 때가 있다. 사이로 비치는 빛에 살짝 얼굴을 찡그리다가 다시 그녀를 보고 환히 웃는, 그런 단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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