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by 엔데

여느 때와 다름없이 멍 때리며 카페에 앉아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 앞에 첼로 하나가 앉아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앉아 있었던 걸까 -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첼로가 말을 걸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선생님, 잠깐 간단한 설문 조사 하나만 가능하겠습니까?"

원래 나는 그런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리고 내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불쑥 앉을 정도로 무례한 치들이라면, 설문 조사를 거절한다고 해서 쉽사리 물러날 위인은 아니다. 나는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내가 작고 불분명한 소리로 긍정의 표시를 하자, 첼로는 반색하며 자신의 검은색 서류 가방에서 주섬주섬 서류를 꺼내기 시작했다.

"요즘엔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지 않아서 말입니다."

설문 조사 종이를 찾는 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지, 첼로가 자신의 무릎에 놓인 서류가방에 스크롤을 박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뭐 이상한 외판원 같이 오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별의별 오해를 다 사거든요."

첼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씩 웃었다. 그렇게 기분 좋아 보이는 웃음은 아니었다. 스크롤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 그건 그렇고, 저는 이런 곳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첼로가 건네 준 명함에는 '전국 현악기 보호 협회'라는 글자가 불안정한 음정처럼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알아볼 수조차 없는 작은 글자로 빼곡하게 무언가 적혀 있었다. 무어라고 쓰여 있는지 보려고 명함을 눈에 가까이 가져가는 순간, 첼로가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았다. 세 장 정도 되는 A4용지에 대략 서른 개 정도 되는 문제들이 눈에 띄었다. 연필로 조심스럽게 설문 조사를 시작하자, 첼로가 기분이 좋아진 듯 깨끗한 G 소리를 냈다. 몇 개 정도 되는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묻는 문항이 끝나자 본격적인 문항들이 나왔다.

-전국 현악기 보호 협회(이하 전기협)에 대해 들어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럴 리가. 그동안 나에게 말을 거는 첼로조차 보지 못했다. 그런데 하물며 그런 단체야. 이런 질문에 '예'를 받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길거리에서 명함이라도 돌려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아니오'에 동그라미를 치기가 무섭게, 첼로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저희 전기협은, 현악기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보호? 권익?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현악기들은 제대로 된 법의 보호 없이 매우 심하게 혹사당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들 있지 않습니까. 포르티시모라던지, 레가토 같은 것들 때문에 말입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저희는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고발하는 탄원서를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갑자기 첼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테이블이 예상보다 살짝 흔들렸다. 진짜로 감정이 실렸다기보다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한 것 같았다.

"아주 흉악한 일입니다! 지휘자라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포르테를 외칩니다. 현악기들이 받는 고통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장력 때문에 문자 그대로 허리가 휘는 고통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노리개가 아니란 말입니다!"

냉정함을 되찾았다는 '제스처'와 함께, 주먹이 살며시 펴지며 다시금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저희가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세 조건이었습니다. 물론 그 외에도 더 많지만 말입니다. 첫째, 한 악장당 포르테 이상의 음의 세기를 세 번을 초과하여 요구하지 말 것. 둘째, 피치카토는 반드시 피아노로 수행할 것. 셋째-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입니다- 레가토는 4마디 이상을 초과하지 말 것. 레가토를 할 때마다 얼마나 온몸이 저리는지 모릅니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처사입니까! 이런 악기에 대한 처우 개선은, 외국의 사례에서 보자면……."

그렇게 첼로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사실 이해는 잘 가지 않았다. 문장에 '인간적인'이라는 단어가 달리는 순간, 말이 지닌 모든 의미가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나는 무엇이 인간적인지도 잘 몰랐다. 첼로의 말은 내 머릿속에서 길을 잃었고, 덩달아 설문 조사도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을 잃은 펜은 설문 조사지 위에서 아무렇게나 돌아다녔다. 나는 아무 문항에나 '예'나 '아니오'를 체크했다. 그중에는 이해가 가는 문항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문항도 있었다.


-악기 스탠드에 충분한 공간-다른 악기와의 거리가 1m 이상-이 있습니까?

-1969년에 체결된 '6개월 이상 사용한 활에 대한 사용금지 명령'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십니까?

-통조림을 자주 드십니까?

-융은 1주일에 한 번씩 드라이 클리닝을 하고 계십니까?


