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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Oct 09. 2021

[책리뷰]-<정유정 작가의 '28'>

*외면하고픈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독서 리뷰]-<정유정 작가의 '28'>

*외면하고픈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독서리뷰>

'7년의 밤', '종의 기원' 등의 여러 작품들의 유명세를 이미 알고 있었고, 비교적 늦은 나이에 등단을 해서 문학계에서는 만학도 같은 존재인 '정유정 작가'를 인식하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작품을 접해 본 것은 ‘28’이 처음이었다. 몇 년 전 책모임에서 '함께읽기책'으로 책친구님이 추천한 적이 있어서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발생했던 ‘아프리카 돼지열병’ 으로 인한 ‘돼지 살처분' 뉴스를 보고 이 소설의 모티브를 얻었다는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면서 참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책의 제목이 '28'인 것은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퍼져 아수라장이 되면서 봉쇄 지역이 된  가상도시 '화양'에서 28일 동안 일어난 참혹한 일들을 스토리라인으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링고'라는 개와 '서재형, 박동해, 김윤주, 노수진, 한기준'등의 여러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 삶의 삼라만상을 흥미롭게 풀어나간 책이었다.


이야기가 시작된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전염병이 '개'로부터 기인해서 인간에게까지 전파되었고, 병에 전염된 인간은 눈이 빨갛게 되다가 고열과 통증을 수반하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작가는 정체불명의 괴질이 온통 퍼져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전염병 상황을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하였고, 생존이 위협받는 극한의 현실이 펼쳐지게 되면서 이기적이고 사악한 인간의 본성이 여과 없이 그대로 올라와 서로에게 해악을 가하게까지 되어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리얼하게 묘사하며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서 몰입도를 최고조로 만들었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처음에는 병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다가, 동물도 사람도 다 걸릴 수 있는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서 인간들은 '인간과 가장 밀접한 동물'로 대표될 수 있는 '개'가 전염병 전파의 핵심이라며 무차별하게 살상해 버리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소설 속 가상의 도시 '화양'을 봉쇄하고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통제해서 전염병이 다른 지역으로 퍼지지 못하도록 임시방편의 조치만을 취할 뿐이었다. 이 전염병이 어디로부터 발생한 것인지, 또 어떻게 치료할 수 있는지 방법을 찾지 못한 채 당황하다가 사람들은 점점 이성을 잃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도시 전체가 인권도 법도 존재하지 않는 무법천지인 듯 아수라장으로 변해간다. 오늘날 뜻밖의 코로나19의 발발했던 초기에 중국의 '우환'지역이 발병지라고 지목되어 그 지역이 봉쇄되었던 국제뉴스를 접했을 때, 통행도 외출도 제재를 당하며 일상생활이 멈추어 버리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그런 물리적인 억압 상태를 언제까지 버티어나갈 수 있을지 내심 걱정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이 소설 속 '화양' 지역은 한 번 질서가 무너진 상태에서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자기 통제력을 지켜나가는 것이 언제까지 얼마나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끔 이끌어 주었다.


한 번 파괴되어 버리기 시작한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룰들은 무너지기 시작한 도미노처럼 급물살을 타며 순식간에 쓰러져 버리면서 도대체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질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그 끝을 알고 싶다는 듯이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악함과 모순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과정을 소설 속에서 잘 보여 주어서 씁쓸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였다.

