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그 처음 시작에 나는 짐승처럼 울었다.
울음이 터진 건 폐쇄된 학교 뒷산 산책로에서였다. 관리가 안된 산책로는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껏 마른 낙엽에선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부스럭 소리가 났다. 저 멀리에서는 사람들이 떠들고, 웃고, 바글대는 소리가 이 세상 마지막 소리인 것처럼 울렸다. 산책로 중간에는 낙엽과 먼지가 수북이 쌓인 벤치가 있었다. 그 벤치는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사용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낙엽을 채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얇은 청바지와 낙엽을 뚫고 송곳 같은 차가움이 금세 전해졌다. 하지만 별로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막 입학원서를 내고 나오는 길이었다. 대학원 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떻게 교수랑 협상하면 좋다느니, 어떤 느낌을 줘야 한다던지 하는 케케묵은 헛소리들은 교수 앞에 앉자마자 먼지처럼 흩어졌다. 나는 줄곧 침묵했다. 막상 말을 해야 할 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반면에 교수는 의미 없고 책임지지 못할 말을 뱉고 있었다. 아마 그가 즐겨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리라. 많은 말로 상대방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 것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모두 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부 연구생으로 한 학기 정도 있으면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벤치 앉자마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눈물을 닦은 소매가 차가운 공기에 살짝 얼어붙으려고 할 때즘,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우-어우 하는 소리였다. 나는 이렇게 울 줄도 알았던 것이다. 짐승처럼 어우-어우 하며 말이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더 혼란스러운 건 내가 왜 혼란스러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다. 중력이 사라지고 모든 게 빙글빙글 돌았다. 낙엽이, 앙상한 나무가, 저기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건물들이, 내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개념들도 주위 물체와는 다른 방향으로 돌았다. 그 중심에서 나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그 혼란 휩쓸릴까 무서워 몸을 앞으로 숙여 거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짐승처럼 울었다.
그 날은 입학원서를 제출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입학원서를 제출하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애당초 원서를 제출하는 게 까다로울 리가 없다. 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마음을 정하는 일이었다. 학부 연구생으로 한 학기나 있으면서 나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아니, 나는 선택에 대해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회피하는 것 말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그리고 그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가면 뚜렷한 수가 생기지 않을까 하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제3의 해결책이 갑자기 팟!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하며. 결국 제출까지 2시간 정도 남았을 때,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올라와보라고 말이다. 올 것이 왔군-이란 생각이 들었다. 올라가자 교수는 대뜸 '석박사 통합과정'을 제안하였다. 그게 좋을 것 같단다. 일반 석사-박사 과정보다 일찍 끝낼 수 있고, 학비도 조금 덜 낼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런 시간 자체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5년이니, 6년이니, 포닥(Post doctor)이니 하는 이야기 말이다.
교수의 설명을 듣는 내내 조금의 사고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내 판단을 교수에게 맡겨버리고 말았다. 대학 4학년의 나는 그 정도로 무기력했다. 그동안 한 번도 내 커리어란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갈대였다. 억세게 자랄 줄만 알지 바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줄만 아는 갈대 말이다. 그동안 나는 열심히 살 줄만 알았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몰라서 무기력했고, 무기력해서 두려웠다.
무기력함과 두려움. 그리고 그게 4학년 내내 어둠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공황의 정체였다. 밤 깊은 새벽에 식은땀과 함께 발작하듯 잠에서 깨면, 침대 주위에 유독 까맣게 내린 어둠이 나를 옥죄어왔다. 가만히 들어보면 어둠은 뭐라고 속삭이는 듯했으나, 나는 귀를 막고 듣지 않았다. 만약 어둠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잘 들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짐승처럼 울 일은 없었으리라. 나는 어둠을 한껏 무시하고,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려 잠을 청할 뿐이었다.
가지고 올라간 노트북으로 교수와 함께 원서를 제출하면서 나는 계속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은 이제 교수의 모습으로 저기 건너편에 있었다. 교수는 계속해서 원서에 이걸 써라, 저걸 써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과정 선택란을-석박사 통합과정에 체크했다. 원서를 내고, 접수비를 수납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접수 확인 메일이 통보되었다. 그게 내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메일을 확인하곤 몇 마디 덕담을 주고받은 뒤 교수 방을 나왔다. 교수 방을 나와선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하고 입으로 작게, 계속해서 되뇌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방금 내 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선택을 내리지 못했다. 원서를 작성하는 손은 내 것이었을 망정 선택은 위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려움이 실체를 가지고 나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나는 바보이자, 병신이자 머저리였다.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가 건물을 나왔다. 한 밤중에나 나를 덮쳤던 어둠이 대낮의 바로 지척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도저히 연구실로 돌아갈 생각이 들지 않아 건물 주위를 돌아다녔다. 두 세바뀌 건물을 의미 없이 돌다 보니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산책로가 나있었다. 나는 아무 이유 없이 그곳에 올라가서 짐승처럼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우는 걸 멈췄을 때, 거의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게 내 대학원 생활의 첫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