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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Aug 27. 2015

서점 이야기

    서점에 갔다.

    서점은 사람들로 붐볐다. 7월의 태양은 악의라도 담긴 것처럼 따가웠다. 태양을 피해 쫓겨 들어온 사람들은 등에서 모락모락 김을 뿜어대고 있었다. 그들은 대게 떼로 몰려다녔다. 아이들이 우르르 뛰어다니고, 아줌마들은 큰 소리로 실없는 수다를, 고등학생들은 교복을 입고 까르르 웃어댔다. 한숨이 나왔다. 대게 책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혼자였기 때문에, 몰려다니는 이 무뢰한들이 다가올 때마다 흠칫 놀라며 그들에게 자리를 피해 주기 일쑤였다.

    나는 반쯤은 책을 찾으러, 반쯤은 사람들을 피해 서점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자기계발이나 인문, 잡지, 과학, 학습, 취미 쪽은 이미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그곳에서 책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하이에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대체 책 안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하다못해 외국서적 섹션 조차 이상하게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에 비해 소설 섹션은 비교적 한산했다. 하기야 이런 시대에 누가 소설에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아마 50권 정도의 소설이 말하려는 것을 압축하면 싸구려 자기계발 서적 한 개 분량이나 나올까. 시간과 자원을 소중하게 여기는 현대인들이라면 통 소설에 관심 두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훌륭한 현대인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소설 섹션에서 한참 서성였다. 그렇게 표류하다 SF 섹션에 닿았다. 그곳은 사람으로 붐비지 않는 소설 섹션에서 조차 사람이 없는, 서점의 사막 같은 곳이었다. 나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었다. 표지조차 보지 않았다. 제목은 얼핏 영원의 끝이라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띠지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조심 책을 열었다. 책은 기분 좋은 기지개 소리를 내었다. 제본용 풀이 적당히 튿어지며 내는 소리였다. 아마 종이 위의 잉크가 마른 이후로 이 책이 펼쳐진 적이 없었을 것이다.

    SF 소설의 이상한 점은 그것들이 매우 재미있음에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SF 작가가 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요구조건일지도 모른다. 필요 이상으로 지루한 도입부를 두는 것 말이다. 책의 첫 문단에 불륜이나 폭발, 살인 같은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으면 좀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못 받는 요즘 같은 때, SF 소설은 완벽히 구식일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도 아니고, 신식도 아닌 나는 집어 든 SF소설에 퍽 빠져들었다. 나는 이 도입부만 좀 참으면 곧이어 우주를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주인공과 함께 미래를 여행하고, 시간을 거슬러가고, 항성 간 항해를 다녔다. 그리고 우주의 종말에 관련한 거대한 미스테리가 풀리려는데…….


    하얀 책의 가장자리로, 검고 코가 뾰족한 구두가 보였다. 지나치게 광을 낸 구두에서 반사된 창백한 빛은 책 속 주인공이 쏘는 레이저 총보다 눈이 부셨다. 나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그 구두는 내 앞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노신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이 내 앞의 사람을 노신사라 칭한 이유는, 이 더운 날씨에 은회색 클래식 양복에 검은색 프록코트를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흰 테를 두른 중절모까지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씨나 장소를 생각하면 적절한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노인에게는 왠지 그것이 당연한 차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그는 별로 더워 보이지도 않았다.

    “이봐, 젊은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먼 곳에서 울리는 메아리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엉겁결에 일어났다. 내 등 뒤에 놓인 책을 찾는 것이 아닐까.

    “책을 찾으시나요?”

    나는 죄인 마냥 공손하게 대답했고, 노신사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런 이유로 자네를 귀찮게 한 게 아니야. 난 그럴 필요도 없고.”

    노신사는 얼굴에 시종일관 웃음을 잃지 않고 나에게 물었다.

    “자네, 나와 내기하지 않겠는가?”

    “내기요?”

    “그래, 내기. 간단한 내기 말일세. 그냥 늙은이의 심심풀이 같은 걸세.”

    뭔가 좀 이상한 노인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부터 망가진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말년에 종종 이렇게 내면의 세계가 무너진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이럴 땐 적당히 맞장구쳐주다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다.

    "어떤 내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동전 던지기 같은?”

    나는 주머니에 짤랑거리는 백 원짜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니, 아닐세. 그런 시시한 것 말고. 뭔가 좀 더 지적인 유희 말일세. 음…… 책에 관한 게 좋겠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서점이니 말일세.”

