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일 오후 2시에 제주도를 가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밖은 어둡고 비가 내린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 기체가 자꾸 위아래로 요동친다. 이사라고 해봐야 겨우 캐리어 세 개이지만, 그렇게 조촐한 생활이라도 서울에서의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내가 경험한 실제의 일을 가감 없이 적어 놓은 것이고, 이 글을 믿을지 말지는 알아서 판단하길 바란다. 다만 내가 단순한 이유로-그러니까 생활고나 같은 도피성 문제로- 도망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 글을 쓴다. 그때의 사건을 설명하려면 201X 년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로 오늘처럼, 비가 세차게 내리고 바람에 낙엽이 날리지만, 이상하리만큼 조용한 날이었다.
우선 그 당시 나는 그리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야겠다.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가난하긴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편이었다. 내 본업은 피아니스트였고, 대학을 갓 졸업한 애송이에게 주어지는 일은 별로 없었다. 피아노 외에 아르바이트나 과외로 충당하여 간신히 집세나 연습장 대여료를 내는 꼴이었으니, 그때의 나에겐 에어컨 하나 없는 옥탑방이라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한 낮 동안 달궈진 옥상 바닥은 새벽이 넘도록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터덜터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돌아가는 선풍기에서는 끝도 없이 더운 바람이 나왔다. 덕분에 나는 한여름밤이면 더위에 잠을 못 들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나는 비가 오는 날을 특히 좋아했다. 얕은 문턱을 넘어 빗물이 넘쳐 신발을 좀 적시기는 했지만, 비가 오는 날만은 시원하게 잘 수 있었다. 게다가 소음에 민감한 편도 아니라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자장가에 가까웠다.
또 하나, 이 이야기를 위해선 옥탑방에서 보는 전망이 상당히 좋지 않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옥탑방 건물은 협곡 모양으로 갈라진 늙은 산 면을 탄 가파른 달동네의 거의 정상 부근에 있었다. 집 앞으론 한강이 흐르고 있고, 강변북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차들, 그리고 강 너머로 늘어선 마천루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옥탑방이래도 탁 트인 도시 전망 같은 로맨틱한 밤 풍경을 상상할 수 있겠으나, 불행히도 한 층 더 높은 건물이 나의 옥탑방 조망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붉은색 내화 벽돌로 마감을 한 주택이었다. 그 흉물스러운 벽돌집은 우직스럽게 나의 조망을 방해했다. 덕분에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창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살아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 번도 그 집의 내부를 들여다본 적은 없었는데, 언제나 검고 질겨보이는 암막 커튼으로 꼼꼼하게 창문을 막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그 붉은 벽돌집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풍경을 종종 마음속으로 그려보기도 했었다. 그게 마냥 허무한 상상은 아닌 것이, 문은 집의 담을 넘어서 손에 닿을 정도에 있었고, 언제라도 내가 마음을 먹으면 창문을 타고 넘어갈 수 있었다. 단순히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서였기 때문에 그런 적은 없었지만. 그래서 지금은 기억하기도 싫은 그 풍경에서 언제나 나의 집은 가파르게 난 산비탈과 비탈을 가득 채운 집들, 그리고 뷰의 가운데를 가득 메운 붉은색 벽돌집과 검은색 커튼이 같이 있었다.
