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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Feb 19. 2020

떨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사과씨가 눈을 떴을때, 세상 모든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큰 돌, 작은 돌, 옷가지와 컨테이너 박스, 자동차들, 축구공, 유리컵, 빵 쪼가리, 쓰레기통, 사람들, 먼지, 햄버거가 땅으로부터 멀어졌다. 마치 지금까지 땅으로 향하던게 지겨웠다는 듯이. 머리를 정확하게 겨냥하는 빨간색 벽돌을 피하면서, 사과씨는 큰 빌딩이 공중에서 서로 부딫쳐 박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부서진 잔해 사이로 강물이 폭포수 처럼 쏟아져 내렸다. 자동차들이 유성이라도 되는 것 처럼 공기를 달렸다. 지하철은 맥아리 없는 지렁이마냥 무기력하게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온갖 종류의 음료수 캔들과 병이 바람에 실려 떠다녔다.

    물론 사과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과씨의 볼을 스치는 이 바람은 살이 아리도록 거셌다. 하지만 사과씨는 막 자살한 참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마냥 신기하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처음에 사과씨는 성공적으로 죽음을 맞이한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반사적으로 버둥거리는 사과씨의 두 발과 앞쪽으로 쓰러진 의자가 다였으니까.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하면 주마등이 보인다고 하던데, 사과씨의 경우엔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냥 목이 좀 아프고, 시야가 흐려지면서 점차 어두워졌다. 발버둥 칠 힘도 나지 않았다. 깊은 무기력. 그게 사과씨의 끝이었다. 

    그래서 떨어진 이후로 처음 눈을 뜨고 몇 분 동안 사과씨는 적당히 환호했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사후세계가 그 어떤 종교에서 말하는 것과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날개 달린 천사도, 자살한 사람을 잡아먹는 끔찍한 사탄도, 억겁의 윤회도 없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세계! 예수. 당신은 틀린 거야. 영혼은 이렇게 땅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하지만 기묘한 승리감도 잠시, 사과씨는 이건 그저 세상의 변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밧줄에 쓸린 목이 너무 아팠고, 목을 매었던 나무가 사과씨와 함께 떨어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영혼이 어디론가 가는 것 치고는 너무 품위 없지 않은가.

    사과씨의 목에는 여전히 두꺼운 올가미가 매여 있었고, 올가미의 다른 한쪽 끝은 나무의 굵은 가지에 연결되어 있었다. 현실감 넘치는 광경이었다. 나무에 매어진 매듭을 보고 있자니 사과씨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보니 마치 나무가 자살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그 나무 역시 정말로 자살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 앙상한 나뭇가지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도심 속에서 다른 나무들의 텃세에 밀려 제대로 된 뿌리조차 내리지 못했으리라. 사과씨는 나무에 묘한 동질감이 느꼈다. 사과씨는 한차례 공기와 씨름하다 어렵사리 나무 꼭대기의 가지에 올라탔다. 물론 같은 속도로 떨어지고 있어서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앉으니 뭔가 편한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사과씨의 백팩에는 미니어처 스니커즈와 코카콜라가 들어있었다. 생을 마감하기에 김밥과 생수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니 여행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김밥이라니. 목이 막히기라도 기대해야 한단 말인가? 사과씨는 가지의 꼭대기에서 백팩을 열고, 공중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스니커즈를 하나 잡아서 먹었다. 쓰레기는 그대로 공중에 흘렸다. 누가 어쩔 것인가. 버리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렇게 뒤집힌 세상에는 말이다.    

    사과씨는 위쪽으로 끝없이 멀어지는 스니커즈 포장지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저기서는 사람 몸 만한 돌무더기가 떨어지고 있었고, 나무가 몇 그루 더 보였다. 개울물은 이제 거의 흰 구름같이 작고 하얗게 갈라져서 도저히 물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저 멀리를 살펴보니 뭔가 빨간색 점 하나가 떠다니고 있었다.


