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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Jul 12. 2021

[일상의 단상]-<추억의 가치>

*추억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일상의 단상]-<추억의 가치>

* 추억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


#경복궁역, 서촌, 부암동, 백사실계곡, 윤동주기념관,  수성계곡  


[‘추억’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단상]


나는 몇 년 전에 서촌의 한 독립서점에서 진행된 ‘철학세미나’에 일정 기간 참여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개인적으로 참 힘든 일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들던 때라 나도 모르게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가면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지쳐있었다. 돌이켜보면 근거 없이 그저 패기에 넘쳤었던 젊은날에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과 같이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포기만 하지 않고 끝까지 해법을 찾으면 반드시 극복할 방법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나 자신의 의지력을 굳건히 믿고 살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끝간데 없는 긍정성에 바탕을 둔 ‘해맑은 믿음’ 하나로 버티듯 살아가면서, 정신력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굳건함을 자부할 수 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던 한때가 있었다. 비록 좌충우돌하긴 했어도 참 푸릇하고 아름다운 젊은날이기도 했다.


어느덧 중년의 나이로 치닫고 있는 시점이 되고 보니 이 나이 먹도록 나름대로의 산전수전을 겪으며 인생이 참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아무 일 없이 잘 살아가는 보통날의 일상’이 얼마나 어렵고도 행복한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가 닿아 그 ‘철학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었는데 ‘버지나아 울프의 문학’과 ‘파스칼의 철학’에 대해 논했던 당시 그 세미나의 내용에서 많은 위안과 깨달음을 얻었던 것에 보태어, 그곳에서 만났었던 여러 선생님들과의 교류를 통해 각기 다른 다양한 삶에 대한 간접 경험도 다각도로 할 수 있었던 터라 참 의미로운 시간으로 남았던 경험이었다.


그때 나는 매주 목요일마다 지하철을 타고 경복궁역에 내려 그 독립서점으로 향했었는데, 옛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는 서촌의 골목길들이 너무 예뻐서 매번 다른 길로 돌아 걸으며 작은 여행을 하듯 거리 구경을 했었다. 굳이 멀리까지 긴 시간 이동하지 않고도 가까운 곳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뜻밖의 장소에서 아련한 행복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랬던 것 같다.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는 나는 어떤 때에는 모양과 크기가 일정하게 쌓아 올려진 아파트 공간이 마치 닭장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 밑에 사람이 살고, 또 사람 위에 사람이 층층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라는 공간이 왜 이토록 사람들의 선호도를 높이며 날이 갈수록 매매가가 치솟고 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지만, 우선 나부터도 아파트 거주에 있어서의 편리함과 기반시설의 인프라를 포기하기가 쉽지가 않으니 아파트 거주 선호의 설득력 있는 이유를 꼽으라 하면 그 또한 차고 넘칠게 분명하다.


암튼 고층의 아파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골목길’에서 색다른 매력을 느꼈기에 서촌의 길거리를 걷는 그 시간을 꽤나 좋아했었던 것 같다. 나지막한 한옥과 높아봐야 2-3층에 불과한 옛 건물들 사이로 굽이굽이 일정하지 않게 이어진 골목길들을 걸을 때면 단층인 어느집 대문의 문고리 모양과 집 앞 작은 화단에 핀 이름 모를 꽃들, 그리고 2층 건물의 배치와 3층 건물 계단의 특징도 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보이는 골목 끝에서 꺾어지는 길을 돌아서면 또 어떤 골목길이 펼쳐질지 기대되기도 했다. 또한 높지 않은 건물들 덕에 조금만 시야를 위로 향해 올려다 보아도 푸른 하늘을 만끽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서촌의 골목길은 너무 좁아서 차량이 통행할 수 없는 곳들이 많은 편이라 걷기에 최적화된 동네라고 생각되었다. 골목길이라 하더라도 차량이 진입할 수 있을 정도의 너비가 나오면 그 골목길은 차량이 오고 가게 되면서 걷는 사람들이 차를 피해 구석자리로 몸을 비켜 주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면서,  그 골목길은 더 이상 사람이 차지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인사동이나 가로수길 등도 예전의 모습을 잃게 된 것이 바로 차량이 통행할 수 있을 만큼의 대로가 한몫을 한 듯하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그 세미나가 진행되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에 매주 한 번씩 서촌의 골목길을 자박자박 산책하며 나만의 명상으로 평화롭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 모임이 종료된 이후에도 나는 가끔씩 서촌을 찾아가 골목길을 걸으며 목적 없는 산책을 하곤 했다. 매머드급 대도시인 서울특별시의 화려한 이미지에 대비되는 소박하고 고즈넉한 그 길이 그저 좋았기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날이면 딱히 볼 일이 없이도 한 번씩 찾아가게 되는 곳이 바로 서촌의 골목길이었다.