그때도 미친 듯이 더운 여름밤이었다. 새벽 2시께까지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소리에 귀 기울여 보니 비가 푸드덕푸드덕 내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 큰 비는 아니었지만 오늘 밤에는 그래도 좀 시원하게 잘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다. 나는 그래서 창문 아래 수건을 깔고 창문을 열었다. 이 정도 비라면 들이쳐도 괜찮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이상하게 빗소리를 뚫고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피아노 소리였다. 그냥 피아노를 치는 것도 아니고, 아주 숙련된 피아니스트가 열정을 다해 치는 그런 연주였다. 하지만 나는 곡명을 특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애송이 피아니스트라지만, 전혀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니! 나는 잠결에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그리고 잦은 빗소리를 들으며 깊은 잠에 들었다. 손이 넷 달린 끔찍한 괴물이 피아노를 치는 악몽을 꿨지만 잠에서 깨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방안은 온통 물 천지였다. 흡사 태풍이 불었는데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 같은 꼴이었다. 나는 흠뻑 젖은 이불과 바닥을 욕지거리와 함께 정리했다. 필시 잠이 든 새벽 내에 비가 엄청나게 내렸겠거니 하고 말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어제저녁에 들렸던 피아노 소리였다. 이 근처에, 이 달동네에 피아노를 가진 사람이 있던가? 게다가 그 정도로 수준급 피아니스트가 왜 여기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별 수는 없었다. 일단 나는 내 생업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집을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피아노를 찾아볼 수 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다. 다만 어젯밤에 들었던 그 그 선율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다른 기억이 잊힐수록 선명하게 그 곡만은 디테일까지 살아났다. 두세 가지의 주제가 번갈아 나오는 소나타 같은 형식의 곡이었는데, 두 주제가 너무 이질적인 느낌이라 마치 두 명의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연주한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 피아노 소리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그 주제를 흥얼거리며 피아노로 옮겨보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이상하게 머릿속에서는 맴돌았지만 손으로 옮겨보려고 하면 콱 막혔다. 마치 무언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 곡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일종의 육감 같은 것이 내 손과 집중력을 흩트렸다. 이성과 감성 아래에서 어떤 나의 전혀 다른 부분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며칠을 씨름하다가 결국 그 일을 관두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계속되는 열대야에 눈을 좀처럼 못 붙이는 여름밤이 계속되었다. 고지대라 모기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만약 모기라도 있었으면 정말 한 숨도 못 잤으리라. 그런 생각들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가 내렸다. 2시께나 될 한밤중이었다. 후드득하는 반가운 소리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큰 비는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시원해지기 때문에 기쁜 것도 있었지만 나는 빗소리를 듣자마자 이상한 기대감 같은 것이 슬슬 생겨났다. 나는 그 피아노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은 오간데 없이 달아났다.
그리고 비가 오기 시작한 지 몇 분이나 곧 지났을까, 피아노 소리가 불현듯 들렸다. 저번과는 조금 다른 선율이었다. 저번의 그 선율이 두 주제의 대립, 고통과 희망이 번갈아 나타나는 형식을 취했다면, 이번에는 전혀 형식이 녹아있지 않은 현대적인 곡이었다. 대신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기보다 인간의 감정을 그대로 말하려고 하고 있었다. 역시 처음 들어보는 연주였다.
이런 말을 하긴 좀 유치하지만, 내게 피아니스트로서의 순수성이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좋은 연주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뛰었고, 어려운 곡을 완성해나갈 때마다 순수한 기쁨이 일었다. 하지만 순수히 즐기기에 세상은 너무 가혹했다. 즐길 수 있는 음악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있는 집 자식만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온몸이 땀으로 젖을 정도로 연습을 했다는 저 유명 피아니스트의 일화도 내겐 감동을 주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넓고 쾌적한 개인 연습실과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보채지 않는 통장 잔고 같은 것이 그려졌다. 나의 좁고 퀴퀴한 연습실과 소리가 나가기 일보직전인 업라이트 피아노가 대비되면서 말이다.
나는 그 기묘한 곡을 개인적으로 받고 싶다는 욕망이 불 같이 일었다.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명 피스들을 찾아서 유명해진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어쩌면 내가 될 수도 있다. 나 같은 삼류 피아니스트는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들기에, 한가롭게 미지의 곡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다. 욕망이 순수한 감정 뒤에 끓었다. 결국 나는 그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나는 별안간 깜짝 놀랐다. 밖에는 세찬 폭우가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가랑비인 줄 알았는데!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타격에 우산을 잡은 손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우산도 별로 소용은 없어 간신히 얼굴이나 빗물을 피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빗소리가 생각보다 크기 않았다는 것이다. 자연 전체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숨을 죽였다. 귀를 세게 맞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삐-하는 이명 사이로 소리가 숨을 죽이는 것 말이다. 마치 이 고막이 두꺼워지거나, 귀마개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덕분에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신경이 곤두서자 다른 문제도 곧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억압된 빗소리를 뚫고도 피아노 소리는 제법 또렷하게 잘 들렸다. 만약 전체적으로 억압된 소리가 들렸다면, 필시 내 귀의 문제일 것이다. 귀에 물이 들어갔다거나, 일시적인 청각 장애정도로 치부할 수 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찬 빗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아도, 피아노 연주는 제대로 잘 들렸다. 두 개의 전혀 다른 층위로부터 들려오는 음파가 한 귀로 집중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두컴컴한 옥상에서 피아노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피아노 소리는 앞 집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두꺼운 암막 커튼과 단단히 닫힌 유리 창문을 뚫고 말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소리는 그곳에서부터 나왔다. 나는 한참을 홀린 듯 연주를 들었다. 지나치게 작은 빗소리가 거슬렸지만, 미지의 연주자가 연주하는 곡은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끝없이 변주되는 주제를 머리에 되새기려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그 멜로디를 따라가려고 허공에 피아노를 쳤다. 서로 다른 주제인 것 같아도 묘하게 어떤 주제 하나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신비한 멜로디였다. 작품은 현대적인 작곡법을 완전히 탈피해있었다. 작곡가는 아마 천재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내 비천한 실력으로는 저 피아니스트의 연주의 일부라도 재연하는 불가능했다. 손이 다 아플 정도로 허공에 손가락을 놀렸지만 결국 나는 조금도 곡을 외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포기하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들었다. 눈을 감자 불 주위를 끝없이 맴도는 광대들과 그들의 웃음소리가 지나치게 작은 빗소리를 뚫고 들리는 듯했다.
