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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Feb 02. 2020

14. 비데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연구실의 비좁은 공간에 3년 정도 있다 보면, 엄청나게 쓸데없는 정보를 곧잘 얻는다.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곳이라던지, 버려진 폐자전거(꽤 많이 폐자전거가 생기긴 하는 모양이다)가 보관되는 장소 같은  정보 말이다. 학교에 깔리는 보도블록이 저장되는 창고의 위치 같은 활용도 제로의 정보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산책로 같이 꽤 유용한 정보도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정보는 바로 학교 비데의 위치다.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기는 한데, 학교엔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이 있다. 일반적으로 비데의 1차적 목적이 개인위생을 위해서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공공 비데라는 것만큼 역설적인 포지션에 있는 물건도 몇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익명의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곳에 비데가 분명하게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알 수 있었던 몇 군데의 비데 위치를 통해서, 해당 공간 사이의 공통점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바로 '행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건물에 압도적으로 높은 확률로 비데가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총장실이 있는 건물에는 비데가 반드시 있다. 혹은 공과대학 행정실(이과 캠퍼스의 반절이니 규모가 꽤 크다) 에도 있고, 혹은 교수들이 벌집같이 들어선 곳에도 비데가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학생보다 직원들이 접근하기 좋은 곳에, 그것도 세네 칸 정도의 좌변기(물론 여자화장실은 제외한다. 가본 적이 없어서)중 1~2개 정도만 비데가 설치된다. 이러한 사실들을 잘 버무려 생각해보면, 속된 말로 권력의 X구멍을 빨려는 학교 행정(결국 돈을 지불하는 것이 행정실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과 그렇다고 모든 학생들에게까지 그 혜택을 베풀지 않겠다는 학교 당국의 선민주의적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없던 비데를 설치하는 것이라 뭐라고 비난하기도 뭐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비난을 쏟아내기 전에, 나는 이미 이런 시스템에 너무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공공적으로 밝히기에 그다지 좋은 내용은 아니지만, 학교 비데야말로 대학원 생활에서 몇 누릴 수 없는 위안을 제공한다. 매일 아침 10시 즈음이면 나는 비척비척 비데가 있는 공학관으로 향한다. 비데가 있는 칸이 익명에 의해 점거되어 있으면 다시 연구실로 돌아와 비데가 비었을지에 대해 골몰하는 지경이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나다 보니, 비데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1일 1 비데는 기본이다. 심지어 비데를 하지 못한 날에는 연구실 친구들에게 알 수 없는 히스테리를 부릴 정도다. 비데를 할 때까지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데를 사용하는 것에 알지 못할 꺼려함을 느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간질임은 질색이었으니까. 하지만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고 1년이 겨우 넘어갈 때 즈음, 항문 질환에 걸리게 된다. 그때는 잘 알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박사과정 학생들에게는 흔한 질병이었다! '그' 항문 질환에 걸리고 난 후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던 말이 바로 다음이었다.

    '와, 나도 그거 있었는데, xx 해야 빨리 나으니까....'

    누구에게 말을 걸건, 어떤 방식으로 말을 꺼내건 들을 수 있던 말이었다(적어도 대학원생 사이에서 말이다). 젠장, 일종의 훈장으로 까지 여겨지던 질환인 것. 함께 질환에 대해 이야기하며 알 수 없는 유대감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은 빠르게 수술을 하고선(이때의 기억은 인생 최대의 굴욕으로 남았다) 창백한 얼굴로 학교를 돌아다녔다. 

    그 수술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수술 직후에는 그 부분이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다. 일반 휴지를 갖다 대면 불에 덴 것 같은 느낌이 나서(난 이때 처음으로 무독성 휴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드시 물티슈를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처리해도 기분이 더럽다. 원래 했던 것처럼 세게 닦으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프고, 그렇다고 대충 닦을 수도 없다. 청결을 위해 오랜 시간 처리하다 보면 살갗이 따가워진다. 실수로 그곳이 헐기라도 하면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런 상황에서 한줄기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 비데였다. 정말 우연히도 공대 행정실 옆에 있는 화장실에 비데가 설치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정말 신세계였다. 아프지도 않고-간질간질한 느낌은 좀처럼 익숙해질 수는 없었지만- 정말 상쾌하게 뒤처리가 가능했다. 게다가 온수를 사용하니 어느 정도 마사지와 좌욕의 효과도 있고 말이다.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까지 편안해졌다.


    그래서 이상하게 처음 들어가는 화장실을 가면 좌변기에 비데가 달려있나 달려있지 않나 확인하는 게 이상한 루틴처럼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몇 건물에서, 몇몇의 층에, 몇몇의 칸에 비데가 있는 것을 알아냈다. 물론 학교에 있는 모든 비데의 위치를 완벽하게 안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젠 플랜 B, C, D까지 세울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닥친다. 물론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점점 비데를 사용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진다. 예전에는 플랜 B까지만 해도 안전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한 번에 비데를 사용하려면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 9시 이전이어야 한다. 과연 항문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절박한 신호인가? 아니면 전략적으로 비데를 줄이는 학교 당국의 음모일까? 나를 싫어하는 101명의 난쟁이들이 전략적으로 비데 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수천 가지 음모가 머릿속에서 펼쳐진다.

    내일은 별 탈 없이 비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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