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현재 행복하다면 지나온 아픈 과거는 훈장이되고 현재 불행하다면 상처가 된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그때 겪었던 일들 때문에 그 당사자들을 저주하고 분노한다. 이런 내가 나도 참 싫다. 하지만 그 기억이 떠오르면 그들의 미래가 불행하기를 빈다. 솔직히 나한테는 훈장이든 상처든 어느쪽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는 코로나 등으로 어렵사리 간호조무사 자격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는 영천이모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사회복지사 자격에 도전하기 위해 다시금 사이버대학에 입학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1학년 첫 시험을 치르고 바로 관뒀다. 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꿈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노인재가센터를 차려서 엄마와 일을 하는 것이었다.
동생은 배우는데 돈을 아껴선 안된다고 했지만 나는 돈도 돈이지만 4년 정도 공부하는것도 너무 길게 느껴졌다. 결정적으로 첫 시험에서 성적이 나오지 않아 또 수업을 들어야(그러면 돈이 또 든다)했다. 담당교수님이 조금 쉬었다 다시 도전하는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는 나한테서 공부에 대한 생각이 전혀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만뒀다. 백만원가량 들었는데 그 돈도 사실 엄마의 돈이었다. 난 그 돈이 너무 아깝다. 엄마한테 얼굴들 낯이 없다.
나는 가족들 한 명, 한 명과 좋지 않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현재도 부대끼며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난 가족들과의 관계가 해결된 것은 아닌데 그나마 내 방에서 나와 엄마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전처럼 혼자 내 방에 갇혀 지내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따뜻한 거실에서 티비를 보며 잘 지냈다.
어느 날 페이스북으로 누가 말을 걸어왔다. 나는 회사 그만두고 초반에만 페이스북에 열중했지만 그 뒤에는 시들해졌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탈퇴않고 놔뒀었다. 그랬더니 내 이름을 아는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신기했다. 누굴까? 그 8년 전 대학병원 폐쇄병동에서 만났던 사람이냐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랬다 그는 내가 폐쇄병동에 있을 때 처음 전화번호를 물어봤던 남자애였다. 연락이 왔을 때는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나는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참 주책이다... 페이스북 덕에 아는 동생이 생겼다.
동생은 그때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 자신의 상황이 많이 나아졌었다고 했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정신과 약을 복용하지 않는다고 하자 조금 걱정이 된다고 했었다. 나는 현재 약 없이도 잘 자고 잘 지내고 있다. 당연히 병원도 다니지 않는다. 그 동생은 내가 호텔에서 룸메이드 일을 1달 정도 할 때 쉬는 날 만나서 같이 대만식 우육면을 먹었다. 그때 얘기를 많이 했다. 우리는 사회에서 아웃사이더이지만 주변의 멸시에도 잘 살아내고 있다. 그 동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정신으로 아프지만 공무원에 도전하여 현재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이 되어 서기보 시보로 일을 하고 있다. 가끔씩 연락을 하며 잘 지내고 있다. 나 또한 아직 결혼도 변변한 직장도 갖지 못하고 여전히 환청과 귀접이 있지만 성당을 다니며, 하고 싶은 드로잉 수업을 들으며, 가족들과 잘 지내고 있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만 부모님께 빌붙어 살고 있다. 친동생과는 전보다 우애가 생긴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