어느새 비가 그쳤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곡도 갑자기 끝나버렸다. 젠장, 마침표도 없이 위대한 곡이 끝나버린 것이다. 나는 다소 황당하기는 했으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 시계를 확인하니 6시였다. 무려 4시간이나 곡이 계속된 것이었다. 저 멀리 떠오른 해가 창문을 때렸다. 잠자기는 글렀다. 나는 잠은 포기하고 서둘러 씻고, 옷을 입고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어제의 그 멜로디가 저번처럼 떠나지 않았다. 접시를 댓 개는 깨 먹고, 음식이 일곱 번쯤 다른 곳으로 서빙되기는 했지만, 좀처럼 이상한 흥분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날 저녁, 내 앞 집의 피아니스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매우 피곤했지만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 씻고, 개중엔 좀 상태가 괜찮은 셔츠를 챙겨 입었다. 좁고 퀴퀴한 벽돌 냄새가 가득한 복도와 층계를 올라, 나와 같은 높이의 층 -그러니까 한 층 높은 층-에 올랐다.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파란색 문이 나를 맞았다. 나는 마치 오디션을 보는 오케스트라 단원처럼 긴장한 채 초인종을 눌렀다. 너무 평범해서 살짝 놀랄만한 멜로디가 긴 시간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후로 두세 번을 더 눌러보았지만 대답이 없어 돌아가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어떤 사람이 도어록 사이로 모습을 보였다.
"누구쇼."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다. 눈가의 검은 다크서클이 볼 까지 내려와 있고, 쭈글쭈글한 얼굴살이 늘어져 보기 흉한 주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등이 굽어 있었지만,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나보다 더 클 것 같았다. 어깨는 힘없이 쳐져 있었다. 크고 헐렁헐렁한 흰색 민소매 속옷과 트렁크를 입어서 다소간 무례하다는 인상도 주었다. 문을 잡고 있는 손은 연신 떨리고 있었는데, 그 손 만은 마치 아이의 손처럼 고와 보였다. 파츠를 잘못 이어 붙인 인형 같이 말이다. 전체적으로 지쳐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빨리 말해서 좀 절었던 것 같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는 앞집 옥탑방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어젯밤에 너무 멋진 연주를 들어서 혹시 어떤 곡일까 하고……."
하지만 내가 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내가 심하게 모욕을 했거나, 내가 한 말 때문에 다른 기억이 난 것일까? 그는 내 면전에 대고 문을 쾅하고 닫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할 정도로 세게 말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일단은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한 번 더 두드려볼까도 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피곤했다. 바로 앞집이니까,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도어록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 네 계단쯤 내려간 상황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흠칫 놀랐다. 노인이 음침하게 열린 문 사이에 있었다. 그는 정장 바지를 입고,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놀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노인은 끔찍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테이프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이고 안간힘을 써서 웃음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입은 반쯤 벌린 상태로 둥글게 말려 있었지만 힘이 잔뜩 들어간 탓에 볼이 경련으로 실룩거렸다. 눈썹을 찡그려 최대한 감정을 표현하려 한 것 같았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아서 균형이 맞지 않았다. 그야말로 끔찍한 미소였다. 나는 그 괴기스러운 모습에 얼어버렸다. 그때 노인이 말했다.
"어서 와요, 친구.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짓했다. 들어오라고 말이다. 거미가 말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갈라지는 쇳소리에 무언가 끈적끈적한 타르 성분이 있어서 고막에 발리는 듯했다. 이런 사람에게서 그렇게 아름다운 곡이 연주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순간 내려갈까, 아니면 노인의 집에 들어가 볼까 고민했다. 아, 그때 그냥 나는 도망쳐 나왔어야 했다. 그건 절대로 사람이 짓지 말아야 할 표정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절박했다. 아니, 절박했다고 믿은 것 같다.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내려가던 발걸음을 돌려 노인의 집으로 향했다.