    사과씨는 그 빨간 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건 언듯 보면 포장지에 반사된 빛 같아 보이기도 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사과씨는 그 빨간 점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사과씨는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일단 시간이 꽤 흐르자 심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사람이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그 빨간 점도 사과씨를 발견했는지, 그를 향해 날아왔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몸을 기우뚱하더니 차근차근 사과씨가 앉아있는 나무에 가까워졌다. 꽤나 능숙하게 공기 중을 헤엄치는 것이, 꽤 오랜 시간 그렇게 다녀 헤엄치는 것이 몸에 익은 듯했다. 사과씨는 가까워지는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쳐가듯 나무의 밑동을 움켜잡은 여자는 천천히 사과씨가 앉은 꼭대기 나뭇가지까지 올라왔다. 

    여자는 나무 꼭대기에 사과씨처럼 앉더니, 사과씨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설명하라는 눈초리였다. 사과씨는 여자의 예상치 못한 무언의 질문에 당황했다. 사과씨는 이런 여자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렇게 뒤집힌 세상에서 여자와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을 때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사과씨는 당최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과씨는 백팩을 뒤적거려 코카콜라 한 캔을 그녀에게 건네었다. 자살하기 전 지갑을 털어 산 콜라였다. 여자는 캔을 무슨 위험한 물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위험한 사람 같지는 않네요."

    물이 매끄러운 표면에 구르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코카콜라 캔을 따서 한 모금에 다 마셨다. 사과씨는 일생동안 그토록 호쾌하게 코카콜라를 마시는 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펩시가 아니라 코카콜라여서 더욱 임팩트 있어 보이는 것일 수 도 있다. 아니면 이 끝없이 떨어지는 세상에서는 이런게 멋져 보이는 것일 수도.

    "로즈예요."

     그녀는 빈 캔을 공중으로 던져버리며 사과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캔은 눈 깜짝할 새에 작은 점이 되어 날아갔다. 사과씨는 얼떨결에 악수를 받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로즈는 사과씨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코카콜라라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태연하게 줄 생각을 하다니. 하긴 이 와중에 제정신인 게 더 이상하려나."

    사과씨는 로즈를 쳐다보았다. 신기하게도 빨간색 드레스는 바람에 그다지 흩날리지도 않았다. 가벼운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어떤 여자들은 그런 것 마저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하지 않을 때 치마를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 말이다. 사과씨는 속으로 감탄했다.

    로즈는 속으로 부터 올라오는 트름을 조금 참다가 끄억 하고 뱉어버렸다. 이상하게 그런 소리는 귀를 스치는 바람에도 또렷하게 들린다. 사과씨는 흠칫 놀랐지만, 로즈는 그런 걸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대신 배가 뒤집어져라-그녀는 웃으며 공중에 붕 떴다- 웃었다. 실수로 밟는 지뢰같은 웃음만 남은 뒤에야 로즈가 사과씨에게 말을 걸었다.

    "이상하게 기분 좋네요."

    로즈는 거꾸로 매달린 해를 쳐다보며 말했다. 구름 저 아래 해가 빛나고 있었다. 해는 어항에 가져다 놓은 작은 전구 같았다.

    "제 남자친구는 지금 저기서 죽어가고 있거든요."

    로즈는 검지로 저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떨어지고 있었다. 자동차 같은 것들 말이다. 멀리서 보니 그것들은 파리같아보였다. 그리고 파리 떼 사이를 빠른 속도로 컨테이너 박스 하나가 뚫고 지나갔다. 차들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졌다.

    "떨어지기 시작한 이래로 남자친구는 계속 차 안에만 있었어요."

    사과씨는 죽어가고 있는 남자와 자동차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로즈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로 했다.

    "그땐 분명히 무슨 멍청한 파티 같은데를 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그런 모임들 있잖아요. 무슨 정보를 교환한다나, 인맥을 쌓는다거나 하는 거 말이에요. 그런데에 꼬박꼬박 참석해서 지나치게 가식을 떤 다는 점만 빼면 똑똑하고 멋진 남자였죠.  뭐랄까, 보기에 완벽한 남자 있잖아요. 같이 있으면 만족스러운. 이 사회에 완벽하게 뿌리를 잘 내린 사람. 자신감 있고 능력있는. 그런데 갑자기 차가 붕 뜨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떨어지기 시작한거에요."

