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챠는 요가수트라의 니야마(개인의 수행 규율) 가운데 하나로 순수함과 청결함, 그리고 맑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내게 사우챠는 단순히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아니다. 흐트러짐을 알아차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상태에 가깝다. 수련하는 자리를 깨끗이 하고 매트에 앉아 숨을 정돈하는 것. 시계, 그림, 책. 마음을 방해할 그 어떤 사물도 두지 않는다던 사람이 떠오른다. 매번 수련 전에 샤워를 하고 요가원에 온다던 옆자리 언니도. 그러나 물론 사우챠는 그 너머, 삶의 방식에까지 이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요가의 수련이 매트 위를 벗어나도 끝나지 않는 것처럼.
지난주 평일은 수요일을 제외하고 요가원에 갔다. 묵직한 기립근의 통증을 지켜보며 매트 위에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던 시간이었다. 매번 마주하는 한계 앞에서 버티고 물러서고, 다시 조금 더 버티는 시간. 요가를 하다 보면 몸이 다치는 게 아니라 이러다 '망가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도저히 나의 몸으로서는 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리라는 감각. 그런데 그 감각을 쥔 채 반복하다 보면 아주 조금씩 내 몸이 그 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을 한다. 폴짝, 뛰는 정도는 아니고 몇 mm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변화다. 하지만 나는 그 미량의 경험으로 알게 된다. 몸의 한계라고 믿었던 것에도 절대는 없다는 것.
그러다 풀린 날씨에 마음이 연해졌는지 수련에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고 풀밭으로 바닷가로 이곳저곳 쏘다니는 주말이 이어졌다. 매일 수련하겠다더니 하루는 김밥을 싸서 근처 공원에서 아이들과 뛰어놀고 또 하루는 가까운 사람과 늦게까지 술 몇 잔을 했다. 며칠 이런 식으로 쉬는 게 몸에도 마음에도 더 좋을 거라 여겼다. 이 좋은 봄날, 감기에 걸려 이렇게 꼼짝도 못 하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내가 아프면 집도 같이 아프다. 책상도 바닥도 싱크대도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처럼 어질러진 집. 그리고 해야 할 것들이 이뤄지지 않는 일상. 몸부터 마음, 그리고 실재적인 집에 이르기까지 정리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얼른 일어나서 창문부터 열고 환기시키고 싶은데 몸에 열이 오르면서 으슬으슬 춥다. 이럴 때는 이불 속에 들어가 땀을 한 번 쭉 빼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침대에 앉아 이불을 꼭 끌어안은 채 사우챠와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해 가볍게 생각해 보고 있는 것이다.
어디선가 정리를 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리할 것들을 갖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본 기억이 있다.
일어나서 이불 정리, 일 년 이상 쓰지 않는 것 버리기, 수면 시간 정하기. 이런 간단해 보이는 정리부터, 흐려진 마음 바라보고 내려놓는 일 같은 모호하게 어려운 일들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개어 정리해 나가려고 한다. 깨끗한 몸과 마음, 그리고 공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먼저 몸을 정결히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감기가 나아야 할 것이다.
두 번 정도 '감기가 올 것 같은' 느낌이 왔음에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사이 제대로 몸을 아꼈다면 이 정도로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가든 생활이든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알아차렸다면 해결을 위한 걸음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이나 선택 다음의 행동이다.
주짓수도 명상이다,라고 말하던 친구가 방어에는 3가지 측면이 있다고 했다. 먼저, 상대가 아예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다음으로 제압되고 있을 때 다시 원점으로 가는 것. 그리고 완전히 제압되었을 때는 빠져나가 다시 원점으로 가는 것. 나는 반쯤 제압되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나에게 사우챠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에 가깝다. 일어나 창문을 열고, 어질러진 방과 나를 정리하는 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는 일.
그것은 결국, 나를 다시 모으는 힘이다.
이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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