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갈이 시기가 지난 화분을 안고 선인장 가게를 찾았다. 보통은 보기 힘든 거대한 선인장과 다육이를 키우고 판매하는 곳이다. 허리 높이에 모종삽, 자갈과 흙이 쌓여 있는 크고 긴 테이블이 있어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편리하게 화분을 옮겨 심을 수 있다. 그런데 분갈이할 식물을 가져와도 되냐는 물음에 흔쾌히 허락했던 그녀가 당혹스러워 보인다. 아, 여기서 사지 않은 식물이라서 그런가… 맥락 없이 뻗은 줄기를 손에 쥔 채 잠깐의 부끄러움이 들 때 그녀가 식물의 잎을 가리키며 단단하게 말한다. 이건 관엽식물이에요. 멍한 얼굴의 나를 보던 그녀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얘가 좋아하는 흙은 다육이와 전혀 다르다는 말이에요.
식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올해 들어 여덟 개의 화분을 집에 들였다. 히메몬스테라, 올리브나무, 원숭이꼬리, 그리고 실패한 두 번의 로즈마리 등등. 지친 여름을 지나며 충동적으로 하나 둘 집으로 데려온 아이들이다.
작은 올리브 나무는 강원도 테라로사 카페에서 한눈에 반해 데려왔다. 몬스테라의 잎 한 장은 동네 언니가 반투명 비닐에 물을 담아 묶어 주었고 남의 집 식물의 가지를 잘라 물통에 넣어 온 것도 있다. 처음엔 그저 식물을 보기만 해도 좋다가 곁에 두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각각의 식물이 좋아하는 환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몬스테라는 빛이 충분하지 않으면 찢잎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 선인장은 겨울에 물을 절약해 줘야 한다는 것, 어떤 식물은 빛과 물만큼이나 바람을 맞는 것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관엽식물은 물을 잘 머금는 상토를, 다육이나 선인장은 배수가 잘되는 흙을 좋아한다는 것까지도 안다.
어쩌다 8년을 키운 식물들이 있다. 죽은 줄 알고 방치해 뒀는데 갑자기 잎을 틔우더니 몇 년을 생생히 살아있는 고무나무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그 옆에 두고 있는 식물, 부랴부랴 이름을 찾아보니 보석 금전수다. 고무나무는 어쩌다 수경으로 키운 지 5년째. 보석 금전수는 자신이 없어 분갈이를 미룬 게 몇 년째다. 생명력이 어찌나 강한지 생각날 때만 간신히 물을 주는 데다 둘째 고양이 후추가 틈틈이 물어뜯었는데도 건재한 녀석이다.
"이 정도면 분갈이할 때 선택해야 해요. 식물을 살릴지, 화분을 살릴지를요."
식물이 작은 화분에서 이만큼이나 자랐다면 뿌리가 빽빽이 들어찼을 텐데 무리하게 식물을 잡아당기다 보면 식물의 어딘가가 다쳐 화분을 갈아도 머지않아 죽어버릴 거라는 말이었다. 나는 선택에 느린 편이지만 이건 갈등할 필요도 없다. 식물이 다치지 않게 화분 깨는 방법을 묻자 그녀는 식탁용 나이프를 화분 틈새로 한 번씩 밀어 넣더니 조약돌로 톡톡, 화분을 친다. 아주 살짝 친 것 같은데도 순식간 흰 화분에 금이 가더니 얽힌 뿌리들이 드러난다. 살아가려는 의지처럼 보이는 뻗음들. 시간은 식물과 인간에게 다른 속도를 지니겠지만 생에 대한 의지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적응을 하고 견디며 살아가는 마음은.
흙보다 뿌리가 많은 안쪽의 사정을 보니 그저 미안하다. 생명을 책임지는 일은 시작보다 과정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지. 빈 토분에 뿌리를 넣고 집에 돌아와 상토를 넣어주었다. 조르륵 화분들을 모아 물을 주고 잎을 살핀다. 초록의 미술관이다.
그곳에 용신목철화라는 선인장이 있었다. 구불구불 하나의 작품처럼 자라는 크고 멋진 식물이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생각나 몇 번인가 선인장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꿈처럼 문득 떠오르기도 했다.
1월이 되면 손가락만 한 크기의 용신목철화를 하나 데려오고 싶다. 물과 햇빛, 바람, 오랜 시간을 들여 예술적인 주름이 자라나는 것을 지켜보고 싶다. 화분에서 화분, 초록의 마음을 이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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