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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Oct 21. 2015

돈 없이 사는 한 달에 관한 이야기

과외비를 못 받은지 한 달이 지났다. 

과외 학생 어머님에게 문자도 해보고 전화도 해봤지만 매번 일주일만 더 기다려 달라고 말씀하셨다. 핸드폰을 조용하게 내려놓고 눈알을 굴린다. 그렇게 4주 째이다.


애당초 돈을 요령 있게 아끼고 모으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저금한답시고 모으는 통장에는 늘 5만 원 남짓한 돈 만 남아있었다. 과외비로 받는 40만 원은 요령도 좋게 이리 찔끔, 저리 찔끔 빠져나가서 과외비를 받을 때  즈음되면 겨우 몇천 원 정도 남아있는 상태이기 일 쑤 이고, 용돈으로 받는 5만 원은 어디서 사라졌는지, 아니면 정말로 길을 가다가 놓쳐버렸는가 의심이 들 정도로 빠르게 사라졌다.


따라서 과외비를 받는 23일 즈음은 나에게 굉장한 은총 같은 날이었다. 없던 자신감도 불쑥 생기고, 원두도 한 봉지 사고, 비싼 크래프트 맥주도 몇 병 사는, 그야말로 환희의 날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길 가다가 돈이 들어왔다는 문자를 보고 길에서 물구나무를 서기도 했다. 


그런데 요번 달-그러니까 9월 분-과외비가 들어오지 않았다. 3만 원 정도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핸드폰만 보면서 초초하게 돈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23일을 훌쩍 넘긴 25일 까지도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25일 밤에는 악몽까지 꾸었다. 과외 학생 어머니가  꿈속에서 나에게 전화를 해서, 학생이 과외 수업을 받으러 가다가 차에 치어서 병원에 갔으니, 이제 과외는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게다가 내가 하는 수업 때문에 차에 치었으니 내가 보상하라는 어머님의 고성과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과외비나 달라고 따지는 나 사이의 대화가 격해질 무렵,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니,  그다음날 학생과 과외가 끝날 즈음, 학생더러 어머님에게 돈 좀 넣어달라고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물론 혹자에게는 그것이 거리낌 없이 행할 수 있는 일종의 권리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에겐 아니었다. 머릿속 회로 어딘가에 '학생과는 돈 이야기를 하면 안된다'라고 하는 이상한 터부 같은 게 박혀있어서, 실제로  그때 학생에게 한 이야기가 내 과외 인생 4년 중에 처음으로 학생에게 한 돈  이야기였다.


물론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학생과의 다음번 수업 까지도 별다른 문자나 연락이 없었다. 학생과 과외가 끝나고 살짝 화가 나서, 전화를 거니까 어머님이 반가운 목소리로 받으시면서, 깜박하셨다면서, 곧 넣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역시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뒤로 몇 번 더 문자를 했을 때, 사정이 있으니 다음주 까지 넣어주겠다는 약속만 늘어갔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꽤 지난 지금, 한 달 동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것이 어딘가 '죽음 수용의 5단계'라고 하는 도식과 어딘가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에는 돈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단순한 실수라고 부정했고, 그다음에는 빨리 돈을 넣어주지 않는 과외 학생 어머님에 대한 분노, 또 당장 이번 주만 더 기다려 보자는 타협, 이대로 돈이 들어오지 않고, 수능을 본 과외학생이 먹튀를 할 거라는 우울까지 고루 겪었다. 그 과정에서 겪는 감정 변화의 폭은 생각보다 넓었고, 방향도 다양했다. 그리고 지금은 거의 완전히 그것을 수용했다. 오늘도 돈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학생과 만나는 발걸음은 가볍다.


어쩌면, 이 자본주의의 세계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죽음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경제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의 모든 음식점들, 카페, 술집, 옷가게, 대중교통 같은 것들이 매번 나의 목에 칼을 들이민 다음,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고 묻고 있다. 나는 온 세계에 대해 투쟁한다. 나는 그야말로 격렬하게 그 칼날을 거부한다. 투쟁은 절박하다. 그 절박함은 인간적인 것과 전혀 거리가 멀다. 투쟁하는 인간은 그야말로 비참한 인간이다. '인간적임'에 대한 철학자나 사회, 개인의 편협한 정의는  그 투쟁 앞에서 시들어진다. 그리고 끝내 개인은 패배하고 만다.


그렇다면 그 패배는 죽음인 것일까? 온 세계에 대항하는 한 송이의 민들레, 자그마한 돌덩이는 가치가 없는 것일까? 


이번 일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모든 실패와 패배, 죽음에는 그 무게만큼의 숭고함이 있다는 것 말이다. 가장 크게 패배하는 자, 영광이 있을지니! 따라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도 거짓말이고, 오히려 그 말을 들으면 실패가 화를 낼 것이다. 아마 성공은 실패의 노예정도가 아닐까. 그렇게 죽음 앞에서 삶은 한없이 보잘 것 없어진다. 모든 것은 패배라는 평등한 명제 앞에 무의미해진다. 그만큼 실패와 패배, 죽음은 숭고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외치는 것이 가장 인간다운 것임을 깨달았다. '결국에 패배할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투쟁하는 것 말이다. 행여 작은 성공을 하더라도 그건 더 큰 추락을 위한 발걸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서 떨어지고 싶다고 나는 욕망한다.


그렇다면 나의 경제적인 죽음은 얼마만큼 숭고할까? 감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꽤 숭고하다고, 어쩌면 내가 풍족하게 살아온 300개월의 삶보다 이 한 달이 어쩌면 더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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