소설 속에서는 인간의 이기심과 사악한 본성에 대해 집중해서 계속 읽어 나가기가 괴로운 마음이 들 정도로 독자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기도 하는 면이 있었다. 책을 덮고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인간의 본성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고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때에는 마음의 여유도 가질 수가 있으며 선한 마음을 내어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지만, 상황이 안좋고 괴로운 상화에 처했을 때에도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며 선한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편 이 소설 속에서는 동물인 '개'를 의인화하는 듯 '링고'와 '스타'를 등장시켜서 동물들이 마치 사람과 같이 상황에 대한 사리분별을 할 줄 알고 나름대로 생각을 갖고 있으며 사랑에도 빠지기도 하고 능동적으로 자신을 지켜낼 수 없는 무기력함에 대한 비참함과 생명의 위협에 노출될 때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생존에의 절박함 등을 다 느끼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소설의 스토리 전개를 통해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우리 현실 속에서는 이미 애견인들이나 애묘인들이 상당히 많아진 상황이고 그들은 반려동물들을 자식과도 같이 생각하기도 하며 가족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물론 인간과 지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개나 고양이도 생각과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 밖의 동물들과 식물들도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체라는 면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하등하다며 경시할 수 없을 것이며, 인간이 그들 생명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라도 한 듯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진지하게 해 보게 되었다.


나는 가슴 뭉클해지게 아름다운 성장소설을 좋아할 만큼 밝고 예쁜 스토리를 선호하는 개인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편이다. 정유정 작가의  전작 ‘7년의 밤’,'종의 기원' 등이 공포물에 가깝게 무섭고 오싹하다는 후문을 들었던지라 별로 끌리지 않아 작가의 책을 읽어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책친구님의 추천책으로 이 책 ‘28’을 손에 잡게 되면서 정유정 작가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한번 재독하게 되었다.

추리소설도, 스릴러 장르도 아닌 책이 이토록 뒷머리를 쭈뼛쭈뼛 세우게 할 만큼 무섭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한지, 긴박감을 느끼며 스토리에 몰입하게 되니 책장은 술술 잘 넘어갔으나 읽는 내내 심장이 수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초집중하는 긴장감을 준다는 면에서 정유정 작가의 휘몰아치는 듯한 필력을 많은 팬들이 좋아하는 것 아닐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부사나 형용사를 별로 사용하지 않으며 군더더기 없이 간결함으로 할 말만 딱딱하는듯한 작가의 문체가 얼핏 보면 좀 건조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였으나, 지나친 미사어구나 지루할 정도로 길게 늘어지는 설명이나 묘사, 쓸데없이 빙빙 돌리고 꼬고 꼬아 그 뜻을 이해하려면 되돌아가서 재차 읽어봐야 하는 것보다는 이런 깔끔한 서술방식도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의 문장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좀 독하다 싶은 표현들도 느껴지기도 했다는 것을 소심하게 밝히며, 그래서 나에게는 이 책과 정유정 작가가 별로 호감이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각종 전염병들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에 인간은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가고 있고 예방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질병들도 생겨나는 심각한 현실이다. 더욱이 현재 인류는 '코라나19'라는 난데없는 전염병의 발발로 인해 전세계적인 펜데믹 상황을 근 2여 년째 겪으며 일상이 무너지고 사회, 문화, 경제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변화와 위기를 겪고 있는 현실이다 보니 이 책의 스토리가 더 예사롭지 않게 깊이 들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작가가 코로나 상황 이전에 이 책을 집필했으니 '정유정 작가'가 인간과 생명체, 그리고 지구와 인류의 현세태에 대해서 뭔가 위기의식을 느끼며 경종을 울릴 필요성을 작가 특유의 예민한 촉으로 미리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도 해 볼 수 있을 만큼 '28'의 내용이 지극히 개연성 있는 설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작가가 돼지 살처분 뉴스를 접하고 모티브를 얻어 이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말못하는 동물이라고 해서 생명의 가치가 경한 것은 아닐진대, 인간이 함부로 동물의 생존권을 말살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비윤리적인가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은 의미롭고 가치 충만하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사람이고 동물이고 식물이고를 망라하여 생명에 대한 경외감과 존중이 사라져 가는 듯이, 어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랍고 엽기적인 사건사고들을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접하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우리 인간이 모든 생명체에 대해 그 귀함과 소중함을 언제나 망각하지 말고 생명존중과 상생의 개념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어우러져서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 나가야 할 필요성을 이 책 '28'을 통해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만든 줄로 자신의 몸을 스스로 꽁꽁 묶는다는 의미의 한자성어로, 자기가 한 말과 행동에 자신이 스스로 구속되어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도 연결되어 떠오른다. 자신이 스스로 저지른 일의 과보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인류는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시점이 왔음을, 아니 이미 좀 늦은감이 있음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기도 한다. 전세계적인 이상기후와 각종 전염병들의 출현이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지구가 골병이 들어서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임계점까지 왔음을 드러내는 적신호가 분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당장의 편익을 위하여 원래 하던 대로 하고 살면서 뭔가 특단의 변화를 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 지구와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 급격한 산업화와 과도한 과학의 발전, 자연환경의 파괴를 불사하는 개발이 인간의 삶을 현대화시키고 좀 더 편리하게 진보해 왔을지는 모르나 결국에는 그것으로 인해 인류와 지구에게 재앙이 닥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최근 유모차에 누워 있는 아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태어나자마자 마스크를 쓰고 살아가야 하는 후세대들에게 뭔지 모를 슬픔의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인간이 스스로 저질러 놓은 일에 대한 결과가 독한 부메랑이 되어 인간에게로 되돌아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브레이크 없는 전차처럼 앞을 향해 돌진만 하는 듯하던 인간의 삶에서 일단 주춤하며 멈추고 되돌아보아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다같이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이렇듯 이 책 '28'을 다시 완독하고 이 책리뷰글을 쓰는 시점이 코로로19라는 펜데믹 상황이다보니 인간과 생명, 삶과 죽음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외면하고픈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양립하며 내재되어 있다. 어떤 상황에서는 천사가 나오고 또다른 상황에서는 악마가 치고 올라온다. 어떤 이는 선의 힘이 더욱 강하여 극대화 되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 반대의 경우로 살게 되는데, 그가 처한 환경과 주어진 조건, 상황에 따라 인간의 어떤 본성이 발현되는지가 갈리게 되는것 아닐까 싶다. 아름답고 선한 것만을 접하며 살고 싶어도 누구에게나 그렇듯 삶이란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서, 도망치고 싶은 독한 현실에 맞닥뜨리게 되면 결국은 내재된 사악한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하고 이성의 힘을 잃지 않을 수 있어야 사회라는 공동체가 깨지지 않을 수 있고 그래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차라리 외면하고픈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올라오지 않도록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의 힘을 결코 잃지 말고 더더욱 크게 키워서 인류의 재앙을 막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과 주변을 다시 한 번 둘러보는 계기를 만들어준 정유정 작가의 '28'을 한 번씩 떠올리게 될 듯한 예감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28'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별점은 5점 만점에 3점을 주고자 한다.

