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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Apr 22. 2018

4. 땡땡이를 치자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이런 개 같은 거'같은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대학원생이라면,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 것이다. 조금만 쉬려고 해도 전화가 와서 일을 맡긴다. 소파에 앉아서 우연히 스쳐지나 본 메일함에는 긴급을 요하는(실제로는 어떻게 끝나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무가 들어와 있다. 주말에도 일을 맡기려는 문자함과 메일함을 어슬렁 거리는 사람들이 핸드폰 너머로 보일 지경이다. 도통 쉴 수가 없다. 이건 아마도 주변 사람들이 대게 대학원생을 아무렇게나 일을 맡겨도 되는 잉여인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기랄, 오늘 해야 할 공부/실험은 다했는데 할 게 있네.'

라고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면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증거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대한민국의 대학원생은 학생이라기보다 프리랜서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대학원생은 자신만의 시간을 쟁취해야 한다. 그냥 할 일을 다하고 시간이 남을 때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은 때때로 나를 희생해야 하고, 거짓말을 하고, 싸우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심지어 남에게 피해를 주기까지 해야 하는 극도의 적극적인 자세를 요한다. 필요하다면 남의 등에 칼은 아니더라도 이쑤시개 정도는 꼽겠다는 굳은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자격이 주어진다.  


따라서 좋은 땡땡이란, 치러야 할 대가/양심의 가책이 적으면서, 양이 많고 질 좋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뜻할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방법들은 많지 않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기껏해야 몇 분 안 되는 시간밖에 남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질 좋은 시간은? 질투에 눈이 먼 주변 사람들이 올가미로 당신을 채어갈 것이다. 질 나쁜 많은 시간을 갖는다면? 자신의 혹은 타인의 시간도 아닌 그 어중간한 경계에서 시간을 즐기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저 놈은 쉬었다고 욕만 먹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오호. 통재어라.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벌써 대학원에서 1년 반 정도 보낸 베테랑 한량 공대생으로써, 그동안 나름 좋은 땡땡이치는 방법을 많이 발견했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개중에는 주변 사람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알려줄 수 없는-방법들도 있다. 오늘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생각나는 대로 그 방법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1. 수업 빠지기

이제는 수업을 너무 많이 빠져서 수업을 듣는 게 더 어색한 지경에 이르렀지만, 주위에 별 다른 피해 없이 정해진 양질의 시간을 확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실행 방법도 간단하다. 사람들에게는 수업을 들으러 간다고 하고, 곧장 가깝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외딴 카페를 찾아가도록 하자. 이어폰을 꼽고 책을 읽든, 자든, 글을 쓰든 내 자유다. 만약 다른 사람-교수라던지, 교수라던지, 교수 같은 사람들-에게 전화가 왔다면 조금 기다린 후에 작은 목소리로 받도록 하자. 작은 목소리로 '아 예, 죄송합니다만 제가 수업 중이라서요'라고 적당한 연기를 해주면 상대는 곧 머쓱해하며 끊는다. 학생의 수업받을 권리를 빼앗았다는 작은 죄책감과 함께 말이다. 그리곤 수업이 끝날 것 같은 시간에 연구실로 돌아가선 피곤했지만 많은 걸 배웠다는 듯한 얼굴로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어 있으면 완벽하다. 


2. 작고 하찮은 일을 많이 갖고 있기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선 작고 하찮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벌기 위해선 작고 하찮아서 아무도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을 잔뜩 가지고 있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그냥 갖고 있기만 하면 안 되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노라고 선언해야 하지만.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우체국에 실험용 시편 보내기와 연구비 서류 제출/수정하기, 내일 실험 조교 할 것 준비하기가 그날 처리해야 하는 잡무라고 가정하고, 편의상 잡무 1,2,3이라 하자. 그리고 나는 모종의 이유로 오전 10시~오후 1시까지 잠적하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연구실 인원 A, B, C에게 각각 다른 말을 전한다.

"A 씨, 나 잡무1하러 ~좀 갔다가 올게요."

"B선배, 잡무2 때문에 행정처에 들러서 수정사항 듣고 오겠습니다."

"C야, 나 잡무3 준비해야 돼서 바쁠 거 같아."

그리고 나는 연구실을 나서면서 잡무 1,2,3을 한 번에 한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은 극도의 효율로(나는 이것을 위해 자전거까지 샀다) 대충 처리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던져놓은 퍼즐의 조각을 끼우기 바쁘다. 무언가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질 때쯤이면 사람들의 나에 대한 관심은 저만치 멀어지고, '아 그 녀석은 뭔가 많은 일을 처리하러 갔었지' 생각한다. 그리고 일을 처리한 뒤 나머지 시간은 도서관 구석 자리에 처박혀서 하고 싶은 하는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심을 가볍게 먹고 1시쯤 슬렁슬렁 들어가면 된다.  


3. 컨디션이 좋은데요? 작전

일단 하루 내지 이틀 정도-그보다 많으면 결국 내가 힘들다-약간 광증이 나타난 사람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껄껄 웃거나,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걷는 느낌이면 된다. 자리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서 연구실을 빠른 걸음으로 배회하면서 이상한 신음소리까지 내면 금상첨화다. 그러면서 이런 식으로 말하고 다니자.

'오늘 정말 컨디션이 좋은데요?'

사람들은 별난 녀석이 다 있군 하고 생각하다가도 이내 그런 행동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음날, 입에 모래라도 한껏 들어있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출근을 하자. 그다음엔 자리에 앉아서 한숨을 툭툭 내뱉고, 사람들의 말에 늦게 늦게 반응하면 된다. 발걸음은 되도록이면 질질 끌자. 이 짓거리는 이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하면 된다.

"OO야, 오늘 어디 아파?"

가서 좀 쉬어도 된다는 허락과도 같은 질문이다! 기뻐서 쾌재는 부르지 말자.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은 거 같아요'라고 짧게 대답하면 된다. 대비의 미학이랄까, 전날의 광증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차이가 갑자기 시한부 인생을 선고를 받아버린 사람 같아 보여야 한다. 그다음 할 일이라면 연구실에서 해야 하는 일을 몰래몰래 빠르게 처리하고, 오후 세시쯤, 너무 이르지는 않게, 밖에 좀 나가서 쉬고 오겠다고 하자. 발걸음은 비척비척, 눈에선 피곤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말이다. 적어도 빌딩을 나서는 순간까지는.


분명히 이것보다 많은 방법을 알고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제 이런 방법 조차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시시각각 땡땡이 칠 궁리만 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 수 도 있다. 아니면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런 방법을 알아버린다면, 요컨대 영업비밀을 알아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속의 방어기제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 생활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나 자신을 빼앗아 간다. 아무 우리 사회의 어느 곳이 건 그럴 것이다. 빼앗긴 우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을까? 우리 모두 나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많은 땡땡이를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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