    노신사는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물었다. 검고 검은 눈동자였다. 나는 그러한 눈동자를 어디선가 본적이 있었다. 나는 순간 시골에 있는 낡은 우물을 떠올렸다. 그의 눈동자는 늙은 우물의 보이지 않는 마른 바닥을 가득 채운 어둠을 보는 것 같았다. 결코 보고 싶지 않지만 계속해서 보게 되는 종류의 어둠 말이다.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노신사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해보는 건 어떻겠나? 자네가 이 서점 안에 있는 아무 책이나 고르게. 그리고 아무 페이지나 펼친 다음, 그 페이지의 첫 문장을 나에게 읽어주는 걸세. 그럼 내가 그게 몇 페이지 인지 맞추는 거지. 어때, 흥미가 있나?”

    말도 안 되는 내기다. 그런 것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똑똑하고 박식한 사람이라도, 그런 것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미있는 내기인 것 같기는 한데, 그건 너무 어려운 것 같은데요.”

    내가 반문하자, 노인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네. 그 정도 유희는 할 줄 알아야지. 그보다 말일세…….”

    노신사가 의도적으로 말을 끌었다. 다분히 의도가 담긴 제스쳐였다. 

    “내기는 내기이니만큼, 무언가를 걸어야 하지 않겠나?”

    “건다고요?”

    “내기라면 승패에 따라서 적당한 이익과 손해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나는 생각에 잠겼다. 눈앞의 노신사는 미쳤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지적이었다. 그에게서부터 어떤 지적 품위 같은 것이 흘러나온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딴 종류의 내기나 제안하는 것을 볼 때 그다지 정상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주머니 속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빨리 동전을 줘버리고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했다. 그때 노신사가 말했다.

    “자네가 이긴다면, 내 이 서점을 통째로 줌세.”

    나는 자리를 뜨려고 내려놓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물론 대단히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아까웠다. 서점을 통째로 주겠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듣자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키려고 했던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 믿는 모양이군. 이걸 좀 보게.”

    노인의 품 안에서 여러 가지 서류들이 나왔다. 두꺼운 A4용지 서류들이 어떻게 양복 안에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짧게 들었지만, 한결같이 이 서점의 소유자가 노신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서류들을 보자마자 그런 의문은 기억 바깥으로 사라졌다. 게다가 내가 서류를 보고 있는 동안 노신사는 서점을 돌아다니던 매니저를 불러 자신이 이 서점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나에게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이제 좀 믿겠나? 나는 진지하다네.”

    이 정도라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쳐버린 기업 소유주와 가난한 대학생 사이의 모종의 거래, 그리고 갑자기 부자가 되는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를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었다. 서점은 나에게 매혹적인 공간이었고, 그 모든 책을 소유한 내 모습은 더더욱 매혹적이었다. 나는 욕심이 솟았다.

    “이제 믿기는 합니다만, 너무 과한 내기 같은데요. 겨우 그런 내기에 서점을 거시다니요.”

    노인은 잠시 손을 턱에 갖다 대며, 가벼운 콧소리를 내며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내가 이긴다면 너의 눈알을 하나 가져가지. 어떤가?”

    눈알? 내 눈알을 가져간다고?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자 노인이 바싹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내기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이 서점은 바로 자네 것일세. 뭐 증여세야 조금 물겠지만, 그게 대순가! 설마 그런 기회를 놓치지는 않겠지? 바보가 아니라면 말이네.”

노신사의 말이 맞았다. 만약 노신사가 이 서점의 주인이 아니고, 그냥 정신이 이상한 노인네라고 해도 절대로 질 리가 없는 내기였다. 이곳은 대형 서점이고, 수만, 수십만 권의 책이 있다. 책마다 몇백 페이지씩이나 된다. 노신사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게임이었다. 한마디로, 손해 볼 것 없는 장사였다. 나는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다.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노인이 크게 웃었다. 입술의 안쪽이 빨갛게 빛났다.

    “그럼 규칙을 정하지. 자네의 소중한 눈알을 위해서, 내 자네에게 다섯 번의 기회를 줌세. 그러니까 다섯 개의 문제를 나에게 내면 되는 것이지. 내가 한 번이라도 틀리면, 이 서점은 자네 것이네. 확실한게 좋겠지, 자, 여기 서명하게.”

