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엔데 Dec 29. 2015

세계 챔피언

로알드 달

세계 챔피언/ 로알드 달

The champion of the World / Roald Dahl

정해영 외/도서출판 강


온종일 우리는 손님이 없는 시간을 틈타 주유소 사무실 탁자 위로 몸을 숙인 채 건포도를 준비했다. 

물에 불린 건포도는 알이 굵고 말랑말랑 했으며, 면도날로 칼집을 내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젤리 같은 속살이 쉽게 밀려나왔다.

건포도가 자그마치 196알이나 되었기 때문에, 일을 마치기도 전에 저녁이 다 되었다.

"정말 훌륭하지 않아!"

두 손을 싹싹 비비며 클로드가 소리쳤다.

"지금 몇 시지, 고든?"

"다섯 시 좀 넘었어."

창문을 통해  스테이션왜건 한 대가 주유기 앞에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운전석에는 여자가 탔고, 뒷좌석에서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곧 출발해야 하는데. 해 질 녘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모두 물거품이 돼버린다고."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모습은 일전에 경견 대회에 나갔을 때나 클라리스와 밤 데이트가 있을 때와 비슷했다.

우리 둘은 밖으로 나갔고, 클로드는 여자가 원하는 만큼 기름을 넣어주었다. 그녀가 떠나가, 그는 주유소 진입로 한복판에 서서 걱정스러운 듯 실눈을 뜨고 해를 올려다보았다. 해는 벌써 계곡 저편 산등성이를 따라 줄지어 선 나무들 위로 겨우 한 뼘 거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좋아, 가게 문 닫자."

내가 말했다.

그는 주유기에서 주유기로 바삐 오가며 작은 맹꽁이자물쇠로 받침대에 걸려 있는 노즐을 일일이 잠갔다.

"노란 작업복은 벗는 게 좋겠어."

클로드가 말했다.

"왜 그래야 되는데?"

"달빛 아래서 보면 꼭 등대처럼 빛날 거야."

"괜찮을 거 같은데."

"괜찮지가 않다니까. 제발 그 옷 벗고 가, 고든. 3분 있다 보자."

그는 주유소 뒤편에 있는 이동주택 안으로 사라졌고, 나는 집으로 들어가서 노란 작업복을 벗고 파란 옷으로 갈아입었다.

우리가 다시 밖에서 만났을 때 클로드는 검은색 바지와 짙은 암녹색 터틀넥 스웨터 차림이었다. 머리에는 갈색 천 모자를 차양이 눈 있는 데까지 내려오도록  눌러썼다. 꼭 아파치 분장을 한 나이트클럽 광대처럼 보였다.

"이 속에 있는 게 뭐야?"

그의 허리춤에 뭔가 불룩하게 나온 것을 보며 내가 물었다.

그는 스웨터를 들어 올리더니 커다랗고 얇은 흰색 면 자루 두장으로 단단히 동여맨 배를 보여주었다.

"여기다 넣어오려고."

클로드가 은밀하게 말했다.

"그렇군."

"어서 가자."

"아무래도 차를 가져가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그건 너무 위험해. 주차해놓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숲까지 5킬로미터 이상 올라가야 하잖아."

"맞아. 하지만 만일 우리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엔 족히 여섯 달은 유치장에서 썩어야 한다고. 그것쯤은 너도 알겠지?"

"그런 말 안 했잖아."

내가 항의했다.

"그랬나?"

"그럼 난 안 갈래. 사소한 일에 목숨 걸고 싶지 않아."

"걸어가면 괜찮을 텐데 뭐. 어서 가자."

하늘에 조그맣고 새하얀 조각구름들이 고요히 걸려 있는 쾌청한 초저녁이었다. 계곡은 선선하고 조용했다. 우리는 두 개의 산 사이에 옥스퍼드 방향으로 나 있는 도로 한쪽의, 풀이 덮인 가장자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건포도 가져왔어?"

클로드의 말이었다.

"주머니에 있어."

"좋아, 잘했어."

10분 후 우리는 도로에서 왼편으로 꺾어 양쪽에 높다랗게 산울타리가 쳐진 좁은 길로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쭉 오르막길이다

"파수꾼이 몇 명이나 되지?"

내가 물었다.

"세 명."

클로드는 반쯤 피운 담배를  집어던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원래 새로운 방법을 탐탁지  않아하는 거 알지?  특히 이런 일에는 말이야."

"물론 알지."

"하지만 고든, 이번에는 꼭 멋지게 성공할 것 같아."

"그럴까?"

"두말하면 잔소리지."

"네 생각이 맞아야 할 텐데."

"우린 밀렵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할 거야. 하지만 아무한테도 발설하면 안 되는 거 알지? 만에 하나 새어나가기라도 한다면 동네방네 우리를 흉내 내는 멍청이들이 넘쳐나서 결국 뀡이라고는 한 마리도 남아나지 않을 거야."

"입도 벙긋 안 할게."

"정말 자부심을 가질 만해. 수백 년 동안 이 문제를 연구한 수재들은 많지 만 너의 몇 분의 일만큼이라도 멋진 방법을 생각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그런데 왜 진작 얘기 안 했지?"

그가 물었다.

"물어본 적 없잖아."

내가 대꾸했다.

사실이었다. 사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클로드는 밀렵이라는 신성한 주제에 대해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 해본 적조차 없었다. 일을 끝낸 여름밤이면, 그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살금살금 이동주택을 빠져나와 숲 쪽으로 난 길로 사라지는 모습이 꽤 자주 눈에 띄었다. 가끔 주유소 창문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도대체 이 녀석이 무슨 꿍꿍이속인지, 쥐 죽은 듯 고요한 밤에 나무 아래에서 무슨 수작을 꾸미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한번 나가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올 때 직접 전리품을 들고 오는 법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오후가 되면 항상 우리가 먹을 꿩이나 토끼 또는 자고새 한 쌍이 주유소 뒤 창고에 매달려 있었다. 나로서는 어떻게 그가 그런 일을 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올여름에 그는 유난히 활동이 잦았고, 지난 두어 달 동안은 더욱 박차를 가하여 일주일에 네 번 혹은 다섯 번은 밖에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최근 들어 밀렵에 대한 그의 태도 전체에 이해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그는 전보다 더 진지하고 열성적인 태도로 묵묵히 이 일에 임했다. 나는 이것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성전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저주스러운 적을 향해 클로드 단독으로 벌이는 일종의 개인적인 전쟁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와의 전쟁인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땅 주인이자 꿩들의 주인이기도 한 그 유명한 빅터 헤이즐 씨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헤이즐 씨는 파이와 소시지 제조업자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부자였으며 그가 가진 땅만 해도 계곡 양쪽으로 수 킬로미터씩 뻗어 있었다. 그는 자수성가한 인물로, 멋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렇다고 덕망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도 한때는 신분이 보잘것없었지만 이제 그런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자신이 보기에 제대로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멋진 조끼를 입고 다녔고,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사냥 파티를 열기도 했다. 주중에는 공장으로 가는 길에 검은색 대형 롤스로이스를 타고 우리 주유소 앞을 지나치기도 했는데, 차가 휙 스쳐갈 때 가끔 운전대 위로 커다랗고 번들거리는 푸주한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눈에 띄기도 했다. 그의 얼굴은 햄처럼 발그스레하고 온통 물컹물컹한데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항상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여한 튼 어제 오후, 클로드가 불쑥 내게 말했다.