노인의 집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하기사 어떤 집인들 옥탑방보다 상태가 좋지 않으랴마는. 취향을 타지 않는 낡은 가죽 소파가 거실의 벽 쪽에 붙어있었고, 간단한 구조의 식탁이 주방 부분과 붙어있었다. 책장이 두어 개 있었다. 닫힌 방문은 필시 침대방 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들었는데, 나는 곧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창문이란 창문은 꽁꽁 막아놔서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은 지하실이나 다름없었다. 푸른빛을 뿜는 형광등 때문에 곧 눈이 아파졌다. 내가 쭈볏대고 있는데, 노인이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그래, 그 연주(노인은 연주라는 단어를 말하며 몸을 떨었다)를 들었다고?"
"예, 아주 훌륭한 곡이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내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그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
"아주 좋았습니다. 누가 작곡한 건가요? 아니면 직접 작곡을......"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노인은 갑자기 일어나서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발작의 전조증상 같은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내 노인은 웃기 시작했다. 거미가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기괴한 광경을 얼어붙은 채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간신히 웃음을 가라 앉히고 말했다. 허나 간발적으로 터져 나온 웃음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물론! 내가 직접 작곡한 것이고 말고. 한 번 보여줄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은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업라이트 피아노로 걸어갔다. 나는 다소 놀랐는데, 최소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방이 따로 있어서 간밤의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구석에 세워져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업라이트 피아노인 것을 차지하더라도, 연주는 형편없었다. 그는 차이코스프키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같은 것을 절반씩 섞어놓은 것 같은 곡을 연주했지만 도통 괴이하게 들리기만 했다. 형편없는 테크닉이 귀에 거슬렸다. 힘이 전체적으로 빠져있었다. 나는 필시 무언가 숨겨놓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게 아니었나? 아니면 이건가?"
노인이 내 눈치를 본 것인지,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킥킥 거리는 웃음과 함께였다. 연주는 똑같이 형편없었지만, 나는 예의상 좋은 곡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눈은 피아노 치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악보를 찾고 있었다. 이 노인이 그렇게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면 악보나, 최소한 음반이라도 한 장 있어야 했다. 노인은 아주 희귀한 앨범을 찾았고, 간밤에 재생했을 것이다. 소파에 앉아서 찾는 것은 한계가 있어서, 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노인의 연주를 듣는 척 그 뒤로 걸어 다녔다.
하지만 책장이나 눈에 띄는 곳에는 악보나 앨범은커녕 음악과 관련된 물건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 신문 스크랩 쪼가리 아니면 괴이한 전설과 관련된 책이었다. 민담이니 신화니 하는 책들 말이다. 개중에는 내가 도통 알아볼 수 없는 상형 문자로 된 책들이 책장의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다른 책장에는 어떤 젊은 사람의 사진과 수상경력 등을 담은 트로피들이 있었다. 모두 모르는 사람이 보면 대단하게 볼 법한 번쩍번쩍한 물건이었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그런 경력이었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삼류 콩쿠르이나, 아마추어 수준의 연주 경력이 다였다. 아마 사진에 나와있는 이 젊은 사람의 경력인 듯한데, 필시 노인의 아들 같아 보였다. 지금의 노인과 같은 괴기스러움은 없지만, 노인과 세세한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살짝 구부러진 매부리 코라던지, 가늘고 긴 눈매라던지 말이다. 그 와중에 노인은 혼잣말을 하며 두어 번 곡을 바꾸고 있었고,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숨겨진 곳이 있는 것일까? 저 노인은 일부러 나를 도발하려고 저런 곡을 치는 것일까?
무작정 노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방을 수색하던 나는 책장 옆으로 난 창문을 가리고 있는 암막 커튼에 손이 닿았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내 집 앞을 가리고 있는 이 집에서 보는 서울 풍경을 말이다. 나는 최대한 조용하게 손으로 암막커튼을 살짝 걷으려 했다. 살짝 들어 올려진 틈새 사이로만 봐도 족한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커튼이 아니라 숫제 벽이라도 해도 될 정도로 두꺼운 커튼이었다. 내가 당황하여 힘을 주자, 삐그덕 소리를 내며 커튼이 조금 움직였다.
쾅!
손으로 세게 건반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손대지 마! 커튼에 손대지 말라고!"
노인이 질러대는 비명에 나는 걷으려던 커튼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노인을 돌아봤을 때, 노인은 분노와 공포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노인의 눈은 나를 책망하고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어떻게 할 수 있냐는 듯이 말이다.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저는 그저 여기가……."