물론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로써 우리가 자칫 관심 없이 지나쳐버릴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경종을 울려 주었다는 점에서는 매우 의미롭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현재 코로나19라는 팬데믹 현실을 겪으며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보니,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이런 전염병 상황을 소재로 이미 이 소설을 집필하여 2013년에 출간했던 '정유정 작가'의 혜안에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소설 전개와 표현방식이 너무도 직설적이어서 책을 읽다가도 중간중간 책을 덮고 싶었던 순간이 여러 번 있었을 만큼 흠칫 놀라기도 했으며, 책을 완독하고 난 후에는 한마디로 '이 책 참 독하다'라는 느낌이 훅 올라왔을 만큼 나의 개인적인 선호 코드와는 잘 맞지 않았던 책이었기에 2점을 차감했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차마 직면하기 힘들 만큼 불편한 진실이라서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비겁한 방어기제일런지도 모르겠다는 자성도 해보게 된다.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읽어보지는 못했을 이런 독특한 책을 책친구님의 추천 덕분에 읽게 되었으니 참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이 책을 추천해 준 친구룰 포함한 책친구님들과 책수다도 나누었고 나와 다른 다양한 시각을 접할 기회가 있었으니, 쉽게 읽고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기억도 가물거릴 정도로 존재감 없는 여타의 책처럼 쉽게 휘발되어 버리지는 않고 기억 한켠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책이기에 분명 의미로운 소설이었다.