혼미한 정신을 추슬러 대충 설문 조사를 끝내고 나니, 첼로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불분명한 의미가 담긴, 아니, 어느 정도는 사악한 의도가 담긴 눈빛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설문 조사지를 첼로에게 건네주었다. 손끝이 파르르 하고 떨리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그러고 나서 첼로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제법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투였다.

"요즘엔 정말로 선생님 같은 분들이 많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A4용지보다 조금 작아 보이는 책자를 내게 내밀었다. '현악기를 위하여'라는 제목이 투박한 바탕체로 쓰여 있고, 몇 가지 현악기의 사진이 어지럽게 박혀 있었다. 꽤 두꺼웠다. 나는 원자폭탄 스위치가 들어있는 상자를 옮기는 것처럼, 책자를 조심스럽고 신속하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건 저희 전기협에서 발행하는 정기 간행물입니다. 격월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잠시 첼로가 숨을 골랐다. 물론 정말로 그럴 필요가 있어서라기보다, 이것 역시 하나의 제스처인 것이다. 나는 하나의 잘 짜인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떠십니까, 선생님?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 같은 분들이 우리 협회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요."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의 연극이라는 어떤 작가의 견해를 믿는다면, 이것이 그 연극의 클라이맥스인 것이다. 이것을 갑작스러운 전개라고 생각한다면, 그 연극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리라. 이런 결말이라는 것을 나는 예상했던가?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물론 지금 바로 답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생님. 여기, 여기로 엽서를 보내주시면 바로 회원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첼로는 책자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거기엔 작은 엽서가 꼿꼿이 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 같았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작게 말했다. 이유 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아 정말로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로 친절하시군요."

그러면서 첼로가 주섬주섬 짐을 쌌다. 짐이라고 할 건 없었지만, 필요 이상으로 부스럭거리는 느낌이었다. 아직도 무언가 남아있는 것일까.

"그럼 안녕히. 다음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나도 작게 인사했다. 첼로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등을 돌려 사라졌다. 첼로는 저렇게 몰래 다가오고, 사라지는 것이다. 필시 저런 종류의 사람 혹은 악기들이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인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전기협이니 권익이니, 레가토, 가입, 통조림, 보호, 포르티시모, 첼로가 지껄여댄 말과 설문 조사지 위의 단어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런 단어들을 몰아내려 애써보았지만 허사였다. 어쩌면 그런 단어들이 나를 지우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고 얼마간 단어들과 소리 없는 전쟁을 벌였다.

"아 선생님. 죄송합니다."

흠칫 놀라 눈을 떠보니 첼로가 내 눈앞에 있었다. 정말로 불편해졌다.

"아, 이 간행물 말입니다……."

첼로가 아직도 책상에 그대로 놓여있는 책자를 가리키며 말을 끌었다.

"요즘 협회가 조금 어려운 상황이라, 정말로 얼마 전부터 무상으로 책자를 배부하는 게 협회 차원에서 금지되고 있는터라……."

마치 '협회'라는 게 주변에 도청장치를 심어 두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는 듯이, 첼로가 작고 쉿쉿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얼마간 성의를 보여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겠습니다. 책자의 원래 가격은 둘째 치고 말입니다."

정신적인 피로감에 나는 손을 뻗어 지갑을 움켜쥐었다. 지갑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눈으로 보이는 비명 소리를 무시한 채, 지갑을 열어젖혔다. 만 원짜리 한 장이 있었다. 잠시 멈칫했다. 보지 않아도, 첼로가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지갑이 지르는 비명도, 내 손의 떨림도, 내 피곤함도, 모두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줄 수밖에 없었다. 이건 그렇게 짜인 대본이다. 나는 만 원짜리를 첼로에게 건네준 것으로 연극을 완성했다. 연극을 중간에 망쳐버리기에, 나는 너무나 약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주인공도 되지 못하는 인물이다. 첼로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긴 채, 또 협회에 긍정적으로 보고하겠다는 말을 남긴 채 사라졌다. 말 그대로 조금의 존재감도 남기지 않고. 나는 그 존재의 부재에 놀라 애당초 이 모든 게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책상에 놓인 책자가 눈에 들어왔다. 책자는 옛날의 불길한 유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몸서리 쳤다. 너무 피곤했다.


나는 결국 짐을 싸서 밖으로 나왔다. 선선하고 착 가라앉은 공기와 마주했다. 조금 위로 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한숨을 조금 쉬고, 발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카페에서 몇 발자국 떼어 놓고 나서야, 책자를 두고 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다시 가져올 마음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