    노인은 서류 뭉치의 맨 마지막 장, 내기와 관련한 서류를 펼쳤다. 아까 그런 종이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나는 원룸을 계약할 때와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는 법률 용어의 행간을 읽으며 숨은 무언가가 없을까 한참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서류였다. 내기의 내용에는 한 치의 의혹도 없었다. 내기에서 노인이 지면 서점의 소유에 관한 어떤 권리도 양도한다는 조약도, 내기 규칙도, 눈알의 적출에 관한 내용도 모두 알맞게 들어있었다. 나는 노인이 내민 비싸 보이는 만년필로 서명했다.

    나는 재빨리 손에 들려있던 책을 펼쳤다. 책 위로 노신사를 한 번 힐끗 쳐다본 다음 첫 문장을 읽었다.


    -셀던은 의자에 몸을 반쯤 뉘인 채 천장을 응시했다.


    "45페이지.” 노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는 쪽수를 확인했다. 45라는 숫자가 보였다. 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벙쪄있는 나에게, 노신사는 말했다.

    “그저 늙은이의 요행이라고 생각하게. 우연히 맞은 것일 수도 있지 않나.”

    나는 재빨리 등 뒤에 있는 책을 뽑았다. 울긋불긋한 표지에 ‘테레메르’라는 제목이 금박으로 입혀진 SF 소설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노신사에게 보이지 않게 책을 눈높이로 올려 든 다음, 촤르륵 넘기는 페이지에서 하나를 골라 짚었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로렌스.


    “흐음……. 253페이지 정도 되려나.”

    정답.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다른 서가, 다른 책장을 향해 움직였다. 노신사는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따라 왔다. 나는 어린이용 ‘빨간 머리 앤’을 집어 들었다.


    -앤은 오솔길로 사뿐사뿐 뛰어갔다.


    "317페이지. 이건 너무 쉽군.”

    나는 거의 뛰다시피 다른 서가로 갔다. 노인이 미처 서가에 다다르기도 전에 책을 고르고, 가장 평범한 문장을, 그야말로 어디에나 있을 법한 문장을 골랐다.


    -조심하려무나.


    "214페이지. 레미제라블 2판 3권. 제법 머리를 썼군.”

    모두 정답이었다. 이 노신사는 수 만권의 책 사이에서 수 백장이나 되는 쪽수의, 그리고 한 장에만도 수십 줄의 문장을 모두 외우고 있는 것인가. 

    이건 하나의 거대한 사기극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주위에 숨어있는 카메라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두리번거렸다. 분명 방송국 사람들이 서점 어딘가에 숨어있고, 이 말도 안 되는 문제를 맞힐 수 있게 노신사를 도와주는 것이다. 내가 문장을 말하면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고, 노신사에게 알려주는 방식이라면 이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책이 전산화되어 있던가?

    아니, 설사 지더라도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린 21세기에 살고 있으니까. 신체의 교환과 관련된 거래는 어떠한 경우도 모두 불법이다. 설사 지더라도, 그 누구도 내 눈은 가져갈 수 없다. 노신사가 강제로 내 눈알을 가져가려고 한다면, 나는 핸드폰으로 경찰을 부를 것이다. 경찰은, 민중의 믿음직한 지팡이는 이 말도 안되는 내기를 중단시키고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주겠지. 가능하다면 이 사기꾼 노인의 정체도 까발리고 말이다.

    내 표정에서 생각이 읽히는지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와 같은 너털웃음이었지만 어딘가 기묘하게 비틀어진 느낌이 났다. 나는 오싹했다.

    “자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네. 그렇지만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 모든게 다 사실이지. 저길 보게.”

    노신사가 눈을 반짝이며 손가락으로 어떤 사람을 가리켰다. 노신사의 손가락 끝에는, 귀 한쪽이 없는 사람이 서점을 배회하고 있었다. 귀가 있어야 할 곳에는 흉물스러운 구멍만 뚫려 있었다.

    “귀는 값어치가 좀 적지. 저 사람한테는 그래서 두 번의 기회를 주었었네. 자네는 다섯 번이나 있지 않나. 그마저도 네 번은 이미 썼지만.”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점 여기저기에 신체 부위가 하나씩 없는 사람들이 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이, 어떤 사람은 코가 없었다. 한 쪽 다리가 없는 사람은 빈 바지를 응시하며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이가 없는 사람은 얼굴이 움푹 파여 흡사 죽은 사람 같았다. 신체 부위를 빼앗긴 사람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서점 안을 표류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자 이제 마지막 하나 남아있네.”