"오늘도 헤이즐의 숲에 갈 거야. 같이 안 갈래?"

"누구, 나?"

"이번이 올해에 꿩을 잡을 마지막 기회야. 사냥철이 토요일에 시작하니까 그때부터는 꿩이 사방으로 흩어질 거야. 뭐, 몇 마리 남아있지도 않겠지만."

"왜 갑자기 나를 끼워주는 거야?"

미심쩍은 생각에 내가 물었다.

"그냥, 고든. 별다른 뜻은 없어."

"위험할까?"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몸에 총이나 뭐 그런 걸 숨겨 가겠지?"

"총이라고! 지금껏 꿩을 총으로 쏜 사람은 없었다고. 몰랐어? 헤이즐의 숲에서 딱총이라도 쐈다가는 금방 파수꾼들한테 들키고 말걸."

"그럼 어쩔 건데?" 

"으음."

그는 이렇게 말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모습에서 뭔가 속내를 감춘 듯한 비밀스러움이 엿보였다. 긴 침묵이 흐른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야기해주면 비밀 지킬 수 있어?"

"물론이지."

"이 얘기는 평생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어, 고든."

"이거 대단한 영광인걸. 입 하나는 무거우니까 염려 말고 얘기해."

그는 머리를 돌려 옅은 색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소를 연상시키는 커다랗고 촉촉한 두 눈이 어찌나 가까이 다가왔던지, 눈동자에 비친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제부터 내가 세상에서 제일 확실한 꿩 밀렵 비법 세 가지를 전수해주지. 그리고 너는 이 짧은 여행에 초대된 손님이니까 오늘 우리가 어떤 방법을 쓸지 선택할 기회를 줄게. 어때?"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은데."

"함정 같은 건 없어, 고든. 맹세해."

"좋아, 어디 얘기해봐."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어. 자, 첫 번째 비법이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춘 후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꿩은 건포도라면 사족을 못 써."

그가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

"건포도?"

"그래, 그냥 보통 건포도 말이야. 그걸 아주 광적으로 좋아한다니까. 우리 아빠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발견한 사실이야. 그리고 앞으로 내가 말해줄 방법은 모두 아빠가 발명한 거야."

"언제는 아빠가 주정뱅이라더니."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밀렵에도 비상한 재주가 있었어. 아마 영국 역사상 최고의 밀렵꾼일걸. 아빠는 학자처럼 밀렵을 연구하셨다니까."

"그랬어?"

"농담 아니야. 정말이라고."

"그래, 믿어."

"아빠가 순전히 실험 목적으로 뒷마당에 일 등급 수평아리를 떼로 풀어놓고 키웠다는 얘기, 내가 했던가?"

"수평아리?"

"그래. 꿩을 잡을 묘안이 떠오를 때마다, 어떻게 되나 보려고 일단 수평아리에게 실험을 해봤어. 그렇게 해서 건포도를 발견한 거야. 말총 방법도 그렇게 발명했어."

클로드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란도 하려는 듯  어깨너머를 살폈다.

"이제 방법을 설명해줄게. 일단 건포도 몇 알을 하룻밤 물에 담가서 오동통하고 촉촉하고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그런 다음 질 좋고 뻣뻣한 말총을 조금 가져다가 손가락 한마디 길이로 자르는 거야. 그런 다음 건포도 알갱이 속에 말총을 밀어 넣어서 건포도 양쪽으로 손톱 만큼씩 삐져나오게 만들면 돼. 무슨 소린지 알겠어?"

"응."

"그럼, 꿩이 와서는 건포도를 먹을 거 아냐? 나무 뒤에서 그놈을 지켜보고 있다고 치자.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목에 박히겠군."

"그야 뻔한 거고. 여기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고. 이것도 아빠가 발견한 건데, 건포도가 목에 박히는 순간 새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거야! 놈은 그 자리에 박힌 것처럼 꼼짝 않고 서서, 꼭 피스톤처럼 우스꽝스럽게 목을 위아래로 펌프질 한다니까. 그런 그냥 숨어 있던 곳에서 조용히 걸어 나가 손으로 집어 오기만 하면 돼."

"그 말은 못 믿겠는걸."

"맹세해. 일단 말총이 목에 박히면, 귀에다 총을 들이대고 쏴도 꿈쩍 안 한다니까. 물론 이건 딱히 설명하기도 곤란하고 대수로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이 발견할 수 있는 건 아니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위대한 발명가인 아버지에 대한 추억에 잠긴 그의 두 눈은 자부심으로 반짝였다.

"그게 첫 번째 방법이야. 두 번째 방법은 더 간단해. 준비할 거라곤 낚싯줄이 전부야. 낚싯바늘에 건포도를 끼운 다음, 물고기를 낚듯 꿩을 낚으면 돼. 낚싯줄을 40미터쯤 풀고, 관목들 사이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꿩이 낚싯바늘을 물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그런 다음, 그냥 당기기만 하면 돼."

"그건 너희 아빠 작품 같지 않은데."

"낚시꾼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방법이야."

그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말했다.

"자기 성에 찰 만큼 바다로 못 나가는 낚시광들 말이야.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 방법이 향수 어린 전율을 주지. 이 방법은 다 좋은데 좀 시끄러운 게 흠이야. 꿩을 잡아당길 때, 그놈들이 지독히도 꺽꺽 울어대거든 그럼 숲 속에서 파수꾼들이 전부 뛰어올 거란 말이지."

"세 번째 방법은 뭔데?"

내가 물었다.

"어, 세 번째야말로 밀렵 법의 진수지. 우리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안해낸 방법이야."

"최후의 역작이라!"

"맞아, 고든. 난 아직도 그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해. 이룡일 아침이었는데 아빠가 커다란 수평아리를 손에 들고 갑자기 부엌으로 들어와서 이러시는 거야. '드디어 해낸 것 같다.' 얼굴에는 희색이 돌고 두 눈은 긍지로 빛났지. 아빠는 살금살금 걸어 들어와서 식탁 한가운데에 수평아리를 올려놓고는 말했어. '확실히 이번에는 잘된 것 같아.' '뭐가 잘됐다는 거예요?' 싱크대에서 일하시던 엄마가 대꾸하더니, 아빠를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어. '여보, 그 더러운 것 좀 식탁에서 내려놓지 그래요.' 수평아리 머리에는 아이스크림 콘을 엎어놓은  것처럼 재미나게 생긴 작은 종이 모자가 씌워져 있었고, 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듯 손으로 모자를 가리키셨지. '한번 건드려보렴. 그놈은 한 발짝도 못 움직인단다.' 아빠가 말했어. 수평아리는 한 발로 종이 모자를 긁어대며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지만 마치 풀로 붙인 듯 벗겨지지 않았어.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새들은 눈을 가려놓으면 도망가지 못하는 법이지.' 아빠는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수평아리를 콕콕 찔러 식탁 위에서 밀기 시작했어. 그래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더라고. '이놈 가져가.' 아빠는 엄마에게 말했어. '내가 이 방법을 발명한 기념으로 이놈을 잡아서 저녁상에 올리자고.' 그런 뒤 곧바로 내 팔을 잡더니 빠르게 문 쪽으로 걸어갔어. 우리는 들판을 가로질러서 해든햄 저편 한때 버킹엄 공작의 땅이었던 거대한 숲 속으로 갔고, 두 시간도 안 돼서 통통하게 살이 오른 사랑스러운 뀡을 다섯 마리나 잡았지. 그냥 가게에서 뀡을 사는 것만큼이나 간단하더라고."