그러다 차츰 걷는 범위의 반경을 늘리게 되었고, 경복궁역에서 시작해 서촌의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며 골목길 어디쯤에 위치한 ‘독립서점’과 작가 ‘이상의 집’에도 들렀다가, 계속 올라가 ‘통인시장’을 구경하고 부암동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은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 리스트에 꼽을 만한 곳이 된 것이었다. 레트로 감성이 충만한 그 길들을 천천히 걷다 보면 어느새 평안한 마음이 잔잔하게 스며드는 그 곳이 참 어여쁜 길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랜만에 또다시 서촌을 걷고 왔다. 이번에는 나 혼자가 아닌 동행한 길동무가 있는 걸음이었다. 부암동 길을 잘 알고 있는 참 친절한 길동무님의 안내 덕분에, 내가 여러 번 혼자 가던 때에는 가본 적이 없었던 부암동 주택가의 뒷길을 통해 ‘백사실계곡’으로까지 접어들어 더 멀고 높은 곳으로까지 걷게 되었다. 그렇게 ‘윤동주기념관’과 ‘청운 문학도서관’에도 들를 수 있었는데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숨은 그 뒷길들이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서촌의 골목길들을 걸으며 예전에 참여했었던 철학세미나에서 만났었던 멤버님들의 얼굴도 떠올랐고, 내 졸업논문 주제였던 ‘윤동주 시인’의 기념관에 들렀을 때에는 윤동주 시인 관련 자료에 파묻혀 살던 당시의 내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어느덧 ‘추억’이 되어가는 거란 걸 이미 알고는 있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추억’이라는 단어가 좀 더 무게감 있는 큰 의미로 다가오기도 했다. 그 기억들이 애틋하고 아련한 마음을 불러오면서도 그 느낌을 ‘그리움’이라 말하기에는 뭔지 모를 아픔도 함께 느껴지는 듯했다. 아마도 그 당시의 내 상황이 행복하기보다는 좀 힘들었기에 그때의 어려움들이 순간적으로 되살아나서 다소 번민했었던 그 시절의 정서로 나를 데려갔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어느 명언집에서 본 적이 있었던 ‘루쉰’의 말이 떠올랐다. [광인일기], [아큐정전(阿Q正傳)]등을 쓴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은 ‘추억이란 사람을 즐겁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쓸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미 스러져 간 그 쓸쓸한 시간들을 정신의 실오라기로 붙들어 매어둔들 또 무슨 의미가 있으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이 인상적으로 다가와서 깊이 숨은 뜻을 곱씹어 보면서 나도 모르게 동의하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러면서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 라는 맥락으로 이해했었던 기억도 있다.


본디 ‘추억’이란 지나간 과거의 일을 오늘날에 와서 떠올리는 것을 의미할텐데, 사실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기억하고 싶을 만큼 좋았었고 행복했었던 일들에 국한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끔찍하게 힘들었거나 괴로웠던 일조차 ‘추억’이라고 회상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깨달은 자’가 아닐까?


