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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Jan 18. 2016

오필리아와 그림자 극장

미하엘 엔데 단편

어느 작고 오래된 도시에 오필리아라는 할머니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고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오필리아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은 그녀가 성장해서 아주 유명하고 훌륭한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도 유명한 연극배우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었다.

어린 오필리아는 부모님의 기대대로 시인처럼 멋진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는 하였지만 그밖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아주 유명한 배우도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일이라도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마침 오필리아가 사는 도시에 예쁜 극장이 하나 있었다. 극장의 무대 바로 앞에는 객석에서 보이지 않는 상자가 놓여 있었다. 오필리아는 매일 저녁마다 그 상자에 들어가 배우들에게 대사를 불러 주는 일을 했다. 그런 일은 오필리아의 작은 목소리가 안성맞춤이었다. 관객들이 들을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필리아는 평생 동안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해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세상에 발표된 희극과 비극을 모조리 외울 수 있게 되어 나중에는 책을 펼쳐 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오필리아는 할머니가 되었고 세상도 변했다. 영화관과 텔레비전 그리고 다른 볼거리들이 많이 생겨났다. 차츰 극장으로 연극을 보러 오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자동차를 갖게 되자, 이왕 연극을 보려면 더 유명한 배우가 나오고 볼거리도 풍성한 대도시의 극장으로 가길 원했다.

결국 오필리아가 일하던 극장은 문을 닫게 되었고, 배우들은 떠났다. 오필리아 역시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커튼이 내려졌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잠시 상자 속에 앉아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그때 갑자기 무대 위를 오락가락하면서 커졌다가 작아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나 무대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질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봐요! 거기 누구요?"

오필리아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림자가 눈에 뜨이게 점점 줄어들더니 어떤 형태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 되었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커다랗게 변했다.

"죄송해요. 놀라게 해 드릴 생각은 없었어요. 아직 이 안에 사람이 있는지 몰랐거든요. 단지 갈 데가 마땅치 않아서 이 안으로 기어 들어온 것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내쫓지는 말아 주세요."

그림자 쪽에서 어떤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댁은 그림자요?"

오필리아가 묻지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에게는 반드시 주인이 있을 텐데."

"아뇨.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세상에는 아무것에도 속해 있지 않고, 아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그림자가 수없이 많답니다. 저도 그중 하나지요. 제 이름은 '그림자 여우'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고 혼자면 외롭고 슬퍼질 텐데......"

"아주 슬프죠. 그렇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그림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혹시 나한테 오실라우? 나 또한 어느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거든."

"정말요?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지만 이미 당신에게는 그림자가 있잖아요."

"노력하면 서로 잘 지낼 수 있을 거요."

오필리아의 말에 그림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부터 오필리아의 그림자는 두 개가 되었다. 더러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들은 오필리아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오필리아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말하고 싶지 않아 낮에는 그림자 두 개 중 하나를 아주 작게 만들어 손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원래 그림자는 아무 데나 다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오필리아는 간절히 기도하면 소원을 들어주리라는 희망을 안고 교회에 앉아 하느님한테 기도를 올렸다.  그때 갑자기 교회의 흰 벽에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빼빼 마른 누군가가 구걸하듯 손을 내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도 아무에게 속해 있지 않은 그림자요?"

오필리아가 물었다.

"맞아요. 우리 같은 그림자를 받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혹시 댁이  그분이신가요?"

그림자가 물었다.

"그렇긴 하지만, 난 그림자가 벌써 두 개나 있소."

오필리아가 말했다.

그럼 하나 더 생긴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겠네요. 나도 받아 줄 수 있나요?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으니 너무 쓸쓸하고 슬퍼요."

그림자가 간청하듯 말했다.

"당신 이름이 뭐요?"

"'어둠 무서워'라고 합니다."

"어서 내 안으로 들어오시구려."

이렇게 해서 오필리아의 그림자는 세 개가 되었다.

그 날 이후 소문을 들은 수많은 그림자들이 거의 매일 오필리아를 찾아왔다. 세상에는 주인 없는 그림자들이 아주 많았다.

네 번째 그림자는 이름이 '외톨이하인'이었다.

다섯 번째 그림자는 '쇠약한밤'이라고 했다.

여섯 번째 그림자는 '절대로다시'였다.

일곱 번째 그림자는 '텅빈무거움'이었다.

그렇게 계속 이어졌다.

아무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수많은 그림자들 때문에 작은 집이 꽉 찼다. 오필리아는 가난했지만 그들을 차마 밖으로 내 보낼 수가 없었다. 점점 더 많은 그림자들이 찾아왔다. 다행히도 그림자들은 먹을 음식과 따뜻하게 입을 옷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 집에 많은 그림자가 살다 보니 불편한 일이 생겨났다. 가끔씩 그림자들끼리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뒤엉키며 싸우기도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오필리아는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 작은 목소리로 그림자들을 달래기도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오필리아는 싸움을 싫어했다. 단 감동적인 시를 인용하든가, 연극을 하면서 싸우는 것만은 예외였다.

어느 날 오필리아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모두들 잘 들어. 내 곁에서 지내려면 배워 둬야 할 게 있어."

일제히 그림자들이 싸움을 그치고, 기대에 가득 찬 눈길로 오필리아를 쳐다보았다.

오필리아가 감동적인 시를 줄줄 외었다. 몇 구절은 천천히 반복하면서 들려주었다. 오필리아는 그림자들에게 따라 해 보라고도 했다. 그림자들은 열심히 노력했고, 배우려는 의지도 강했다.