한숨 돌리려고 클로드가 말을 멈추었다. 경이로운 유년 시절의 추억을 뒤돌아보는 그의 두 눈은 꿈을 꾸는 것처럼 크고 촉촉했다.

"이해가 잘 안 돼. 어떻게 숲 속에 사는 꿩의 머리에 종이 모자를 씌운다는 거야?"

내가 물었다.

"넌 상상도 못할걸."

"그래 짐작이 안 가."

"그럼 내 얘길 들어봐. 우선 땅에 작은 구멍을 파는 거야. 그런 뒤, 종이를 구부려 원뿔형을 만든 다음, 컴처럼 뻥 뚫린 쪽이 위로 오게 해서 구멍에 끼워 넣어. 그리고 컴 안쪽에 끈끈이를 바르고 건포도를 몇 알 떨어뜨리는 거야. 동시에 주변 땅에 원뿔까지 이어지도록 일렬로 건포도를 뿌리면 돼. 꿩이 그 흔적을 따라와서 건포도를 먹으려고 정신없이 머리를 구멍에 집어넣으면, 다음 순간 모자가 씌워져 눈을 가리고 결국 아무것도 못 보게 되지. 누가 생각해냈는지 정말 기막히지 않아, 고든? 그렇게 생가 안 해?"

"너희 아빠는 천재 셔."

내가 말했다.

"이제 네가 골라봐. 세 가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방법을 고르면 오늘 밤 그 방법을 쓸 거야."

"그런데 세 가지 다 조잡하고 시시하다는 생각이 안 드니?"

"조잡하다고?"

클로드는 아연실색해서 소리쳤다.

"세상에! 지난 6개월 동안 돈 한 푼 안 내고 거의 매일 꿩고기를 구워 먹게 해 준 게 누군데?"

그는 몸을 돌려 작업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내 말에 무척이나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말했다.

"같이 갈래, 말래?"

"갈게. 그런데 우선 하나만 물어볼게. 나한테 괜찮은 생각이 있거든."

"참아줘, 밀렵의 '밀'자도 모르면서 무슨 얘길 하려고 그래."

"지난달에 내가 허리 아플 때 의사가 준 수면제 기억나?"

"수면제가 어떻다는 거야?"

"꿩한테라고 수면제가 통하지 말란 법이 있을까?"

클로드는 눈을 감고 딱하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잠깐 내 얘기 들어봐."

"생가해볼 가치도 없어. 세상에 그런 이상한 빨간 캡슐을 삼킬 새가 어디 있어? 기껏 생각해낸 게 고작 그거야?"

"건포도를 잊은 모양인데, 자 들어봐. 우선 건포도를 구해야 돼. 건포도를 물에 담가서 불려. 그런 다음 면도칼로 한쪽에 조그만 흠집을 내고 속을 약간 파놓는 거야. 그리고 빨간 수면제 캡슐을 열고, 가루를 그 속에 쏟아 넣어. 그러고 나서  바늘하고 실로 아주 꼼꼼하게 그 구멍을 꿰매면?"

곁눈으로 보니 클로드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자, 이제 세코 날(원래는 보편적으로 처방되는 수면제였으나 지금은 환각제로 사용되고 있는 붉은색 캡슐 약 - 옮긴이) 0.2그램이 든 건포도를 마련했다 치자. 그럼 어떻게 되겠냐. 어지간하면 사람도 의식을 잃을 텐데, 새라면 오죽하겠어!"

나는 클로드가 내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 10초간 말을 멈추었다.

"게다가, 이 방법을 쓰면 정말 크게  한탕할 수 있어. 원한다면 건포도 스무 알도 준비할 수가 있다고. 우린 그저 해 질 녘에 사육장 주변에 건포도를 뿌려놓고 가면 돼. 반시 간 훔쯤 우리가 돌아와보면 약효가 슬슬 나타나기 시작해서 나무 위에서 잠든 꿩들은 갑자기 어지럼증 때문에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으려고 하겠지. 건포도를 한 알이라도 먹은 꿩은 곧 졸도해서 땅에 떨어질 거야. 이봐, 꿩들이 나무에서 사과처럼 떨어질 거라고!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가서 줍기만 하면 되는 거야!"

클로드는 황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세상에."

그가 나지막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파수꾼들이 우릴 잡지도 못할 거야. 우린 그냥 여기저기 건포도를 뿌리며 숲을 걸어 다니기만 할 테니까, 우리를 지켜본다 해도 우리가 뭘 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할 거야."

내가 말했다.

"고든, 그 방법이 성공한다면, 이건 밀렵 역사에서 혁명이 될 거야."

클로드는 한 손을 내 무릎에 올려놓고 별처럼 반짝거리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 좋은데."

"약이 얼마나 남았어?"

"마흔아홉 알. 쉰 알이 있었는데, 한 알만 먹고 그대로야."

"마흔아홉 알로는 부족한데. 적어도 2백 알은 필요해."

"정신 나갔어?"

내가 소리쳤다.

그는 천천히 문 옆으로 걸어나가서는 내게 등을 돌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최소한 2백 알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그가 조용히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이번이 사냥철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더 이상 못 구해."

"너도 우리가 빈손으로 돌아오길 바라진 않겠지?"

"하지만 왜 꼭 그렇게 많아야 돼?"

클로드는 고개를 돌려 커다랗고 순진무구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 많으면 안 되지? 많아도 탈이야?"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고! 이 사고뭉치가 빅터 헤이즐 씨의 사냥 파티 첫날을 망쳐놓으려는 거구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2백 알을 구하면 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불가능해."

"시도는 해볼 수 있잖아, 안 그래?"

헤이즐 씨의 파티는 매년 10월 1일에 시작되는 꽤나 유명한 행사였다.

약골로 보이는 트위드 양복 차림의 신사들이 이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총을 운반하는 수행원과 개와 부인을 동반하고 수 킬로미터 밖에서 자가용을 타고 오곤 했다. 그들 중에는 행세 깨나 하는 사람도 있었고 단순히 돈만 많은 사람도 있었다. 꿩은 항상 모두에게 고루 돌아갈 정도로 충분했는데, 매년 여름마다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서 숲에 정기적으로 수십 마리씩 꿩을 채워놓는 덕분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꿩 한 마리를 사냥하기에 적당한 크기로 키우는 비용이 5파운드(빵 2백 덩이에 해당하는 금액)는 족히 넘는다고 했다. 하지만 헤이즐 씨에게 이 일은 돈을 쏟아 부을 가치가 있었다. 단 몇 시간 동안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느 이 작은 세계에서 거물이 될 수 있었고, 심지어 주지사까지도 작별인사를 할 때 그의 등을 두드리며 이름을 기억해내려는 성의라도 보였기 때문이다.

