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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Sep 02. 2020

안톤 체호프/안지영 옮김

그다지 애쓰지 않아도 나는 아버지와 내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스크바의 거리에 서 있던 비 오는 가을 저녁의 일을 낱낱이 기억해 낼 수 있다.

나는 이상한 병이 점차 나를 사로잡고 있음을 느낀다. 아픈 데는 없지만 다리가 풀리고, 말은 목구멍 한가운데 걸려서 나오지 않고, 고개는 힘없이 이쪽저쪽으로 떨어진다...... 이제 곧 쓰러져 의식을 잃게 될 거다.

지금 병원에 간다면 의사는 내 진료지에 이렇게 적겠지. Fames. 이건 의학 교과서에도 없는 병이다.

내 옆 보도 위에는 나달나달 해진 여름 코트에 트리코로 만든 모자를 쓴 아버지가 서 계신다. 모자 끝에는 하얀 솜 조각이 비어져 나와 달랑거린다. 소심한 아버지는 맨발에 크고 무거운 덧신을 신은 걸 혹시라도 사람들이 알아챌까 봐 종아리에 각반을 끼셨다.

멋진 여름용 코트가 너덜너덜해지고 더러워질수록 더 깊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가난하고 어수룩한 괴짜 양반은 다섯 달 전에 사무직 일자리를 찾아 수도로 오셨다. 다섯 달 내내 거리를 헤매며 일자리를 구하다가 드디어 오늘, 구걸하러 거리로 나설 결심을 하신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곳 맞은편에는 '주점'이라는 푸른 간판이 걸린 커다란 3층짜리 집이 있다. 내 고개가 뒤로 그리고 옆으로 살짝 젖혀져 있어, 보려 하지 않아도 저 위쪽에 있는 주점의 불 켜진 창이 보인다. 창가에는 사람들 모습이 어른거리고, 오르간의 오른쪽 면과 두 점의 크롬 석판화, 천장에 매달린 램프들도 보인다...... 창문 중 하나를 응시하다 나는 점점 희게 변하는 한 지점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 벽에 꼼짝 않고 붙어 있는 그 하얀 것은 반듯반듯한 윤곽 때문에 더 확연히 도드라져 보인다. 시선을 집중해서 보니 벽에 붙은 흰 간판이다. 간판에 무어라 쓰여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반 시간 가량 눈을 떼지 않고 간판을 들여다본다. 간판은 순백의 빛깔로 시선을 끌어당겨 나의 뇌에 최면을 거는 듯하다.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어보려 하지만 헛수고다.

그때 이상한 병이 마침내 활동을 시작한다.

마차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리고, 거리를 뒤덮은 악취 속에서 수천 가지 냄새를 구분해 내며, 주점의 램프와 거리의 가로등은 눈부신 번개처럼 보인다. 내 오감은 극도로 예민해져 정상치를 넘어 모든 것을 포착해 낸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굴……."

나는 간판에 쓰인 글자를 읽는다.

이상한 말이다! 이 땅에서 8년 하고도 3개월을 살았건만 이런 낱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무슨 뜻일까? 혹시 주점 주인의 성일까? 하지만 주인의 성을 쓴 간판은 보통 문 앞에 내걸지 벽에 걸지 않는다!

"아빠, 굴이 뭐야?"

나는 힘겹게 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려 갈라진 목소리로 묻는다.

아버지는 내 말소리를 듣지 못하신다.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지나는 모든 사람을 눈길로 쫓으신다...... 아버지의 눈을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그 운명의 단어가 무거운 추처럼 떨리는 입술에 걸려 도무지 튀어나오지 못하는 걸 알겠다. 한 발을 내디뎌 한 행인의 소매를 건드리기도 했지만, 그가 돌아보자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는 당황하여 다시 뒷걸음질치고 만다.

"아빠, 굴이 뭐야?"

내가 다시 묻는다.

"그건 생물인데……, 바다에 살아……."

나는 단박에 이 미지의 바다 생물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건 아마 물고기와 게의 중간쯤 되는 생물일 거다. 바다 생물이니 물론 아주 뜨끈하고 맛있는 생선 수프를 만들 수 있겠지. 냄새 좋은 후추와 월계수 잎을 넣어서 말이야. 또 뼈째로 끓이는 시큼한 생선 수프, 게살 수프, 고추냉이를 넣은 냉요리도 만들겠지…….

나는 시장에서 이 생물을 가져와 재빨리 손질해서 잽싸게 항아리에 넣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뭐든 빨리빨리 하는 거야……. 다들 배가 고프니까……. 너무너무 배가 고프니까! 부엌에서는 생선 요리와 게살 수프 냄새가 진동한다.

냄새가 내 입천장과 콧구멍을 간질이고 점점 내 몸 전체를 사로잡는 게 느껴진다……. 주점, 아버지, 흰 간판, 내 옷소매 어디서든 이 냄새가 난다. 이 냄새가 너무너무 강해서 나는 우물우물 씹기 시작한다. 내 입안에 진짜 이 바다 생물 조각이 들어 있기라도 한 듯 씹고 삼킨다…….