마침내 그림자들은 유명한 희극과 비극을 다 배우게 되었다.

그 후 그들의 삶은 전혀 다르게 변했다. 그림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난쟁이도 되고, 거인도 되고, 사람이나 새, 혹은 나무나 탁자가 되기도 했다.

가끔 그림자들은 밤새도록 오필리아 앞에서 멋진 연극을 해 보였다. 그러면 오필리아는 그들이 난처해하는 일이 없도록 작게 속삭이며 대사를 가르쳐 주었다.

낮에는 오필리아의 진짜 그림자를 제외한 모든 그림자들이 손가방 속에서 살았다. 그림자들은 원하기만 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몸을 작게 만들 수 있다.


사람들은 오필리아의 그림자들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오필리아 할머니가 이상해 진 것 같아. 아무래도 양로원으로 보내서 보호를 받게 해야 할 것 같아."

사람들은 오필리아의 등 뒤에서 수군댔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혹시 미친 것 아냐?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어?"

사람들은 슬슬 오필리아를 피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필리아의 단칸방에 집주인이 찾아왔다.

"미안하지만 이제부터는 방 값을 두 배로 내셔야겠어요."

가난한 오필리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럼 미안하지만 집을 비워 주셔야겠어요."

오필리아는 갖고 있던 몇 가지 물건을 여행 가방에 챙겨 길을 떠났다. 기차를 타고 먼 곳으로 떠나려 했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다가 어딘가에 내린 그녀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쪽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들고, 다른 한쪽 손에는 많은 그림자가 들어 있는 손가방을 들고서.

길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길에 끝나는 곳에는 바다가 있었다. 더 이상 앞으로 갈 수 없게 된 오필리아는 조금 쉬려고 앉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많은 그림자들이 손가방에서 밖으로 나와 오필리아를  에워싼 채 앞날을 상의했다.

"사실 오필리아 할머니가 이렇게 된 것은 다 우리 때문이야. 우리를 돕다가 이렇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우리가 도와드려야 해. 모두 그동안 배운 것을 이용해 오필리아 할머니를 보살펴 드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잠에서 깬 오필리아에게 그림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오필리아가 감격하며 말했다.

"아하! 정말 멋진 생각인걸!"

마침내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오피리아는 여행 가방에서 흰색 침대보를 꺼내 장대에 매달아 놓았다. 그러자 그림자들이 가방에서 나와 침대보 위에서 오필리아에게서 배운 연극을 해 보였다. 그리고 오필리아는 그들이 대사를 까먹지 않도록 조그만 목소리로 대사를 속삭여 주었다.

처음에는 아이들만 몇 명 찾아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나 저녁이 되자 어른들이 찾아오더니 작은 구경거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돈을 놓고 갔다.

그렇게 해서 오필리아는 이 마을 , 저 마을, 이 도시, 저 도시로 옮겨갔고, 그림자들은 왕이 되었다가 바보가 되기도 하고, 귀부인이 되기도 했다가 성질이 사나운 말이 되기도 하고, 마법사나 꽃으로 변하기도 했다.

연극을 지켜보다가 웃거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연극이 끝난 후 구경꾼들은 그녀에게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많든 적든 돈을 내고 갔다. 오필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유명해졌다.

얼마 후 오필리아는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작은 중고차를 샀다. 그녀는 화가에게 부탁해서 자동차를 멋지게 색칠한 다음, 양쪽에 이렇게 적었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그것을 타고 오필리아는 온 세상을 누볐고, 그림자들도 함께 다녔다.


사실 이쯤에서 이야기를 끝내야 할 것 같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는다. 

어느 날 오필리아는 자동차를 타고 가다 눈보라를 만나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이제까지 보았던 그 어떤 그림자보다 훨씬 더 시커멓고 큰 그림자가 오필리아 앞에 불쑥 나타났다.

"댁도 아무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그림자요?"

오필리아가 물었다.

"그래요. 그런 것 같소."

그림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한테 오고 싶은가요?"

"나도 받아 주시겠소?"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섰다.

"지금도 너무 많기는 하지만 댁도 어디에서든지 쉴 곳이 필요하겠지."

"내 이름이 먼저 물어보지 않겠소?"

"이름이 뭔데요?"

"사람들이 나를 '죽음'이라고 부르지."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 날 받아 주겠소?"

"그래요. 어서 들어오시구려."

크고 차가운 그림자가 오필리아를 뒤덮었고, 주변이 캄캄해졌다. 오필리아의 눈이 갑자기 젊은 시절의 눈처럼 맑고 투명해졌다. 이제는 물건을 보기 위해 굳이 안경을 쓸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오필리아는 천국의 문 앞에 서 있었고, 주변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천사들이 웃고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오필리아가 물었다.

"우리를 몰라보시겠어요? 당신이 받아 주었던 그림자들이잖아요. 이제 우리도 구원받아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게 되었답니다."

어느새 천국의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을 발하는 그림자들이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자들은 오필리아를 멋진 궁전 안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아름답고 멋진 극장이 있었다.

극장 간판에는 큼지막한 황금색 글자가 적혀 있었다.


오필리아의 그림자 극장


그곳에서 그림자들은 훌륭한 공연을 펼쳤다. 천사들은 연극을 통해 인간으로서 땅에 사는 것이 얼마나 애달프고 슬픈지, 또 얼마나 대단하고 우스꽝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오필리아는 배우들이 대사를 잊지 않도록 조그만 소리로 속삭여 주었다. 자비로운 하느님도 가끔씩 이곳으로 연극을 구경하러 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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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압도적인 천재성이란게 미하엘 엔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동화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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