하지만 노인은 피아노에서 일어나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팔을 잡아끌었다. 방금까지 몸도 못 가눌 것 같던 노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강한 손아귀 힘이었다. 나는 종잇장처럼 끌려갔다.
"꺼져, 여기서 나가라고."
노인은 나를 밖으로 내보냈다. 등을 찔러대는 손이 몹시도 매서웠다. 문이 쾅 닫히고 황당함이 가시자 망연자실했다. 결국 지난밤의 곡은 실마리도 찾지 못한 것이다. 노인에게서는 대가 다운 품격이나 실력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피아노를 치는 사람은 좋은 연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연주는 작은 버릇 하나에서도 그 깊이를 볼 수 있으니까. 순간 나는 혹시 노인의 아들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친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노인의 방 사진 속에 있던 그 사람 말이다. 간 밤에 폭풍 같은 연주를 아버지 앞에서 연주하고 훌쩍 떠난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런데 그 정도의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내가 모르는 게 말이 될까?
또 하나 의문이 있었다. 어째서 노인은 그토록 커튼을 걷는 걸 싫어하는 걸까? 빛을 좀처럼 싫어한다던가 해도, 노인이 보인 반응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그건 흡사 고문을 받은 사람이 보이는 병적인 현상과도 같았다. 순간 보았던 노인의 겁에 질린 근육과 절망에 빠진 눈이 기억났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잠시 파란색 문 앞에서 서성였다. 잠시 동안, 나는 노인이 자고 있는 사이 집 앞 노인의 창문으로 대담하게 넘어가 악보를 훔치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문의 반대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노인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마 바닥에 주저앉은 듯했다. 노인의 흐느낌은 짐승의 그것과도 같았다. 나는 이 영문 모를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의 파멸이 시작되었다. 나는 측은지심이건, 피스에 대한 욕심이건 간에 노인의 집에 다시 방문하면 안 되었다. 나는 그냥 미친 노인네 취급하면서 계단을 내려왔어야 했던 것이다. 아마 그랬다면, 내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도 순탄하게 흘러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마저 얼마나 값진 일이었는가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노인의 흐느낌을 들은 순간 내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단순히 정신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노인네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편집증이나 자폐 같은 증상 말이다. 그렇다면 노인이 커튼에 보인 그런 광적인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노인의 상태를 적절하게 이용하기만 한다면, 어쩌면 그 곡에 대한 정보를 캐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노인의 방문을 다시 두드렸다.
노인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노인은 마치 좋아서 실성한 듯 보였다. 나를 끌어안기도 하고, 어서 앉으라고 소파를 치워주기도 했다. 그리곤 기분을 좋게 해 준다고 불쾌한 피아노나 치대더니, 혼자서 깔깔깔 웃어대는 것이 아닌가.
"내가 기쁘게 하는 법을 안다고. 암 알고 말고."
노인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여댔다.
그 뒤로도 노인의 집에 꾸준히 방문했다. 거의 하루에 한 번은 방문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저녁에 알바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보다 노인의 집에 먼저 방문했다. 노인은 언제나 소름 끼치는 웃음으로 나를 맞았고, 나는 노인이 치는 어설픈 피아노를 들으며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정말로 안 뒤져본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노인이 피아노를 치지 않는 틈을 타 피아노 뚜껑을 열어 안쪽을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어느 곳에도 악보는커녕 음악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까지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면 목적을 밝히고 물어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것이 2주가량 지났을 때였다. 나는 조급했다. 노인의 집을 뒤지면 뒤질수록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느껴졌다. 노인의 집에는 분명 아무도 들고나지 않는 것 같은데 노인의 개인 물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저쪽 서랍의 한 구석에서 주민등록증을 찾았지만, 나보다 서너 살 많은 어떤 젊은 사람의, 그러니까 잠정적으로 노인의 아들로 보이는 사람의 것이었다. 가구도 분명 낡아 보이긴 했지만 채 몇 년 되지 않은 싸구려 제품들이었다. 탄탄한 몸에나 어울릴 것 같은 연미복이나 정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노인이 피아노를 치는 사이사이에 하는 불길한 이야기 때문에 노인의 집에 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노인은 가끔 내가 집에 있지 않은 듯이 행동했는데, 필시 혼자 있을때는 더욱더 그런 말들을 잘 지껄이는 듯 했다. 내 눈치를 보면서 슬그머니 입을 닫으니까 말이다. 노인이 하는 이야기는 이런 식이었다.