"양을 좀 줄이면 어떨까? 캡슐 하나에 든 약을 건포도 네 개에 나눠 담으면 어때?"

클로드가 말했다.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꿩 한 마리에 4분의 1 캡슐이 충분할까?"

이 친구 배짱 하나만큼은 알아줄 만했다. 사냥철에 숲에 있는 꿩을 단 한 마리라도 잡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엄청나게 많은 꿩을 훔치려고 계획을 하고 있는 것이다. 

"4분의 1 캡슐은 꽤 많은 양이야."

내가 말했다.

"확실해?"

"네가 먹는다 해도 효과가 있을 거야. 그런데 복용하는 양은 몸무게에 비례하니까 필요한 양보다 스무 배는 더 넣는 셈이라고."

"그럼 캡슐 한 알을 4 등분하자."

그는 손을 비비며 이렇게 말하고는 계산을 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글머 우린 검포도 백아흔여섯 알 준비할 수 있겠네!"

"너 그게 얼마나 성가신 일인지 알기나 해? 준비하는 데 족히 몇 시간은 걸릴 거야."

"그럼 어때?"

그가 소리치더니 덧붙였다.

"대신 내일 가면 되잖아. 밤새 건포도를 물에 담가놓았다가,  아침하고 오후 내내 준비하면 돼."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한 일 그대로였다.

그로부터 스물네 시간 뒤에 우리는 이곳에 왔다. 우리는  40분가량 쉬지 않고 걸어서 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진 지점 가까이에 이르렀다. 길은 산등성이를 따라 꿩들이 사는 커다란 숲 쪽으로 뻗어 있었다. 이제 1.5킬로미터 정도 남았다.

"설마 파수꾼이 총을 들고 지키지는 않겠지?"

내가 물었다.

"파수꾼들이야 전부 총이 있지."

내가 전부터 우려하던 바였다. 클로드가 말을 이었다.

"산짐승 퇴치용이야."

"아하."

나는 안심의 탄성을 질렀다.

"물론 이따금씩 밀렵꾼에게 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농담하는 거지?"

"천만에. 하지만 등 뒤에서만 쏴. 도망갈 때만 쏜단 말이야.  50미터쯤 떨어져서 다리를 공격하길 좋아하지."

"말도 안 돼! 그건 범죄 행위잖아?"

내가 소리쳤다.

"밀렵은 범죄 행위가 아니고?"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는 얼마간 아무  말없이 걸었다. 이제 해는 우리 오른편의 높다란 산울타리 아래로 내려가 있어서 길에 그늘이 졌다.

"지금이 30년 전이 아닌 게 다행인 줄 알아."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밀렵꾼을 보는 즉시 쏴버렸거든."

"너, 그 소리를 믿어?"

"내가 직접 목격한 사실인걸. 내가 어렸을 때, 부엌에서 아빠는 식탁에 엎드려 있고 엄마는 그 위로 뭄을 숙인 채 뭔가를 하고 있는 걸 자주 봤어. 알고 보니 엄마는 감자 씨눈 파내는 칼로 아빠 엉덩이에서 포도탄을 파내는 거였어."

"그만 해! 그 말을 들으니 불안해지잖아."

"내 말을 믿지, 그렇지?"

"그래, 믿어."

"말년에는 온몸이 작고 하얀 흉터로 뒤덮여서 꼭 눈 오는 거 같았다니까."

"알 만하다."

"사람들은 그걸 밀렵꾼의 궁둥이라고 불렀는데, 여하튼 동네에서 그런 흉터가 하나라도 없는 남자가 없었어. 하지만 우리 아빠가 단연 챔피언이었지."

클로드가 말했다.

"대단하신 양반이군!"

내가 맞장구를 쳤다.

"아빠가 지금 함께했으면 좋을 텐데. 오늘 우리와 함께 이 일을 할 수만 있다면, 아빠는 뭐든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으셨을 거야."

클로드가 아쉬워하며 말했다.

"내 자리라도 양보해드릴 텐데. 기꺼이."

내가 말했다.

정상에 다다르자, 우리 눈아에 버티고 선 거대한 숲이 보였다. 해가 나무 뒤로 넘어가고 있는 참이라 숲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나무들 사이로 조그만 황금색 빛들이 반짝였다.

"건포도 이리 줘."

클로드가 말했다.

그는 내가 넘겨준 건포도 봉지를 주머니에 살짝 집어넣었다.

"일단 숲 속에 들어가면 절대 말을 해선 안 돼. 나뭇가지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만 따라오라고."

5분 뒤 우리는 그곳에 도착했다. 길은 숲까지 바로 이어진 다음 숲의 가장자리를 따라 3백 미터 정도 뻗어나갔다. 숲과 길을 구분 짓는 것이라고는 낮은 산울타리뿐이었다. 클로드는 네 발로 산울타리를 통과했고,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숲 속은 어둡고 선선했다. 이제 햇빛은 전혀 들지 않았다.

"좀 으스스하다."

내가 말했다.

"쉬-잇!"

클로드는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 그는 내 앞에서 까치발로 축축한 땅을 살며시 디디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머리를 계속 움직였고, 눈을 ㅗ양옆을 천천히 살피며 위험의 징후를 찾았다. 나도 따라 해보려 했지만, 나무마다 숨어 있는 파수꾼들의 환영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곧 포기해버렸다.

그때, 빽빽한 나무가 걷히면서 넓은 하늘의 모습을 드러냈다. 숲 속에 있다던 공터가 틀림없었다. 클로드의 말에 따르면, 보통 7월 초에 어린 새들을 숲 속으로 데려오는데, 이 새들을 파수꾼들이 먹이와 물을 주며 보살피는 곳이 바로 이 공터이며, 들여온 새들 중 상당수는 습관 때문에 사냥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여기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공터에는 늘 꿩이 많아."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파수꾼도 많겠지."

"그래, 하지만 사방에 덤불이 무성하니까 우리한테 유리해."

우리는 몸을 숙인 자세로 몇 차례 전력질주를 해서 앞으로 나갔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가고, 멈추고, 기다리고, 귀 기울이고 다시 달리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한 끝에, 우리는 공터 가장자리에 있는 커다란 오리나무 덤불 뒤에 무사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클로드는 싱긋 웃으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더니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꿩들을 가리켰다.

그곳은 정말 새들로 가득했다. 나무 그루터기 사이를 활보하고 다니는 새들이 줄잡아 2백 마리는 됐다.

"내 말이 무슨 말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지?"

클로드가 속삭였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밀렵꾼의 꿈이 실현되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꿩들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몇 마리는 우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곳에서 겨우 여남은 발짝이나 떨어졌을까? 포동포동하고 부드러운 갈색 털을 가진 암놈들은 어찌나 살이 쪘는지 걸을 때마다 가슴털이 땅에 스칠 정도였다. 날씬하고 수려한 용모의 수놈들은 꼬리가 길었고 빨간 색안경을 낀 것처럼 눈가에 선홍색 테두리가 있었다. 나는 클로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입을 약간 벌린 채 흐릿한 눈으로 꿩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를 닮은 커다란 얼굴은 황홀령에 빠진 표정이었다. 

