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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Aug 28. 2021

[일상의 단상]-<증조할머니와 제기>

*’증조할머니’와 ‘제기’는 짝궁으로 묶인 기억이었다.*

[일상의 단상]-<증조할머니와 제기>


*’증조할머니’와 ‘제기’는 짝궁으로 묶인 기억이었다.*

 

나는 복잡한 상념들이 뒤엉켜 마음이 서늘해지는 날이면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집 밖으로 나가 목적 없이 걷곤 한다. 그럴 때마다 발길이 향하는 단골 행선지가 우리 동네 ‘비둘기공원’의 둘레길인데, 어느 날의 산책길에서 우연히 공원 입구 한 구석에 트럭을 세워놓고 도마와 접시 스푼 등 그 종류도 다양한 원목 그릇들을 팔고 있는 상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트럭에 주렁주렁 걸어놓은 다양한 원목 그릇들을 재미 삼아 구경하다가 보도블록 한켠에 돗자리를 깔고 진열해 놓은 수많은 원목 그릇들 중에 불현듯 내 눈에 확 들어온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목기 제기 세트’였다     

공원 입구의 보도블록 구석에 깔린 좌판에 쭈그리고 앉아 진열된 그릇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특히 ‘원목 제기 세트’에 꽂힌 내 시선을 스스로 인식하기까지 한참을 넋을 잃듯 그 그릇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니, 요근래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그 옛날 내 어린날 기억 속의 내 증조할머니가 불현듯 떠올랐다. 반가운 마음과 애틋한 심경이 중첩되어 뭔지 모를 울컥함이 올라와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나는 어린날 내 아버지의 할머니셨던, 그러니까 나에게는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조각난 파편처럼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를 때가 있다.     

내 아버지는 경주 김씨 상촌공파의 직계 종가의 자손으로 집안의 장손이셨고, 나는 어린날에 명절을 제외하고서도 매달 제사를 수시로 지내던 그런 종갓집에서 자랐다.     

내 어린날 기억 속에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는 내 고향집인 본가는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신길1리’인데, 지금도 자세한 번지수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강렬하게 뇌리에 박혔을 뿐만 아니라 내 정서적 토대가 된 곳이다. 지금은 ‘경기도 안산시 신길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고 고층의 아파트촌이 들어서 버려서 그 옛날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해 있어 생경한 모습의 동네가 되었다.               

제삿날이면 종중의 어르신들이 본가에 모여들었다. 개중에는 도포를 입고 갓을 쓴 할아버지도 계셨고 양복을 입고 단추를 단정하게 채운 집안의 남자 어른들의 모습도 기억난다.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병풍을 둘러치고 왕골 돗자리가 펼쳐진 자리에 정성스럽게 차려진 제사상 앞으로 격식을 갖춰 차려입은 남자들만이 쭉 모여 서서 제사를 지냈다. 촛불을 켜고 지방문을 읽고 술을 따르고 쇠숟가락 쇠젓가락을 한 손에 모아 놋그릇 바닥에 탁탁 쳐 소리를 내고 밥과 국을 상에 올리는 등 매우 엄격하게 정해진 제사의식을 치르던 장면이 내 머릿속 어느 한 켠에 마치 어떤 옛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문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서 제사상 방향으로 얼굴을 쑥 내밀고 제사의식을 구경하듯 흥미롭게 지켜보았는데, 특히 제사의식이 다 끝날 무렵에 지방문을 태우는 장면에서는 종이가 타들어 가는 그 순간에 조상님의 영혼 같은 뭔가가 하늘로 날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재밌고도 오싹한 상상을 했었던 것 같다.               


그 기억의 보따리 속에서는 제사 때마다 제수용품을 챙기고 제사음식을 차려내기 위해 집안의 일꾼들과 며느리들을 진두지휘하며 동분서주하시던 내 증조할머니의 분주한 모습이 동영상을 보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명절이나 제삿날이 임박한 시점이 되면 증조할머니는 어김없이 다락방에 보관해 놓은 제기를 꺼내와 정성스럽게 닦으셨다. 내가 기억하는 제수용 그릇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놋그릇 종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갈색의 목재로 만들어진 원목 제기 세트였다.     

놋그릇 제기는 벼를 탈곡하고 난 이후 남은 지푸라기에 기왓장을 빻아 채로 걸러낸 고운 황토를 묻혀서 그릇의 구석구석을 열심히 문질러 닦아서 반짝반짝거리는 황금색 누런 놋그릇의 원래의 빛깔이 드러날 때까지 정성을 기울이셨다.     

또다른 제기 종류인 갈색의 목재 제기 세트는 하얀색 행주를 물에 담근 후 꽉 짜서 닦은 후 다시 뽀송뽀송하게 마른 천으로 한 번 더 닦아서 남은 물기를 제거한 후 그릇끼리 부딪혀서 흠집이 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그릇 하나하나를 한지에 정성스럽게 쌌다. 그런 후에는 상자에 차곡차곡 넣어서 ‘지방문’을 끼워 붙여 제사상 정중앙 안쪽에 놓는 틀인 위패와 함께 강한 햇빛이 들지 않는 다락방에 고이 모셔 두었다가 제사가 가까워 오는 즈음이 되면 다시 꺼내 또다시 닦아내어 제사를 준비하셨다.               