"아냐......이건 너무 불공평하다고."
"그 분이 항상 지켜보고 있어. 아주 가까이서 말이야."
"사과나무 하나, 고양이의 한숨 하나......"
"어둡고 너무 어두운 곳에 그 분이 있어."
"살려줘... 제발..."
노인이 하는 말은 나에게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인이 말하는 '그 분'이라는 존재는 내 신경을 긁어대기 충분했다. 노인은 그 단어를 말할 때마다 목을 움츠린 채로 주위를 둘러보며 마치 '그분'이 들을 수도 있다는 듯 반응했다. 불쾌한 광경이었다.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지쳐갔다. 하지만 노인에게 그 연주의 악보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노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커튼 때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어떤 이상한 편집증 적인 반응을 보일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가는 아무런 소득 없이 허송세월 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기다렸다.
그날 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노인의 알 수 없는 말과 찾을 수 없는 악보 때문에 잔뜩 긴장된 신경을 진정시키고 겨우 잠에 들었을 때였다. 빗소리가 들리자 정신이 또렷해졌다. 시계는 2시를 조금 넘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공기가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는 장대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쓸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쏟아지는 비가 때리는 피부의 아픔만큼 빗소리가 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한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것마저 괜찮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는 노인의 피아노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노인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상한 대로, 피아노를 치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몇 개의 음정으로 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서정적인 곡이었다. 아니, 여하튼 그렇게 시작한 것처럼 들렸다. 나는 노인의 집 쪽으로 귀를 기울여 피아노 소리를 확인하자마자 옥탑방에서 뛰쳐 내려가 눈 깜짝할 새에 노인의 방문 앞에 섰다.
아까와는 또 다른 멜로디가 노인의 방문 너머로 들렸다. 나는 잠시 멈추어 서서 망설였다. 내 정신은 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진실을 확인하라고 말이다. 저기 방 문 너머에 있는 노인이 정말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치고 있는지를 확인하라고, 그리고 그 행운을 붙잡으라고 말이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을 밀쳐내고 악보를 집어서 나와도 된다. 필요하다면 몰래 녹음을 해도 좋으리라.
하지만 내 몸이 쉽게 따라주지 못했다. 노인의 집에서 느꼈던 그 꺼림칙한 느낌이 전에 없이 강하게 들었다. 노인의 방문 앞에 서자마자 식은땀이 났다.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절대 열지 말라고, 돌아가라고. 하지만 파멸할 길이 있으면 그 길로 똑바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 인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노인의 방문을 열었다. 문은 열려있었다.
노인의 방은 전과 같이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는데, 마치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이 말이다. 형광등이 바람에 흔들릴 수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나는 다만 고개를 돌려 노인을 찾았다. 저쪽 벽에 피아노 앞에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전에 없이 아름답고 훌륭한 멜로디가 피아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멜로디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조하는 선율도 완벽에 가까웠다.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전부 피아노 속으로 들어갔다고 했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소리였다. 절대 노인이 평소에 들려주었던 그런 허섭한 피아노가 아니었다. 아마 전 세계를 통틀어도 이 노인과 같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노인은 내가 문을 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피아노를 쳤다. 나는 굳이 노인을 부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필요하다면 노인이 보고 있는 악보를 가져가면 된다는 계획이 내 심장을 마구 두근거리게 했다. 나는 노인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노인은 얇은 메리야스에 낡은 트렁크만 입은 상태였다. 이미 흘린 땀으로 속옷이 모두 젖아 창백한 빛으로 피부에 붙은 옷감이 도드라져 보였다. 노인은 어느 때 보다도 작아 보였는데, 그에 비해 피아노 건반 위를 달리는 손은 그 어느 때 보다 빨랐다.
노인의 뒤로 다가간 나는 노인이 뿜어대는 열기에 깜짝 놀랐다. 작은 난로가 앞에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가까이서 보니, 노인의 몸은 쉴 새 없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마치 간질 환자 같이 말이다. 심지어 노인은 건반을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푹 떨궈진 얼굴을 타고 진득한 땀이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노인의 손만 건반 위를 질주하고 있었다.