이토록 굉장한 사냥감을 발견한 밀렵꾼들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럴 때 밀렵꾼들은 보석가게 쇼윈도에 진열된 ㅋ커다란 에메랄드를 바라보는 여자들과 흡사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들 쪽이 노리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밀렵꾼 엉덩이에 박힌 포도탄쯤은 여자들이 기꺼이 감수하려는 대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봐, 저 파수꾼이 보여?"

"어디?"

"저쪽 커다란 나무 옆에. 잘 봐."

"맙소사!"

"괜찮아. 저치는 우릴 못 봐."

우리는 몸을 낮추고 파수꾼을 지켜보았다. 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머리에 모자를 쓴 자그마한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키 작은 말뚝처럼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가자."

내가 속삭였다.

파수꾼의 얼굴은 모자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여기 더 이상 있기 싫어."

내가 다시 말했다.

"쉿."

그는 파수꾸에게서 눈을 뜨지 않은 채 천천히 주머니로 손을 뻗어 건포도 한 알을 꺼냈다. 오른쪽 손바닥에 건포도를 놓고 재빠르게 손목을 움직여서 건포도를 공중으로 높이 던졌다. 나는 건포도가 덤불 너머로 날아가서, 고목나무 그루터기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암꿩 두 마리의 1미터 앞에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두 마리 모두 건포도가 떨어진 쪽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들 중 한 마리가 폴짝폴짝 뛰어가서 잽싸게 땅을 쪼았다. 이제 일은 다 된 것이다.

나는 파수꾼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움직임이 없었다.

클로드는 두 번째 건포도를 땅에 던졌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이때 파수꾼이 뒤쪽 숲은 수색하려고 몸을 돌리는 못브이 보였다.

클로드는 번개처럼 재빠르게 주머니에서 종이봉지를 꺼내더니 컵처럼 오므린 오른손에 건포도를 수북이 쏟아 부었다.

"그만."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는 팔을 한번 크게 휘둘러서 관목 너머로 건포도 한 줌을 모두 던졌다.

건포도가 마른 잎에 떨어지는 빗줄기처럼 후두둑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그곳에 있는 꿩들은 모두 건포도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거나 소리를 들었다. 놈들은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보물을 찾으려고 바삐 움직이ㅣㄱ 시작헀다.

이때, 목에 스프링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파수꾼이 머리를 휙 돌렸다. 꿩들은 모두 미친 듯 건포도를 쪼아 먹고 있었다. 파수꾼은 빠르게 앞으로 두 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동안 나는 그가 주변을 샅샅이 수색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멈춘 채 머리를 들고 눈으로 공터 주변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따라와 머리 좀 숙이고."

클로드가 속삭였다. 그는 무슨 원숭이과 짐승처럼 민첩하게 네 발로 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뒤따랐다. 코를 땅에 처박고 큼직하고 빵빵한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채 실룩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 어떻게 '밀렵꾼 궁둥이'가 이 업계에서 일종의 직업병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자세로  백 미터 정도를 기어갔다.

"지금이야, 뛰어."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는 일어서서 뛰기 시작했고, 몇 분 후 산울타리를 통과해 좁은 길로 들어섰다. 이곳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사랑스러운 안전지대였다.

"일이 척척 진행되네. 정말 끝내주지?"

숨을 헐떡이며 클로드가 말했다.

다홍빛으로 상기된 그의 큰 얼굴은 승리감으로 빛났다.

"엉망진창이야."

내가 말했다.

"뭐라고?!"

그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이게 엉망진창 아니고 뭐야. 이제 돌아갈 수도 없어. 숲에 누가 있다는 걸 파수꾼이 알아버렸잖아."

"파수꾼은 쥐뿔도 몰라. 몇 분 후면 숲 속은 칠흑처럼 캄캄해질 거고 파수꾼은 저녁 먹으러 집으로 내려갈 거야."

"나도 따라가야겠군."

"왜 그래. 넌 훌륭한 밀렵꾼이잖아."

클로드가 말했다.

그는 산울타리 아래의 풀 두덩에 앉아 담뱃불을 붙였다.

이미 해가 져서 어슴푸레해진 청회색 하늘에는 가금 희미한 금빛이 깜빡였다. 우리 뒤쪽 숲 속에서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공간과 그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회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수면제가 약효를 내려면 얼마나 걸리지?"

클로드가 물었다.

"저기 누가 온다."

내가 말했다.

남자는 소리도 없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는데, 내가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겨우  30미터밖에 있었다.

"젠장, 한 놈이 더 있었군."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는 파수꾼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엽총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고, 검은색 래브라도 레트리버 한 마리가 그의 발뒤꿈치를 쫓고 있었다. 몇 발짝 밖에서 그가 멈춰 서자, 개도 따라 멈추고는 그의 뒤에 서서 다리 사이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안녕하세요."

클로드가 싹싹하고 친근하게 말했다.

파수꾼은 큰 키에 예리한 눈, 강인해 보이는 뺨과 위압적이고 거친 손을 가진 깡마른 남자로, 나이는 마흔 살쯤 되어 보였다.

"댁이 누군지 알고 있소. 댁들 둘 다 말이오."

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조용히 말했다.

클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주유소 사람들 맞죠?"

얇고 건조한 그의 입술은 거무스름한 각질로 덮여 있었다.

"간선도로 주유소에서 일하는 커비지 씨와 호즈 씨 아니오?"

"지금 게임 하자는 겁니까? 스무고개라도 하자는 거예요?"

클로드가 말했다.

파수꾼은 입 안 가득 고인 침을 뱉어냈다. 침은 공중으로 날아가서 클로드의 발치에서 15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땅에 퐁 소리를 내며 떨어졌는데, 마치 그곳에 서식하는 어린 굴처럼 보였다.

"썩 꺼져요. 당장 나가란 말이오."

클로드는 풀 두덩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땅에 떨어진 침 덩어리를 보았다.

"어서 나가시오."

파수꾼은 말을 할 때마다 윗입술이 잇몸 위쪽까지 들려서 변색한 작은 이들이 드러났다. 그중 몇 개는 까만색이었고, 나머지는 황토색이거나 귤색이었다.

"여기는 사유지가 아니잖소. 그러니 상관 말아요."

클로드가 말했다.

파수꾼은 왼쪽 겨드랑이에 꼈던 총을 오른쪽으로 옮겼다.

"딴 맘을 품고 여길 기웃거리는 거 다 알고 있소. 난 당신들을 체포할 수도 있단 말이오."

"무슨 근거로?"

클로드가 말했다.

이런 모든 상황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난 한참 동안 댁들 행동을 지켜봤소."

파수꾼이 클로드를 보며 말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산책이나 마저 할까?"

내가 말했다.

클로드는 피우던 담배를 손으로 튕겨내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대답했다.

"좋아, 가자."

우리는 파수꾼을 뒤로하고 다시 샛길을 따라 어슬렁어슬렁 내려갔다. 곧 우리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어슴푸레한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저자가 파수꾼 왕초야. 이름은 라베츠고."