<기억에 남는 의미 있는 문구>

P28

나는 때로 인간 없는 세상을 꿈꾼다. 자연의 법칙이 삶과 죽음을 관장하는 곳, 모든 생명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계, 꿈의 나라를. 만약 세상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다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이다.


P133

오줌 싸지 말고, 잠만 퍼질러 자지 말고, 운동하고, 치료받고, 책도 보면서 사람답게 지내라. 그게 서로에게 최선이야. 우린 살인범의 가족으로 불리고 싶지 않고, 넌 감옥에 가고 싶지 않을 테니까.


P193

풍랑은 풍랑에 맡겨두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거다.


P347

욕망이 없다면 잃어버릴 것도 없어. 잃을 게 없으면 두려움도 없고.


P479

서재형. 인간 없는 세상으로 가다.


P480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

-마크 롤랜즈, <철학자와 늑대> 중에서


P481

죽음을 향해 쾌속 질주하는 인물들은 ‘전염병의 공포’를 넘어 ‘대재앙 속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의 비극’


‘이제는 더 이상 귀엽지 않다.’는 이유로, ‘나는 개를 키울 형편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버려지고 상처 입은 개들을 정성스레 돌보는 서재형의 삶에서는 진한 속죄의식이 묻어난다. 유기견들을 향한 죄책감, 그것은 그의 치명적 트라우마이면서 동시에 무미건조한 삶을 견디는 힘이기도 하다. 서재형의 인생 자체를 거대한 올가미처럼 휘감고 있는 트라우마. 그것은 이 소설 전체를 감싸 안는 거대한 복선이기도 하다.


P483

동물보호관리를 사회적 시스템으로 해결한다는 발상 자체가 행정 편의주의일지도 모른다. 동물의 몸속에 전자칩을 삽입하여 바코드처럼 ‘관리’할 수 있다는 신념 자체가 철저히 인간 중심주의적이다. 중요한 것은 동물에 대한 사랑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온몸으로 이해하는 감수성이 있을까. 동물의 이점만을 갈취하고 동물이 주는 크고 작은 불편은 배제히는 인간의 이기심 자체와 싸우지 않는 한, 유기견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유기동물 문제는 단지 반려동물의 생존권을 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 맺기 자체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은 자연을 보호한답시고 자연을 ‘자원’으로 대상화하고, 자연을 등산로나 휴양지로 이용한다는 명목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한다. 개발의 이면은 파괴와 살상일 수밖에 없다. <28>은 인수공통 전염병이라는 상징적 매개로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인 ‘불평등 계약’의 의미를 성찰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P487

부모의 속물주의는 자식의 애정결핍을 낳고, 자식의 애정 결핍은 사회를 향한 반감과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확대된다.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인간들 스스로의 폭력과 증오로 인한 죽음이다.


P492

진실을 파헤친답시고 불완전한 팩트와 의심의 눈초리만으로 급조해낸 신문기사가 타인의 삶을 얼마나 철저히 파괴해버릴 수 있는가


사건의 ‘뉴스 가치’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절실한 생의 의미’였다.

갑과 을의 무한투쟁으로 얼룩져버린 이 참혹한 세상에서 ‘성찰적 지성’의 가치를 일깨우는 존재다. 어떤 스캔들 속에서도, 어떤 정치적 외압 속에서도, 인간 개개인의 진실은 함부로 도륙당해서는 안된다는 깨달음.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에 선행을 베풀기는 쉽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정말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를 증명하는 것은, 참혹하고 비통한 시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숨 쉬는 인간성’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P495

세상의 온갖 생명체, 물과 바람까지도 영혼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을 지켜보고 있다는 세계관과 자신들을 먹여 살려주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자연이 빚어낸 우연의 산물들이다. 서로 빚을 지고 갚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스스로 다짐하건대 내게 남은 나날, 그 점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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