‘추억’이라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좋은 옛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많은 사람은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삶에 있어서 다양한 것들을 심고 가꿀 ‘넉넉한 마음의 텃밭’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아이 양육에 있어서 좀 더 책임감을 갖고서 아이의 어린날들에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줄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역경의 순간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지기도 하는데, ‘좋은 추억’이란 현재를 잘 살아가게 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유불급’이라는 말도 있듯이 남다른 ‘추억’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너무 과거의 기억만을 부여잡고 지나친 자기연민과 애틋한 감상에만 빠져서 현재를 제대로 못살거나 앞날에 대해서 내다볼 줄 모른다면 그것 또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린날에 너무 유복한 환경에서 철모르고 자라서 행복한 기억만 갖고 있는 어떤 성인은 나이에 비해 책임감도 현실감도 떨어지고 평생을 ‘공주병, 왕자병’에 걸린 ‘어른아이’로 존재해, 가족으로 표상되는 특수관계인을 포함한 주변인들에게 큰 짐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대책없고 무책임한 부모를 만나 고생만 하며 각박하게 자라나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애어른’으로 살아야 했기에,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느라 현재를 즐길 줄 모르고 맹목적으로 ‘열심히’만 살다가 ‘번아웃’ 되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무엇이든 ‘적당히’가 중요할 텐데 그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러니 삶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중요할텐데, 그것은 ‘사랑’과 ‘철학’의 중요성으로 귀결되는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그래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후회하게 되는 일을 반복하면서 시행착오의 연속인 인생을 산다. 그렇게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을 잘 이해하려면 자기 자신과 타인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제대로 정립하고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인 것 같다.

자기중심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삶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정립하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따뜻하게 인정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길 수 있고, 그러다 보면 타인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선순환의 과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을 좋은 시간들로 채워 나가게 되고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추억’으로 남아 인생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한편 ‘추억’은 ‘미화’되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본다. 아마도 사람의 ‘기억’이란게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가진 ‘망각의 속성’이라는 것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기억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불편하기도 하고 서글픈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단점을 장점으로 되살려 좋았던 일은 기억하고 나빴던 일은 잊어버릴 수 있는게 가능할 듯하다. 의식적인 자기암시로 나쁜 일은 하루 빨리 훌훌 털어버리고 좋은 일은 예쁜 추억으로써 마음속 깊이 아로새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거’에 매어 살지도 말 것이며 ‘미래’에 저당 잡혀 살지도 않으면서 ‘현재’를 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오늘 정말 오랜만에 서촌 일대를 걷고 집에 돌아오면서 가슴 한가득 충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 뜻밖의 서촌 나들이가 ‘추억’에 대해서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향수를 불러일으켜 준 서촌의 골목길들이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켜주어서, 원할 땐 언제든 다시 찾아가도 늘 변함없이 나를 반겨주는 친구처럼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요즘 서울과 경기도는 온통 부동산 광풍에 시달리고 있다. 나같이 집을 사고팔고에 관심이 없는 실거주자들에게는 어차피 내가 깔고 앉아 있는 집값이 오르든 내리든 아무 상관이 없으니, 집값이 연일 고공행진을 하는 상황이 결코 달갑지가 않다. 특히 수도권 곳곳에서 개발붐이 일고 있는 것도 하나도 안반갑다. 재건축 재개발만이 능사가 아니며 한 번 파괴되면 많은 비용을 들이고도 원래의 모습으로 복귀할 수 없는 것이 과거의 흔적들이다. 그래서 옛모습이 남아 있는 서촌 같은 곳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 깨달음이 없지 않기에 요즘 ‘레트로’니 ‘뉴트로’니 하며 옛날 감성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추억’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삶에서 황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가 분명 존재한다. 추억의 흔적들을 더듬거리듯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선물해 주는, 예전의 흔적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서촌과 같은 곳곳들이 언제까지나 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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