클로드가 말했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

내가 말했다.

"이리로 와."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 왼쪽에 밭으로 통하는 문 하나가 있었다. 우리는 그 문을 타고 넘어가서 산울타리 뒤에 몸을 숨기고 앉았다.

"라베츠도 금방 저녁 먹으러 갈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는 산울타리 뒤에 조용히 앉아서 파수꾼이 우리를 지나쳐 집으로 가기를 기다렸다. 하늘에는 별이 몇 개 보이고, 우리 뒤쪽 산 너머 동쪽에서 환한 하현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온다. 움직이지 마."

클로드가 속삭였다.

파수꾼이 좁은 길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개가 종종걸음을 치며 그의 뒤르 ㄹ쫓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산울타리 사이로 지켜보았다.

"오늘은 다시 안 올 거야."

클로드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파수꾼은 어디 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 법이야. 아마 우리 집 박에 숨어서 우리가 돌아오는 모습을 감시하겠지."

"그럼 더 큰일이잖아."

"그게 그렇지가 않아. 집에 가기 전에 밀렵한 물건을 어딘가 숨겨놓으면 돼. 그럼 우릴 못 건드릴 거야."

"다른 파수꾼은 어쩌고? 숲 속에 있던 사람 말이야."

"그치도 벌써 집에 갔어."

"어떻게 장담하지?"

"나는 몇 달 동안이나 저치들을 연구해왔어. 정말이야, 고든. 난 그들의 버릇을 전부 알아. 그러니 위험할 게 없어."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를 따라 숲으로 돌아갔다. 숲 속은 칠흑같이 캄캄하고 쥐 죽은 듯 고요해서, 우리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을 때마다 마치 성당 안을 걷고 있는 것처럼 발소리가 숲의 벽에 부딪혀 사방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우리가 건포도를 던진 곳이 여기야."

클로드가 말했다.

나는 관목 사이로 주위를 살폈다.

달빛 아래 숲 속의 공터는 침침하고 뿌옇게 보였다.


"파수꾼이 집에 간 거 확실해?"

"틀림없어."

모자 차양 아래로 클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창백한 입술, 매끈하고 파리한 뺨, 그리고 미세한 흥분의 불꽃이 천천히 넘실대며 춤추는 커다란 두 눈.

"지금쯤 꿩들이 잠들었을까?"

"그래."

"어디서 자는데?"

"여기저기. 하지만 멀리 가진 않았을 거야."

"이제 뭘 하지?"

"여기서 기다리는 거야. 손전등 하나 줄게."

클로드는 이렇게 말하고는 내게 만년필처럼 생긴 소형 손전등 하나를 건네줬다.

"필요할 거야."

기분이 좀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무에 앉아서 자는 놈들을 한번 찾아볼까?"

내가 말했다.

"안 돼."

"꿩들은 잠을 어떻게 자는지 궁금하단 말이야."

"자연학습 나온 줄 알아? 제발 좀 조용히 해."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거기에 서 있었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드네. 잠자는 동안 꿩이 나무 위에서 균형을 유지할 줄 안다면, 수면제를 먹었다고 자다가 떨어지라는 법이 없잖아."

내가 말하자, 클로드가 재빨리 나를 보았다.

"따지고 보면 죽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잠든  것뿐이잖아."

내가 덧붙였다.

"놈들은 약에 취했어."

클로드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도 깊은 수면 상태에 불과해. 깊이 잠들었다고 떨어지라는 법이 어디 있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닭으로 실험을 해볼걸. 아빠 같았으면 그랬을 거야."

클로드가 말했다.

"너희 아빠는 천재셔."

내가 말했다.

그때 우리 뒤에 있는 나무에서 자그맣게  쿵하는 소리가 났다.

"이봐!"

"쉬이 잇!"

우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

쿵.

"또 그 소리다!"

모래주머니가 어깨 높이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낮고도 깊은 소리였다.

쿵!

"꿩이야!"

내가 소리쳤다.

"잠깐!"

"꿩이 분명하다고!"

쿵! 쿵!

"네 말이 맞아!"

우리는 숲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다들 어디 갔지?"

"저기! 두 마리는 저기 있다!"

"이럴 줄 알았어."

"계속 찾아봐! 멀리 가진 않았을 테니까."

클로드가 큰소리로 말했다.

수색을  시작한 지 1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그가 외쳤다.

"여기 하나 있어!"

내가 그에게 갔을 때 그는 멋진 장끼 한 마리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우리는 손전등으로 녀석을 자세히 관찰했다.

"완전히 뻗었구먼."

클로드가 말했다.

"아직 살아 있어. 심장 고동이 느껴져. 하지만 완전 혼수상태야."

쿵!

"또 떨어진다."

쿵! 쿵!

"두 마리 더!"

쿵!

쿵! 쿵! 쿵!

"세상에나!"

쿵! 쿵! 쿵! 쿵!

쿵! 쿵!

꿩들이 나무 위에서 여기저기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어둠 속에서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하마터면, 한 무더기 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질 뻔했다. 나는 꿩들이 떨어질 때 나무 바로 아래 서 있었기 때문에 세 마리 모두 즉시 발견했다. 두 마리는 장끼였고 한 마리는 까투리였다. 그들의 몸은 흐느적거렸고,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으며, 손에 느껴지는 깃털의 감촉이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얘들을 어디다 놓지?"

나는 꿩들의 다리를 잡은 채 큰소리로 물었다.

"여기에 놔, 고든! 여기 훤한 데에 그냥 쌓아놓으라고!"

클로드는 달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양손에 꿩을 가득 들고 공터 언저리에 서 있었다. 얼굴빛은 환했고, 커다란 두 눈은 경탄으로 반짝였다. 그는 세상이 온통 초콜릿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방금 발견한 어린아이마냥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쿵!

쿵! 쿵!

"너무 많으니까 좋은 지도 모르겠다."

내가 말했다.

"아름다워."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손에 든 꿩을 던지고는 좀 더 누우려고 뛰어갔다.

쿵! 쿵! 쿵! 쿵!

쿵!

이제 꿩들을 찾기는 쉬었다. 나무마다 한두 마리씩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재빨리 여섯 마리를 주웠다. 양손에 세 마리씩 들고 뛰어가서 꿩들이 쌓인 곳에 던졌다. 그리고 여섯 마리 더.  그다음에 또 여섯 마리.

꿩들은 계속 쉴 새 없이 떨어졌다.

클로드는 이제 환희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채, 미치광이 유령처럼 정신없이 나무 사이를 뛰어다녔다. 어둠 속에서 너울거리는 그의 손전등 불빛이 보였다. 그는 새로운 꿩을 찾을 때마다 조그맣게 승리의 탄성을 질렀다.

쿵! 쿵! 쿵!

"재수없는 헤이즐이 이 소릴 들어야 하는 건데."

클로드가 소리쳤다.

"목소리 좀 낮춰. 불안해지잖아."

"뭐가 불안해?"

"목소리 좀 낮추라니까. 파수꾼이 안 갔으면 어쩌려고 그래."

"파수꾼은 무슨! 그치들은 지금 모두 저녁을 먹고 있다니까."