    사과씨는 로즈가 하는 말을 멍청하게 듣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별 대신 이제 사과만해진 땅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땅 덩어리 옆으로 홍시처럼 빨개진 해가 잠깐 반짝하고 사라졌다. 발 아래 구름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밤이 다가고오고 있었다. 뒤집힌 세상에서의 첫 밤이.

    "그 뒤로는 계속 그랬어요. 한마디로 미쳐버린거죠. 지금도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덜덜 떨고 있을걸요. 하루 정도 기다려도 계속 그 상태길래 일단 차를 뛰쳐나왔죠."

    사과씨는 빨간색 페라리의 핸들에 얼굴을 박고 떨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를 떠올렸다. 딱히 페라리일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페달을 힘껏 밟아 보지만 타이어는 공기만 가를 뿐인 딱한 자동차를 말이다. 남자는 적어도 춥지는 않겠구나.

    "그렇게 몇 시간이나 떠 다녔는지 몰라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죽어 있었고. 자살한 사람들이 제일 많고, 뭔가에 짓눌려 죽은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미쳐있거나. 별 선택지가 없었죠. 그러다 당신을 만난거에요."

    로즈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별똥별 하나가 로즈의 발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로즈는 다리를 꼬더니 사과씨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정신인 사람 말이에요."

    사과씨는 로즈의 말에 벙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제정신이라고? 사과씨는 그 말에 뜨끔하여 목에 아직도 걸려 있는 올가미를 한 손으로 쓸어만졌다. 다시금 느껴보니 올가미에 쓸린 자국이 아프다. 제정신이라니. 그리고 사과씨는 자신이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던 순간들을 떠올려보려 했다. 올가미에 목을 걸게 만든 사건들을 쭉 돌이켜 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죽으려는 이유를 서술하시오'라는 답안에 실수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기 책상에 제대로 빼곡하게 쓴 답안지가 덩그러니 있는데. 사과씨는 당황하여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로즈는 그런 사과씨를 가로 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말했다.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는 거에요? 설마 이런 순간에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거에요?"

    로즈는 자신의 말에 폭소를 터트렸다. 로즈의 높고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바람소리를 헤치고 사과씨의 귀에 꽃혔다. 사과씨는 로즈의 갑작스런 폭소에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즈는 이제 숫제 배를 부여잡고 나뭇가지 위를 구르는 중이었다. 순간 사과씨의 머릿속에서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가 모두 웃음소리와 함께 씻겨 나갔다. 시험장에 큰 해일이 덮친것 처럼 말이다. 죽음은 이제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저기 위에 보이는 땅으로 날아갔다. 이제 그 빈자리를 로즈의 웃음소리가 채웠다.

    사과씨는 그 순간 자신이 로즈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집힌 세상에서는 사랑도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난 죽으려고 한걸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지만-웃음소리를 들으며 사과씨는 생각했다. 모든게 하찮게 느껴졌다. 자신의 죽음도, 그리고 모든게 뒤집혀 떨어지는 세상도. 그리고 지금이 고백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라는 것도.

    로즈가 아직도 산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에 힘겨워하고 있을 때, 사과씨는 갑자기 나무가지 위에서 일어나 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눈 깜짝할 새의 일이었다. 이미 밤이 어두워진 상태여서, 사과씨가 나뭇가지에서 멀어지기 무섭게 어둠이 사과씨를 삼켰다. 발 아래 비치는 은은한 달빛으론 사과씨를 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로즈는 깜짝놀라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사과씨가 없어진 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못 다한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이었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바람 소리 마저 숨을 죽였다. 잠시 후, 나뭇가지에 매단 줄이 팽팽해지더니 사과씨가 다시 돌아왔다. 목에 걸린 올가미를 잡고 말이다. 물론 공중을 올가미에 의지해 헤엄쳐 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한 손으로 그것을 하자면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사과씨의 다른 한쪽 손에는 와인병이 있었다. 희미한 달빛으로는 무슨 와인인지 조차 알 수 없었지만. 

    사과씨가 로즈에게 와인을 건네었을때, 로즈의 표정이 어떠했는지는 사과씨는 잘 알 수 없었다. 달이 밝긴했으나 얼굴의 행간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사과씨가 보기에 로즈는 마법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면 마법같은 달빛이 로즈의 얼굴을 그렇게 보이게 만든 것일 수 도 있다. 혹은 원래 로즈의 얼굴이 마법같을 수도 있다. 하긴 세상이 떨어지고 있는 지금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다.