    나는 반쯤 공황에 빠져 난폭하게 뛰어다녔다. 하지만 노인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떻게 따라오는지도 모르게 나를 쫓아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 중 신체 부위가 없는 사람들이 자꾸 시선에 들어왔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우울과 체념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아마 저 시선조차 보낼 수 없게 되리라.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이 책이라면.


    -역법에 한 개의 괘에는 각각 삼 개의 효가 있다.


    ‘토정비결풀이’라는 책이었다. 매년 새로운 버전이 나오는 듯 표지에 붉은 글씨로 ‘20XX년’ 이라고 크게 씌여 있었다. 싸구려 종이에 제본마저 엉성한 데다 지나치게 두꺼워서 책이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런 책은 정말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읽지 않아야 한다.

    "아, 이건 제법 어렵군. 좀처럼 읽히지 않는 책이지. 똑같은 말도 여러 번 나오고 말이야. 하지만 나는 맞출 수 있지.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거든. 어디 보자........ 역법에 한 개의 괘에는 각각 삼개의 효가 있다라. 너무 앞쪽은 아니지. 중간에서 5분의 3 정도 더 간 부분이야. 한 57페이지 정도 되겠군. 57페이지.”

    나는 책을 떨어트렸다. 말도 안 된다. 아니, 말이 되고 안되고를 떠나서 도망쳐야 했다. 이 미친 늙은이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쳐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다행히 이 서점은 몇십 번이나 와봤기 때문에 나갈 길은 훤히 알고 있었다. 나는 자꾸 주저앉으려고 하는 다리를 달래가며, 간신히 출구로 뛰어갔다. 

    하지만 그곳에 출구는 없었다. 분명히 그곳으로 들어왔는데도. 문이 있어야 할 곳에는 거대한 책장이 있었고, 그 책장 뒤에는 단단한 벽이 있었다. 애초에 출입구 자체가 없었다는 듯이. 나는 순간 착각하였나 싶어 다른 출입구로, 또 다른 출입구로 뛰었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는 그 모든 출입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책장만 있었다. 출구는 없었다.

    이내 나는 출구 찾기를 포기했다. 나는 그저 노신사를 피해 달아났다. 그렇지만 아무리 달려도 노신사는 언제나 내 시선 한쪽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서명한 그 서류를 한 손에 든 채 말이다. 책장 모퉁이를 돌면 그가 소름 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반대편으로 달려가면 저 멀리에, 다시 돌면 이번엔 바로 가까이 그가 서 있었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그의 미소는 점점 커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미소라기보다 얼굴의 기괴한 찌부러짐에 가까워졌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야수가, 끔찍한 망령이 한 사람의 얼굴을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단 한 발자국을 옮길 수조차 없게 되자,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이 땀으로 덮여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남아있는 기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소리를 지르는 것밖에 없어 소리를 있는 대로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평소와 같이 시끄럽고, 활기차고, 몰려다니고 있었다. 나는 하나의 고립된 섬이었다. 

    노신사가 나에게 소리 없이 다가왔다. 보란 듯이 한쪽 손에 서류를 든 채였다. 노인은 쭈글쭈글한 다른 쪽 손을 나를 향해 천천히 뻗었다. 그의 손은 거인의 손처럼 크고 무서웠다. 이제 저 손이 나의 얼굴에서 내 눈알을 하나 가져갈 것이다. 그 자리에서 꼼작할 수 없었다. 노인의 손이 괴담처럼 다가왔고,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뒤의 일은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떤 남자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선글라스에 모자, 마스크까지 쓰고 있는 사내였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발작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어떤 미친 노인이 내 눈알을 가져가려고 한다고 말이다. 사내는 내 발작을 침착하게 진정시켰다. 그리고 사내가 말했다. 바람이 새는 듯 어눌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타는 듯한 목소리였다.

    “저는 그 노인을 책마귀라고 부릅니다.”

    나는 차분하면서도 격정적인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책마귀라고?

    “저는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와 한 내기는 모두 무효입니다.”

    나는 나를 부축하고 있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노신사, 그러니까 책마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를 벗었다. 그리고 눈알이 있어야 할 곳에는 텅 빈 공간이,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얇은 구멍이, 이빨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진홍빛 잇몸만이 있었다. 잇몸 사이로 반쯤 잘려진 혀가 보였다. 나를 잡은 손은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제외하고, 모두 잘려나가 있었다. 이제 보니 한쪽 다리도 없었다.

    “저는 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저도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어떻게 그 서점에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 남자를 뿌리치고 달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점 밖으로 나와 있었으며, 어디에도 노신사도, 그 남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는 서점에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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