삼사 분 동안 꿩들은 계속 떨어졌다. 그러다가 떨어지는 소리가 멎었다.

"계속 찾아봐."

클로드가 소리쳤다.

"땅에 떨어진 놈들이 아직 많아."

"아무 탈 없을 때 나가야 되지 않을까?"

"그럴 수 없지."

우리는 수색을 계속했다. 우리는 동서남북 할 것 없이 공터 백 미터 반경 내에 있는 나무들을 모두 수색했다. 아마도 꿩이란 꿩은 모두 찾아냈을 것이다. 우리가 꿩들을 한데 모은 장소에는 커다란 장작더미처럼 꿩들이 쌓여 있었다.

"이건 기적이야. 정말로 기막힌 기적이라고."

클로드가 말하며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진 채 자신의 수확물을 바라보았다.

"이제 각자 대여섯 마리씩 가지고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내가 말했다.

"몇 마린지 세어보고 싶어, 고든."

"그럴 시간이 없어."

"세어봐야 해."

"안 돼. 어서 가자."

내가 말했다.

"하나...... 둘....... 셋....... 넷......"

그는 꿩을 한 마리씩 들어서 한쪽에 조심스럽게 놓으며 아주 꼼꼼히 세기 시작했다. 이제 달은 머리 바로 위에 떠서 공터 전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여기 이렇게 있을 순 없어."

내가 말했다. 나는 두세 발짝 뒷걸음질 쳐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가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백열일곱......백열여덟......백열아홉.....백스물!"

그가 흥분해서 외치고 있었다.

"자그마치 백스무 마리야! 이건 사상 최대야!"

나는 그 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 아빠가 하룻밤에 잡은 것치고 최고로 많이 잡은 게 열다섯 마리였어. 아빠는 그 주 내내 술독에 빠져 살았지!"

"그래, 네가 세계 챔피언이야. 이제 준비됐어?"

내가 물었다.

"잠깐만."

그는 이렇게 말한 뒤, 스웨트를 들어 올리고는 허리에 감았던 커다란 흰색 부대자루 두 개를 풀어냈다.

"자, 이거 받아."

그는 그중 하나를 넘겨주며 말했다.

"어서 담아."

달빛이 환해서 자루 바닥에 인쇄된 작은 글자까지 보일 정도였다.

런던 S.W. 17, 케스톤 제분소 J.W. 크럼프.

"그놈의 누렁니가 지금 나무 뒤에서 우릴 보고 있는 거 같지 않냐?"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치는 아까 말한 대로 주유소에서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구."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는 꿩을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몸이 흐늘흐늘하고 목도 축 늘어졌지만 깃털 밑에서 아직 온기가 느껴졌다.

"길에 택시가 대기하고 있을 거야."

클로드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난 항상 택시를 타고 가, 고든. 몰랐어?"

나는 몰랐다고 대답했다.

"택시는 비밀 보장이 되잖아. 운전사만 빼면 안에 누가 탔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아빠한테 배웠지."

클로드가 말했다.

"운전사 누구?"

"찰리 킨치, 아저씨는 이 일을 아주 좋아해."

작업이 끝나자 우리는 꿩을 담은 자루를 어깨에 메고 비틀비틀 걸어서 캄캄한 숲을 지나 길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걸 들고 마을까지 걸어갈 순 없다구."

내가 말했다. 내 자루에는 꿩이 60마리나 들어 있어서 무게가 최소한 70킬로그램은 나갔다.

"걱정 마. 찰리 아저씨는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어."

클로드가 말했다.

우리는 숲의 언저리로 와서 산울타리 사이로 길을 보았다.

"찰리 아저씨."

클로드가 나지막한 소리로 부르자 5미터쯤 밖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은 노인이 달빛 속으로 머리를 내밀더니 잇몸만 남은 입을 벌리고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 우리는 자루를 땅에 질질 끌며 산울타리 사이로 빠져나갔다.

"어서들 와! 그게 뭔가?"

찰리가 말했다.

"양배추예요. 문 좀 열어주세요."

클로드가 말했다.

2분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마을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이제 환호할 일만 남았다. 클로드는 흥분과 자긍심에 부풀어 한껏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그는 연신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고 찰리의 어깨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어때요, 아저씨? 한 건치고는 괜찮죠?"

찰리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계속 우리 둘 사이 택시 바닥에 놓은 불룩한 자루를 돌아보며 말했다.

"맙소사! 어떻게 한 거야?"

"여섯 쌍은 아저씨 몫이에요."

클로드의 말이었다.

"올해엔 빅터 헤이즐 사냥 개시일에 꿩 구경하기 힘들겠는걸."

찰리가 말했다.

"아마 그럴걸요, 아저씨. 그러기가 십상이죠."

"도대체 백이십 마리나 되는 꿩을 어쩌려고?"

내가 물었다.

"겨우내 꽁꽁 얼려두면 돼. 주유소 냉동실에 개밥 하고 같이 보관하지 뭐."

클로드가 말했다.

"설마 오늘 밤에 할 건 아니지?"

"그래. 오늘 밤은 아니야. 오늘은 배시네 집에 맡길 거야."

"베시 누구?"

"베시 오간."

"베시 오간이라고?"

"항상 베시가 내 운반책이었는데, 몰랐어?"

"전혀 몰랐지. 정말 의외네. 베시라면 잭 오간 목사님의 부인이잖아."

"항상 신망 받는 여자를 운반책으로 선택해야 해. 내 말이 맞죠, 아저씨?"

클로드는 찰리에게 동조를 구했다.

"베시는 정말 똑똑한 여자지."

찰리가 대꾸했다.

우리는 이제 마을을 달리고 있었다. 가로등의 아직 꺼지지 않은 거리에는 술집에서 나와 집으로 향하는 남자들이 여기저기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생선가게 주인 윌 프라틀리 씨가 옆문을 통해 조용히 자기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바로 위에서 그의 아내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빼고 있었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목사님은 꿩 구이를 유달리 좋아해."

클로드의 말이었다.

"그분은 열여드레 동안 꾸엉르 매달아놓았다가 두어 번 흔들지. 그러면 깃털이 전부 빠지거든."

찰리가 한마디 거들었다.

택시는 좌회전해서 대문을 통과해 목사관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는 불빛 한 점 없었고 우리와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클로드와 나는 집 뒤쪽에 있는 석탄창고에 꿩을 쏟아놓은 다음, 찰리 킨치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달빛을 맞으며 빈손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주유소로 들어가는 모습을 라베츠가 보았는지 어땠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베시가 온다."

다음날 아침 클로드가 내게 말했다.

"누구 말이야?"

"베시, 베시 오간."

그는 자랑스러운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장군이 자기 휘하에 있는 가장 용맹스러운 부관을 칭할  때처럼 은근히 뻐기는 듯한 태도였다.

나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저기 있어!"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멀리 길 아래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자그마한 여자의 형체가 보였다.

"도대체 뭘 밀고 오는 거야?"

내가 물었다.

클로드는 음흉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노획물을 운반하는 안전한 방법은 딱 하나야. 바로 아기 밑에 숨겨 오는 거지."