내 기억 속 증조할머니는 한복을 입고 비녀로 쪽진 머리를 하고 계신 모습이다. 아담한 체구에 조곤조곤 하나 어딘가 모르게 엄격한 어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상함이 느껴지는 밝은 목소리 톤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해 주셨었다.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은 것에 의하면, 우리 경주 김씨 집안은 조상 대대로 남자들의 대부분이 장수하는 편이 못되었고 환갑을 못넘긴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내 증조할아버지 또한 갑자기 건강이 안좋아지셔서 환갑 이전에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증조할머니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셨는데 그 중의 장남인 내 할아버지는 어느날 친구분을 만나러 읍내에 나가셨다가 6·25 동란이 발발해 아수라장이 된 혼란 상황 속에서 귀가하지 못한 채 실종이 되셨고 이후로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내 할머니와 혼인 후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계셨었는데, 그 중의 첫아들이 다름 아닌 경주 김씨 집안의 종갓집 장손인 바로 내 아버지인 것이었다.               

1945년생인 내 아버지는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이른바 ‘해방둥이’였으니, 1950년 6월 25일에 내 할아버지가 실종, 사망했던 그 당시에는 취학 전의 꼬마였을 터였다. 뜻밖의 전쟁통에 집안의 장손인 큰아들을 잃어버린 증조할머니는 장손이 남기고 떠난 손주들을 애지중지하셨고, 특히 또다른 장손이자 손자인 내 아버지에게는 특별한 애정을 쏟으며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터질세라.’ 정성을 다해 키우셨다고 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가 되어 버린 내 할머니 또한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할머니의 시어머니인 증조할머니를 보필하여 집안을 꾸려나가면서 아이들을 잘 키워내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을까를 생각하면 그 희생과 힘듦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고향 땅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읍내로 나아가는 고갯마루인 ‘망글고개’를 넘어서기까지 경주 김씨 집안의 땅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만큼 선산과 논과 밭을 비롯해 꽤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부족함 없이 살다가, 졸지에 각각의 남편들을 잃고 난 후 적지 않은 규모의 농사와 집안일을 돕는 일꾼들을 부리고 집안의 대소사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주체가 되어야 했던 두 여인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삶이 그 얼마나 운명적이었겠으며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인고의 세월을 사셨으리라에 대해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나는 어린 시절을 집안 사정상 시골 본가에서 자라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우리 가족은 도시로 이사 나오게 되었다. 시내의 5층짜리 아파트에 살았는데, 이후로도 초등 3학년 때까지 아버지를 따라 증조할머니를 만나러 시골 본가에 한 번씩 내려갔었다. 옛날식 기와집 본가에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드는 뒤뜰 우물가 옆 장독대 난간 옆으로 놓인 의자에 지팡이를 짚고 앉아서 본가에서 키우던 시골 강아지인 흰둥이를 쓰다듬고 계셨던 모습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증조할머니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다.

증조할머니는 내가 초등 5학년 무렵에 또다른 세상으로 머나먼 여행을 떠나가셨다. 경주 김씨 집안에서 목숨처럼 지키며 이어나가던 제사의 풍경이나 엄격한 가풍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시대의 기류를 타며 자연스럽게 퇴색되어 갔다. 그 징조가 시작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종갓집 장손인 내 아버지와 종손 며느리인 내 어머니가 딸만 내리 셋을 낳고 아들을 얻지 못했던 현실로, 그것이 그 옛날 그 시절 우리 집안의 비극 아닌 비극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요즘이야 딸, 아들 구별이 없고 오히려 허둥9단 무심한 아들보다 똘똘하고 자상한 딸 가진 부모들이 더 행복하다고 하는 세상이니, 아들 못 낳은 것이 왜 집안의 비극이냐 할 테지만, 아무튼지 내 어린 시절 그때만 해도 사회 관념이 통상적으로 그러했었던 것 같다.               


증조할머니가 평소 많이 하신 말씀 중에 아직도 기억나는 몇 가지가 더 있다.  그 기억 중 가장 큰 것은 증조할머니의 ‘아들타령’이었다. 나는 아들 형제는 없이 세 자매 뿐인데, 딸 셋 중 둘째였던 내가 세 자매 중 아빠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당신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종손의 얼굴을 꼭 빼닮았다는 이유로 증조할머니는 나를 특별히 예뻐해 주셨었다.

‘우리 강아지 우리 예쁜 강아지’ 하시며 항상 안아주시고 쓰다듬어 주시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많이 해 주셨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날의 이야깃거리가 무엇이었든 간에 돌고 돌아 항상 그 끝은 언제나 정확히 똑같은 한 지점, 바로 ‘아들타령’으로 회귀하여 마무리되었다.     