    다행인건 와인이 코르크 마개가 아닌 스크류 캡이라는 점이었다. 로즈는 코카콜라를 마실 때 처럼 주저없이 병 모가지를 비틀어 뚜껑을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달빛이 와인 병 위에서 글리산도로 연주되는 것 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와인이 로즈의 목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바람과 뒤섞여 이상할 정도로 듣기 좋은 화음을 만들었다. 로즈는 단 한 번에 절반이나 되는 와인을 먹어치웠다.  

    로즈는 사과씨를 힐끔 바라보고서 반쯤 남은 와인병을 사과씨에게 건넸다. 사과씨는 어색하게 병을 집어들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와인에서는 떫고 신 맛이 났다. 목구멍을 넘어간 뒤 입안이 텁텁했다. 사과씨의 목구멍은 그런 감각에 익숙치 않았고, 덕분에 사레가 들렸다. 사과씨가 콜록거리는 사이, 로즈는 와인을 사과씨에게서 빼앗았다.

    로즈는 빼앗아 든 와인병을 거꾸로 쳐들었다. 와인은 병을 나오기 무섭게 방울방울 부서져 땅으로 날아갔다. 와인 방울은 발 아래 달빛에 연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방울 하나 하나가 거대한 별이라 적색편이를 일으키는 것 같았다. 빠르게 떨어지는 벽돌들과 먼지들, 플라스틱 쪼가리들 사이에서, 멀어지는 별 조각과 발 아래 빛나는 달 사이에서 사과씨는 왠지 모를 완벽함을 느꼈다. 모든게 떨어지는 이 상황에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과씨가 로즈에게 키스를 한 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리라. 키스는 완벽했다. 완벽한 키스였다. 아마 모든게 떨어지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이렇게 완벽한 키스는 불가능했으리라. 키스는 숫자로 셀 수 있는 시간들과, 그 시간들 사이를 영원히 쪼개는 만큼의 긴 시간동안 이어졌다. 둘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4개의 눈동자가 세상을 담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네 눈동자는 저 아래 달 보다 밝았다.

    사과씨는 목에 감긴 올가미를 더듬거리다가, 용케도 잘 매듭을 끌러내었다. 그리곤 하늘로 올가미를 던졌다. 올가미는 얇은 실지렁이 같은 형체마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강렬한 삶의 의지가 사과씨의 마음 한 켠에서 타올랐다. 그 동안 사과씨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강렬한 감정이었다. 왠지 모르게 사과씨는 오래전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죽는게 두려운게 아니야. 살 수 없는게 무서운 거지.」

    하지만 모든게 떨어지는 지금, 그 말을 이렇게 바뀌어야 했다.

    "사는게 두려운게 아니에요, 죽을 수 없는게 무서운거지."

    사과씨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그런 말들은 실수로 떨어진 별똥별같다. 신의 섭리나, 세상의 규칙에서 실수로 삐져나온 작은 조각들 말이다. 그리고 그 별똥별은 로즈의 머리로 떨어졌다. 로즈가 사과씨의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껏 보지 못한 환한 미소, 지금까지 로즈가 지었던 모든 미소와 표정들, 웃음을 하찮게 많드는 미소가 로즈의 얼굴에 걸렸다. 

    로즈는 자신의 핸드백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잠시 뒤적거리더니 공중으로 던져버렸다. 아까 날아간 캔처럼,  와인처럼, 올가미 처럼 순식간에 공중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자세히 볼 시간은 없었지만, 사과씨가 조금 덜 로즈에게 집중했다면, 그것이 한 움큼이나 되는 빨간색 알약들이었고, 조금 더 시력이 좋았다면 그 알약 겉에 씌여진 '암페타민'이란 글자까지 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사과씨에게는 찰나의 순간이었고, 게다가 그런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영원같은 키스를 할 차례였다.


그리고 순간 우주에는 오직 사과씨와 로즈, 둘 만 존재했다. 떨어지는 모든 것의 축복을 받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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