그리고 이 황홀함에 취해 다리가 꺾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아버지의 소매를 움켜잡고는 그의 축축한 여름 코트 위로 쓰러지듯 기댄다. 아버지는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고 계신다. 추우신 거다…….

"아빠, 굴은 정진 중에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내가 묻는다.

"그건 산 채로 먹는 거야……."

아버지가 대답하신다.

"거북이처럼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 있어……. 대신 껍질이 두 쪽이지."

순간 맛있는 냄새가 더 이상 내 몸을 간질이지 않는다. 환상이 사라진다……. 이제 난 모든 걸 알아버렸다!

"에이, 더러워!"

나는 중얼거린다.

"진짜 더럽다!"

굴이란 게 그런 거였구나! 나는 개구리를 닮은 생물을 상상해본다. 개구리가 조개껍질 속에 들어앉아서 반짝이는 큰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징그러운 턱을 움직인다. 나는 반짝이는 눈에 집게발이 달리고 피부는 미끈거리는 이 생물을 조개껍질째 시장에서 가져오는 모습을 그려본다……. 아이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부엌데기 하녀는 징그러워 얼굴을 찌푸린 채, 이 생물의 집게발을 들어 접시 위에 올려놓고 식당으로 가져간다. 어른들은 그놈을 집어 들고 먹기 시작한다……. 산 채로 눈과 이와 다리를 모두 먹어치운다! 그놈은 삑삑 소리를 내며 입술을 물어 뜯으려한다…….

나는 인상을 쓴다. 하지만……. 하지만 도대체 왜 내 이는 그걸 씹기 시작하는 걸까? 혐오스럽고 징그럽고 무서운 생물이지만, 나는 그놈을 먹는다. 혹시라도 그 맛과 냄새를 알게 될까 겁을 내며 게걸스레 먹어댄다. 한 마리를 먹고 나서는 그다음 녀석, 또 그다음 녀석의 반짝이는 눈을 본다……. 그러고는 그놈들 마저 먹어치운다……. 마침내 냅킨, 접시, 아버지의 덧신, 흰 간판까지 모조리 먹어치운다……. 눈에 띄는 것은 뭐든지 먹어치운다. 먹어야만 병이 나을 것 같기 때문이다. 끔찍하게 생긴 굴들은 무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나는 그 녀석들이 무서워 온 몸이 떨린다. 하지만 먹고 싶다! 먹고 싶다!

"굴 좀 주세요! 저한테 굴 좀 주세요!"

가슴속에서는 이런 외침이 터져 나오고 나는 양손을 앞으로 뻗는다.

이때 아버지의 짓눌린 듯한 쉰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러분, 도와주세요! 부끄럽지만, 제발 도와주세요. 이러다 죽겠습니다!"

"굴 주세요!"

나는 아버지의 코트 뒷자락을 잡아당기며 외친다.

"아니, 네가 진짜 굴을 먹니? 아직 요렇게 어린데!"

주위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우리 앞에 실크해트를 쓴 신사 두 사람이 서서 웃으며 내 얼굴을 바라본다.

"어이, 꼬맹이, 굴을 먹을 수 있어? 정말? 거 재미있군! 어떻게 먹는데?"

누군가의 힘센 팔이 나를 붙들고 불 켜진 주점으로 끌고 간다. 잠시 후 내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낄낄대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미끌미끌하고 짭짤하고 곰팡이 냄새를 풍기는 날것을 먹는다. 씹지도 보지도 않고, 내가 뭘 먹고 있는지도 모른 채 게걸스레 먹어댄다. 눈을 뜨면 반짝이는 눈과 집게발, 날카로운 이빨을 보게 될 것만 같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딱딱한 것을 씹기 시작한다. 와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하, 저 녀석 껍질까지 먹어치우네!"

사람들이 웃는다.

"바보 같은 놈, 그걸 어떻게 먹냐?"

그리고 나서 심한 갈증을 느꼈다. 침대에 누워 있지만 뜨거운 입속에서 느껴지는 타는 듯한 통증과 이상한 맛 때문에 잠들 수가 없다. 아버지는 방 여기저리를 서성이며 두 팔을 휘저어 이상한 손짓을 하고 계신다.

"머릿속에 뭔가 있는 게 느껴져……. 꼭 누가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아……. 이건 어쩌면 내가…… 그러니까…… 오늘 아무것도 ……못 먹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난 …… 이상한 사람이야……. 병신이라고……. 그 사람들이 굴 값으로 10 루블을 내는 걸 보고도 왜 다가가서 몇 루블만……빌려달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아마 빌려줬을 텐데."

나는 아침 녘에 되어서야 잠이 든다. 꿈속에서는 집게발이 달린 개구리가 조개껍질 속에 앉아 눈짓을 한다. 정오에 목이 말라 잠에서 깨어 아버지를 찾아 눈길을 돌린다. 아버지는 여전히 서성이며 이상한 손짓을 하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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