"그래, 정말 그렇겠군."

내가 중얼거렸다.

"지금 저기엔 두 살배기 크리스토퍼 오간이 탔을 거야. 그 애는 정말 귀여워, 고든."

덮개를 걷은 유모차에 높다랗게 올라앉은 아기의 모습이 조그만 점처럼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

"저 꼬맹이 밑에 적어도 육칠십 마리는 깔려 있을 거야. 한번  상상해봐."

클로드가 흐뭇해하며 말했다.

"어떻게 유모차에 육칠십 마리나 들어가?"

"속이 깊은 유모차라면 가능해. 매트리스를 빼낸 자리에 꿩을 꽉 채우면 되지. 그 위에 시트만 덮으면 준비 끝이야. 기절한 꿩이 얼마나 자리르 조금 차지하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우리는 주유기 옆에 서서 베시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따사로움과 시커메지는 하늘에서 풍기는 천둥 냄새가 공존하는 전형적인 9월의 아침이었다.

"마을을 정면으로 토오가해서 오다니 정말 대담하군! 과연 베시야!"

클로드가 말했다.

"좀 다급해 보이는데."

클로드는 피우던 담배꽁초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설마, 베시는 서두르는 법이 없어."

그가 말했다.

"저거 봐. 걸음걸이가 이상해."

내가 말했다.

그는 담배연기 사이로 실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담배를 입에서 뗀 뒤 다시 그녀를 보았다.

"어때?"

내가 말했다.

"조금 빨리 걷는 것 같기는 하네. 그렇지?"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이라니? 엄청 빨리 걷잖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클로드는 다가오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비가 올까봐 그러는지도 몰라,  고든. 틀림없이 그럴 거야. 베시는 비가 올 거라고 생각하고 혹시 아이가 비라도 맞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저러는 거야."

"덮개를 씌우면 되잖아."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제 뛴다! 저거 봐!"

내가 외쳤다. 베시가 갑자기 전력 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클로드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곧이어 찾아온 침묵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야?"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기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들어보라고."

내가 말했다.

베시는 우리에게서 2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아기 울음소리 안 들려?"

내가 물었다.

"들려."

"악을 쓰며 울고 있어."

멀리서 들리던 작고 새된 소리가 매 순간 점점 커져갔다. 지칠 줄 모르고 미친 듯이 울어대는 그 날카로운 소리는 거의 발작에 가까웠다.

"경기를 일으켰을 거야. 틀림없어."

클로드가 단언했다.

"그래서 베시가 뛰어오는 거야, 고든. 빨리 아기를 데려와서 찬물로 열을 식히려는 거지."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그래, 저 소리를 들어보면 네 말이 맞는 게 확실해."

"꼭 경기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이유로 저러는 게 확실해.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클로드."

클로드는 불안한 듯 주유소 진입로에 깔린 자갈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아기들한테는 날마다 별의별 사고가 다 일어나니까 말이야."

그가 말했다.

"물론이야."

"내가 알던 어떤 아기는 유모차 바퀴살에 손가락이 낀 적도 있어. 그 애는 결국 손가락을 잃었지. 아주 딱 잘려나가더라고."

"그랬구나."

"이유야 어쨌든, 제발 베시가 그만 뛰면 좋겠는데."

클로드가 초조한 듯 말했다.

베시 뒤로 벽들을 실은 대형 트럭 한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트럭 운전사는 속도를 늦추더니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베시는 그를 무시하고 계속 발길을 재촉했다. 이제 그녀는 꽤 가까워져서, 나는 그녀가 빨갛게 달아오른 커다란 얼굴로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단정하고 우아하게 낀 흰 장갑이 눈에 두드러졌다. 머리 오른쪽에는 버섯처럼 우스꽝스럽게 생긴 작고 흰 모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갑자기, 유모차에서 커다란 꿩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클로드가 공포에 질려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베시를 따라오던 멍청한 트럭 운전사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꿩은 술 취한 것처럼 몇 초간 날개를 퍼덕이며 주위를 돌더니 곧 길 옆 풀밭에 추락했다. 트럭 뒤로 식료품 차가 따라오며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베시는 계속 달렸다.

그때, 휙!-

두 번째 꿩이 유모차에서 날아올랐다.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맙소사! 수면제야. 수면제 약효가 떨어진 거야!"

내가 말했다.

클로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베시는 마지막 50미터를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마침내 그녀가 주유소 진입로로 커브를 돌며 들어오자 유모차에서 꿩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가 소리쳤다.

"어서 뒤로 가요. 뒤로 가라고요."

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확히 첫 번째 주유기에 유모차를 바싹 붙여 세웠고, 우리가 그녀에게 도달하지 전에 울부짖는 아이를 두 팔로 안아 유모차에서 빼냈다.

"안 돼요! 안 돼!"

클로드가 그녀에게 뛰어가며 부르짖었다.

"아이를 꺼내면 안 돼! 다시 앉혀! 시트를 눌러요!"

하지만 그녀는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갑자기 아이의 무게가 사라진 유모차에서 족히 오륙십 마리는 되는 꿩들이 무리를 지어 날아올랐다. 머리 위 하늘은 온통 더 높이 오르려고 정신없이 날갯짓을 하는 거대한 갈색 새떼로 뒤덮였다.

클로드와 나는 진입로를  동분서주하며 팔을 휘둘러 새를 쫓기 시작했다.

"저리 가! 훠이! 저리 가란 말이야!"

우리는 소리쳤다.

하지만 약에서 덜 깬 꿩들은 우리의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고, 1분도 채 안 돼서 다시 돌아와 메뚜기떼처럼 주유소 앞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아제 이곳은 온통 꿩들로 뒤덮였다. 꿩들은 지붕 가장자리와 주유기 위쪽에 돌출돼 잇는 콘크리트 차양을 따라 빽빽하게 앉아 있었고, 사무실 창문턱에는 적어도 10여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몇 마리는 윤활유 병이 놓인 선반으로 떨어졌고 다른 놈들은 내 중고차들 보닛 위에서 이리저리 미끄럼질 쳤다. 꼬리가 멋진 장끼 한 놈은 주유기 꼭대기에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았고, 약이 덜 깨서 높은 곳에 앉아 있지 못하는 놈들은 우리 발치에 이리저리 흩어져 조그만 눈을 깜빡이며 날개만 퍼덕거렸다.

길 건너에는 벽돌 트럭과 식료품 차 뒤로 차의 행렬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몇몇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좀 더 가까이서 보려고 차에서 내려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아홉 시 이십 분 전이었다. 당장이라도 마을 쪽에서 커다란 검은색 차가 도로를 따라 질주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롤스로이스 운전대 뒤로 소시지와 파이 제조업자 빅터 헤이즐의 얼굴이, 크고 번들거리는 푸주한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애가 꿩한테 쪼여서 산산조각 날 뻔했잖아요!"

베시가 울부짖는 아기를 가슴에 꽉 껴안으며 악을 쓰자, 클로드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집에 가요, 베시."

나는 클로드에게 말했다.

"문 닫아. 간판 불도 끄고. 오늘 장사 끝이야."



그림- 다냐 슐츠Dana Schurtz 

매거진의 이전글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