당연히 피아노 악보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노인의 피아노에 전율하면서도,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아! 단순히 노인의 변덕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 노인의 저 천재적임을 보라고. 평범한 사람은 알 수 없는 노인의 기믹이 그를 깨우면, 노인은 불후의 천재가 되어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올라 평소라면 노인의 집에서 절대로 하지 않을 만한 행동을 했다. 바로 커튼을 걷어보는 것 말이다. 커튼에 손만 닿아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노인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두꺼운 커튼을 잡아 이상한 희열을 느끼며 잡아 젖혔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 너머에는 끝없는 공허만 있었다. 나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의 헤드라이트도, 가로등에 비친 물빛도, 희뿌옇게 보이는 달도 없었다. 까만색 안개가 있다면 노인의 창문에 잔뜩 흩뿌려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안개보다 훨씬 더 암울하고, 기괴하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물질이 노인의 창문을 온통 막아놓았다.
나는 노인의 창문 밖의 그곳이 아예 전혀 다른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필시 노인의 방문 앞에서 나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그 감각이 말해준 것이리라. 평범한 사람이라면 절대 닿아서는 안 되는 비틀린 공간이었다. 나를 포함한 평범한 인간은, 그리고 저 불쌍한 인간도 한 순간에 미치게 만드는 그런 공간 말이다. 나는 감히 그 공허 속으로 손도 넣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마치 공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짐승이라도 되는 듯이.
그곳을 지옥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선악을 너머선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 세계가 시간마저 초월했을 것이라 믿는다. 단순히 인간의 나약한 인식체계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자연의 법칙조차 그 세계 앞에서는 고개를 조아린다. 떨어지는 빗방울이 숨을 멈춘다. 빛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돌린다. 시간은 뒷걸음질을 친다.
창문에서 떨어져 뒷걸음질 치다 벽에 등이 부딪치자 첫 번째로 든 생각은 도망이었다. 이 저주받을 집에서 나는 나가야 했다. 나는 벽 옆의 문을 미친 듯이 잡아당기고, 문고리를 발로 차고, 몸으로 문을 부술기세로 쳐보았지만 파란색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명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문 위로 쏟아지는 그림자가 내 몸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에 일렁였다.
그때까지도 노인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나는 애써 창문 너머의 공허를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노인에게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어서 나를 여기서 내보내닫라고 말이다. 아무래도 괜찮았다. 노인이 사기꾼이건 아니건, 악보를 갖고 있건 없건 상관없었다. 빌어먹을 연주를 마치고 나를 나가게 해 달라고. 제발 나를 살려달라고 말이다. 나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노인의 옆으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노인은 보기 흉측할 만큼 쪼그라들어 있었다. 이제 노인은 땀도 흘리지 않았다. 흡사 미라를 보는 것 같았다. 머리는 흉하게 빠져버렸고, 등으로 척추가 흉측하게 튀어나왔다. 피부가 거뭇거뭇한 것이 시체의 그것이었다. 팔은 앙상한 것이 가느다란 나뭇가지와 같았다. 하지만 그 나뭇가지는 전과 다름없이 건반 위를 달렸다.
나는 그 순간 노인이 무언가를 웅얼거리는 것을 보았다. 피아노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는 않았고, 처음에는 그것이 노인이 겪는 경련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노인은 분명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최후의 탈출 방법이라고 있을까 하여 노인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노인은 마치 내가 노인의 말을 듣는 것을 안다는 듯 조용하고 서정적인 음률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노인이 하는 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피아노 소리가 충분히 작아지면 가끔씩 노인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발...... 저를 놔주세요....... 여기 새로운 제물이...... 저는 아직 너무 젊습니다......."
노인은 계속해서 반복했다.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나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몰라 몸이 굳어버렸다. 그 새로운 제물이라는 것이 나를 의미한다는 사실조차 그 당시에는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시시각각으로 쪼그라들어가는 노인을 보며 공포에 질려있을 뿐이었다. 다만 이 노인이 치는 피아노가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바쳐 친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신의 피와 생명을 바친 피아노 말이다. 그 누구도 그런 종류의 피아노를 칠 수 없다. 이런 방식의 연주는.
그때, 불현듯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노인이 피아노를 멈춘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장작이 모두 타버렸다고 말하는 게 옳겠다. 가장 작은 심지 마저도 몽땅 타버린 것이다. 노인은 잠시 후에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는데, 그다지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치 가벼운 스카프가 바닥에 떨어진 것 같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노인은 잠시 후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피아노 소리가 사라지자 정적이 흘렀다. 저 밖에 내리고 있을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방 안을 가득 메운 정적이 나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성난 관객을 보라! 그들은 연주를 원한다. 금방이라도 나를 찢어 죽일 듯하다. 하지만 그 관객은 어디 있단 말인가?
알 수 없는 힘이 내 시선을 창문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것에 저항하지도 못했을뿐더러, 눈을 질끈 감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내 눈이 그 창문의 공허를 다시 담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허 너머로 그들을 보았다. 잠자고 있는 끔찍한 신이자 괴물, 악몽을. 그리고 그 주위에서 끊임없이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저주받은 괴물 무희들을 말이다.