우리  고추 하나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누….’     

아마도 종갓집 종부로서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하게 생긴 상황이 못내 안타까움을 넘어서 조상 볼 면목이 없다며 죄스러운 마음이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매들에게 그 흔한 ‘기집애들’ 소리 한 번 한 적이 없으셨고 증손녀들에게 그토록 따스한 시선으로 애정표현을 듬뿍 해 주셨으니, 내 증조할머니는 참으로 사랑이 많은 분이셨던 것을 이제 와 새삼 깨닫게 된다.               


‘제기’와 ‘제사’, 그리고 ‘아들타령’에 대한 기억에 이어 증조할머니에 대한 또 한 가지 강렬한 기억은 ‘절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제 곧 처서로구나. 곧 무더위도 가고 뜨거운 햇빛도 누그러질 거야. 그러니 더 이상 풀이계속 자라지 않는 때이니 논두렁 밭두렁 풀도 깎고 선산에 벌초도 해야 할 때란다’     

‘곧 있으면 입동이구나. 동물들도 땅굴 파고 겨울잠 자러 들어가는 때란다. 슬슬 김장 준비를 해야겠구나.’     

이런 식으로 매사에 ‘동지’니 ‘청명’이니 하는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두 글자’의 단어를 언급하시며 무슨 일을 해야겠다, 무슨 음식을 만들어야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어린날 나는 증조할머니가 자주 언급하시던 그 ‘두 글자’ 단어들로 시작한단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고, 그저 어른들이 하는 말이려니 하며 별 관심도 없이 그냥 흘려들었었다.     

그러나 자라면서 차차 그 ‘두 글자’가 ‘절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조상들이 달력 삼아 사계절을 ‘24절기’로 나누어 계절의 변화에 알맞게 생활 속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해를 ‘24절기’로 나누어서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어느 때에 하면 가장 좋은가에 대해 지표로 삼았던 우리 조상들은 참 과학적이고 현명했던 것 같아 감탄스럽다. 우리 조상들은 과학 이전의 시대에 절기를 이해하고 삶의 현장에서 활용할 줄 알았으니 그 지혜로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싶다. 이렇듯 잊혀져 가는 유의미한 내용들을 접할 때면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어느덧 반백의 나이에 접어든 중년여성인 내가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내 증조할머니는 참 지혜롭게 종갓집 종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끝까지 애쓰셨던 숭고한 삶의 주인공이셨구나 싶다.     

‘나였다면 그런 인고의 세월을 잘 살아낼 수 있었을까?’     

‘난 절대 그렇게는 못 살았을 거야. 우리 할머니들 인생이 너무 가련하시고 또 대단하시다.’     

혼자서 자문자답하면서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에 대해서 가끔씩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집 앞 공원의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그릇장사가 길가에 늘어놓고 파는 목기들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내 증조할머니의 모습과 제사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다.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지 민망해져서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 누가 볼까 싶어서 의식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원목 제기 세트의 그릇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그릇장사 사장님이 나에게 다가오셨다.     

“이건 박씨상방 남원 물푸레 원목 제기 세트에요. 장인이 만든 제품이라 정말 좋은 제품입니다. 요즘 이런 것 사기 힘들어요.”     

사장님은 상품을 어필하기 위해 열심히 설명해 주셨다. 본인이 팔고 있는 원목 그릇들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사장님, 그릇들이 너무 예뻐요.”라고 응답해 드렸다.     

“그렇죠? 이 그릇들은 모두 장인들의 작품이에요. 공장에서 찍어낸 그릇들과는 달라요. 천천히 구경하시고 필요하신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네~ 사장님! 그럴께요. 감사합니다.”               

소장용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 싶으니 ‘원목 제기 세트’를 확 사버릴까? 하는 충동구매 욕구가 순간 훅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최근 시흥으로 이사를 하면서 내가 이고지고 사는 물품이 너무도 많음을 실감하고 반성도 많이 했었고, 이후로 이른바 ‘미니멀리즘’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간소하게 살아보고자 노력하고자 마음먹었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 ‘원목 제기 세트’ 구매욕구는 잘 참아 넘겼다. 아쉬운 대로 원목 도마와 접시 몇 개를 실용성에 근거해 골라 담아 결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있어서 '증조할머니'와 '제기'는 짝궁으로 묶인 기억이었다.

그날 산책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공원 입구의 그릇 좌판을 계기로 생생하게 떠오른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휘발되어 사라져 버리기 전에 어떻게든 부여잡아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고민의 여지 없이 노트북 앞에 앉아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단숨에 써 내려가게 되었다.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그릇 판매 좌판의 ‘제기’ 덕분에 증조할머니에 대한 기억들을 이렇듯 집중 정리된 글로써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의미로운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마무리하자니 참빗으로 곱게 빗어 올린 쪽진머리에 비녀를 단정하게 꽂고 계셨던 내 증조할머니의 단아하고 얌전하셨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아련하고 그립지만 슬프지는 않은,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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