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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Feb 03. 2021

17. 정말 금메달은 성적이 낮을까?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옛날을 돌이켜보자. 우리는 제출 제한시간 - 보통 시험시간의 절반 - 이 지나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을 안다. 그들은 안내가 끝나자마자 바람같이 시험지를 제출하고, 일명 '금메달'이니 '은메달'이니 하는 족속으로 불렸다. 시험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그런 학생들이 있으면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그들보다는 내가 점수가 높을 테니까. 저들을 깔고 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럴까?

그리고 무슨 저주를 받았는지 대학원생이 되고 나서, 그리고 발가락까지 써도 모자랄 만큼 많은 횟수의 시험 감독을 들어간 뒤에야, 그런 사실을 검증할 만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계기는 기껏 열심히 복사해 간 시험 문제를 풀어보지도 않고 그냥 간 녀석들이 아니꼬와서 였지만 말이다. 나쁜 녀석들, 내가 채점하면서 불이익을 주리라- 이러면서. 늙은 대학원생은 그런 것으로 꼬장을 부릴 수 있다. 늙은 대학원생은 말이다......


여하튼, 이번 학기 두 개 과목의 시험감독으로 들어가면서 제출한 순서대로 시험지 앞에다 등수(숫자)를 적었다. 가장 먼저 나간 녀석은 1을 적고, 그다음은 2를, 그리고 가장 마지막 학생한테 가장 큰 숫자를 붙이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얼렁뚱땅 채점을 끝내고(막상 채점할 때는 귀찮아서 딱히 불이익을 줄 새가 없다), 해당 시험의 점수와 나간 순서를 나란히 기록한다. 그리고 X축을 나간 순서, Y축을 점수로 한 산포도를 그린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그래프가 그려진다. 이때 상대적으로 학생 숫자가 적은 과목 2는 과목 1 학생 수를 기준으로 등수를 정규화(Normalize) - 이렇게 쓰면 굉장히 거창해 보이지만 별것 아니다 -  하였다.

시험지 낸 순서와 성적 사이의 관계: (좌) 선형 회귀, (우) 평균과 특이점들

물론 '추측했던 대로' 늦게 나갈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맞는 것 같기는 하다. 과목 1과 과목 2 모두 대체적으로 우상향 하는 분포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오른쪽 그래프에서 분포의 선형 회귀선의 기울기가 0.37~0.45으로 분명한 양수다. 그러니까 당신이 왠지 모를 자존심 때문에 바득바득 앉아있다가 앞사람이  시험지를 제출하는 것을 보고 이겼다는 느낌에 의기양양하게 제출했을 때, 기본적으로 그 앞사람 보다 0.37점에서 0.45점 정도 높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강한 상관관계는 아니다. 우선 선형 회귀에 대한 퍼짐 정도를 알 수 있는 R^2 값이 0.14와 0.30에 불과하다. 순 엉터리긴 하지만, 종합해보면 이런 말이 된다.


'니가 니 앞에 앉아 있는 사람 한 명 보다 늦게 나갔을 때 0.4점 더 잘 받을 확률이 20% 정도 돼'


 그러니까 시험장 등수는 사실상 쓸모없다는 이야기다. 혹시나 더 이상 풀 게 없는데 그냥 오기로 나가지 않는 녀석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오른쪽 그래프 초록색 점선 (1), 거의 끝까지 나가지 않고도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은 녀석들 말이다. 이 녀석들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기우제를 지내는 수준으로 문제를 푸는 게 아닐까. 모르면 나가라고. 내가 퇴근을 늦게 해야 되잖아......

물론 나랑은 상관 없다. 근데 총 들고 시험 감독에 들어가보고 싶기는 하다

한편, 우리가 처음에 궁금해했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목 1과 과목 2에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오른쪽 그림의 속칭 '금메달' - 초록색 점선 (2) -가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은메달도 1 시그마 안에 드는 점수다. 이 녀석도 이 녀석대로 괘씸하기는 마찬가지다. 해석해보자면, 자기는 이렇게 빨리 풀어도 평균 이상 받을 수 있는데 귀찮아서 대충 풀고 낸 셈이니까. 아마 이 녀석이 끝까지 남았더라면 조금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었으리라. 아니면 채점받을 만한 잔머리적인 어떤 포인트를 잘 집어내고 있달까. 머리가 좋다고 나대는 꼴이라니...... 금메달보다 성적이 낮은 나머지 44명을 조롱하는 것일 수 도 있다. 괘씸하다.

하지만 이어서 나가는 초록색 점선 (3)의 3등, 4등 및 5등은 점수 최하위를 기록했다. 이는 과목 1과 2에 동시에 나타난다. 이 사람들이 진정한 구원자인 것이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정직한 참 시민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풀고 나가는 깨어있는 시민 말이다. 위의 두 케이스 - 금메달이나 모르면서 끝까지 남아있는 녀석들 - 같은 위선자와 궤를 달리하니까. 우리는 일반적인 격언 하나로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간달프....

'현자는 아는 것 만을 말한다.'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고 있는데 - 간달프는 인정이지 - 이들은 이 시대의 현자일 수 있다. 나는 이들을 애정 한다. 고로 만약 자기희생을 통해 모두의 행복을 얻게 해 줄 현자들을 찾는다면 이들을 우러러봐야 할 것이다. 동메달 이상인 사람들을 말이다.

그리고 아직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아있다. 그러면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의 금메달 케이스와 같다. 과목 1에서는 가장 늦게 나간 사람이 점수 1등을 했다. 그렇지만 과목 1에서 80점 이상을 받은 사람들 - 이 사람들은 A 이상을 받았다)은 나간 순서 10등~69등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다. 과목 2에서는 이런 형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점수 1등은 대략 중간 정도에 나갔으며, 80점 이상 역시 나간 순서 전 범위에 분포한다. 표본이 적어서 적확한 결론 내리기는 힘들지만, 일단 데이터 상으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꼭 늦게 나가는 게 점수가 높지는 않아.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는 것만 쓰고 빨리 나가라고)


오늘 우리는 두 시험의 점수와 나간 순서 사이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시험에서 미묘한 기싸움으로 나갈 순서를 고민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데이터를 통해 얻은 위의 결론을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1) 금메달이나 은메달은 위선자일 가능성이 높다.

2) 동메달~그 이후 초반 사람들은 정말 성적이 낮을 가능성이 높다.

3) 만약 앞사람보다 한 번 늦게 나가면 0.32점 정도 높을 가능성이 있긴 한데,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상관관계가 낮다.

4)  늦게 나간다고 성적이 꼭 높지는 않다. 


써 놓고 나니 별 것 아니긴 한데, 뭔가 이렇게 정리하니까 마음이 편하다. 제발, 빨리빨리 나가라고.

빨리...가라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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