나는 그 순간 내가 해야할 것을 알았다. 나는 방금 전까지 노인이 앉아있던 의자에 앉았다. 이제 신경은 나의 통제에 따르지 않았다. 인간의 인지를 아득히 뛰어넘는 법칙이 내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는 찢어질 것 같이 시끄러운 침묵 속에서 내 손이 만드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되었다. 한 음 한 음을 누를 때 마다 손가락이 찢어질 듯 했다. 아마 망치로 직접 내리쳤다고 해도 이렇게 세게 칠 수 는 없으리라. 하지만 연주되는 음악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나는 노인의 음악을 이어 받고 있었다. 마치 노인이 쓰러지고 내가 앉기까지의 모든 일들 조차 하나의 음악이었다는 듯이. 아무일도 없는듯이.
언제 내가 연주를 시작했는지, 연주는 또한 어떻게 끝났는지 나는 전혀 기억할 수 없다. 내 불행한 무의식은 공허와 공허속의 그 끔찍한 주인들과 얽혀들었다. 인간의 가장 큰 무의식, 가장 거대한 상상력조차 담을 수 없는 그것들을 말이다. 나는 의식이 필사적으로 잊으려고 하는 그것들이 내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 언제든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나, 비가 세차게 내리는 그 어느때나 나를 연주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노인의 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문이 툭, 하고 쉽게 열렸다. 내가 정신을 차린 뒤의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언덕길이 유난히 힘들었다. 평소엔 몇 분이면 가는 거리를 몇 시간 씩이나 걸려 도착한 나는 거울에 놓인 낯선이의 모습을 보았다. 분명 내 모습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다. 고통스럽게 십년은 늙어버린 중년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대로 졸도했다.
나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든 방법을 모두 시도했다. 끔찍한 운명을 피하기 위한 노력들 말이다. 하지만 역시 모두 실패했다. 약에 취하던, 지하로 도망가던, 차를 타고 도망치던, 자살을 하려하던 모두 상관 없었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나는 그 노인의 집-이제 노인이 아니지, 뭐로 불러야 할까-으로 달려갔다. 그때가 되면, 모든것이 달라졌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더라도, 어떠한 불가능한 상황이라도 그들이 부르는 소리, 빗소리는 어김없이 나를 불렀다. 아니, 내리기 전부터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집으로가서, 몇 시간이고 광기어린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나면 바로 몇 시간 전보다 십 수년은 늙은 것 같은 노인이 거울앞에 있다.
이제 마지막 방법만 남았다. 이미 나는 늙을대로 늙어버렸다. 이제 거울에는 쭈글쭈글한 할아버지가 서있다. 그때의 그 노인과 비슷해보였다. 아마 다음 빗소리를 넘기지 못할게 분명했다. 해외로는 가지 못한다. 이미 여권안의 내 사진과 나는 손자라고 믿을 법한 차이가 생겼으니까. 그래서 나는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택했다. 아무도 없는 오후 비행기는 기이하리만치 쌌다. 나는 대충 짐을 챙겨들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구름 위를 날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이 소용이 있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렇게 까지 하면 나를 놓아주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새로운 희생양을 삼아 나를 놓아주지 않을까 말이다. 나는 이미 서울의 그 방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왔다. 차라리 새로운 사람을 찾으라고! 나한테 그랬던 것 처럼. 그래, 나는 너무 젊어, 죽기에는 너무 젋다고.
나는 눈을 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좀 편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비행기 안도 평안했다. 아까의 요동침은 간데 없었다. 아마 구름위를 날고 있으리라. 아무도 없었고, 조용했다. 덜그럭 거리면서 지나가는 승무원도 없었다. 오직 나만있었다. 나는 이 침묵을 즐겼다. 피아노는 지긋지긋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터빈 소리가 차라리 듣기 좋을 것이다.
나는 비행기 터빈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너무 조용하다. 나는 터빈 소리를 들어보려 애썼지만 터빈소리는 마치 땅에서 들리는 듯 멀리서 들린다. 마치 그때 처럼.
나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내려본다. 밖에는 깜깜한 어둠이 내려있다. 대낮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저 깜깜한 장막 사이로 이제 그 붉은 벽돌 옥탑방과 암막 커튼이 쳐진 창문이 보인다. 아, 그들이 왔다.
그 분들이!
그림 Lucio Fontana/Concetto spaziale, Att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