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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Jun 06. 2018

5. 휴가를 갑시다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벌써 2달째 글을 올리지 못했다. 대학원생 일기가 아니더라도 뭐라도 한 편 올렸어야 했다. 이 글은 변명 아닌 변명을 위한 글이다. 나름 2018년의 목표 중 하나로 브런치 월 별로 2편씩 올리자는 것이 있었는데 이미 목표 달성은 물 건나간 셈이다. 껄껄껄)


 몇 주째 주말에도 무언가 쓸데없는 잡무를 하느라 머리 끝까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분노로 차 있었냐면, 그저 분노하느라 아무 일도 못할 정도였다. 교수님이나 동료들의 사소한 부탁에도 '피꺼솟'하느라 정작 해야 할 일을 놓치기 일쑤였다. 도저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심할 때는 진지하게 자퇴 원서를 화면에 띄워놓고(내용도 다 쳐놓고) 한참을 쳐다보기도 했다. 그때 머릿속에서는 자퇴 원서를 슬그머니 학부 사무실에 제출하고 다음날 짐을 챙겨서 떠나는 내 모습을 그렸다.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개 같은 거'가 저절로 입에서 나올 정도였으니-. 한마디로 하얗게 타버린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학회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학회 이틀 전이었다. 게다가 장소가 제주도였다. 비행기표는커녕 학회 참가 등록도 안 해놓은 상태였다(사전 참가 등록일은 한참 전이었다) 그보다 더 큰 일은 발표할 포스터조차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욕지거리를 한껏 내뱉으면서 부랴부랴 포스터를 만들고,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렌터카와 숙소 같은 건 알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뭐 될 대로 되라지- 생각했다.


원래 극도로 평면적인 인간이라,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란 걸 미리 말해두고 싶다. 하늘에 맹세코, 자의로 서울을 벗어나는 여행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가족이나 친구들이 끌고 가지 않는 이상, 기껏해야 한강 건너편에 있는 카페를 찾아가서 시간을 때우는 게 거의 유일한 나들이였으니. 아마 나란 인간은 외국에 나가서도 카페를 찾을 것이기에, 여행 같은 건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여행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휴식이 필요하달까, 아니면 '일을 할 수 없는 공간'에 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상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제주도에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교수에게 일방적으로 제주도에서 더 있다 오겠다고 통보했다.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뿐이었다. 교수는 뭔가 탐탁지 않아하는 것 같았지만, 애당초에 교수의 동의를 구하러 간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왜 이런 사진을 찍은걸까

그래서 계획이라고는 1도 없는 제주도 여행이 시작되었다. 일정은 3박 4일이었다. 교수는 발표 첫날에만 따라오고, 학회에 잠시 있다가 당일 오후에 서울로 올라간다는 계획이어서 실제로 체감은 한 3박 3일 정도이긴 했지만. 제주도 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렌터카를 빌리고, 교수와 학회장으로 갔다. 학회는 제주도의 남쪽에 위치한 리조트에서 열렸다. 학회장 은 이미 술렁술렁한 분위기였는데, 당장이라도 해변으로 폭주해 나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대학원생들이 맞지 않는 양복을 입고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내 포스터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의 눈에는 권태가 가득했다. 나까지 그 권태로움에 전염되는 느낌이었다. 예의상 몇 가지 질문을 받고 내 차례는 끝났다. 몇 가지 의미 없고 지루한 발표와 연구를 보다가 교수를 공항으로 배웅했다. 교수는 끝내 탐탁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 손으로 손수 비행기 표까지 예약해 놓은 상태라 뭐 어쩔 수 있겠나.


이렇게 날씨가 좋았는데요, 이렇게 안좋아졌습니다. 판타스틱한 날씨-

그 이후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에 방문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명한 관광지는 한 곳도 가지 않았다. 모든 게 즉흥적이었다. 숙소도 그냥 핸드폰으로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혹은 검색 리스트에서 가장 높이 올라와있는 아무 게스트 하우스를 선택했다. 비수기여서 방은 많았다. 게스트하우스의 사람들은 이런 애매한 시기에 혼자 다니는 남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밥도 길을 가다가 보이는 '맛있어 보이는'집에 들어가서 먹었다. 검색은 귀찮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맛이 없는'집은 하나도 없었던 것 같았다. 뭔가 기록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사진을 찍긴 했지만 영 쓸모없는 사진만 찍었다.

이게 그나마 잘 찍은 사진이다. 나머지는 진짜 별로 맛있어보이지도 않는 사진뿐

그래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운전할 때에는 내비게이션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해안가를 따라서 쭉 운전하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이 길로 갔다가 저 길로 갔다가 이상한 어촌 마을에서 길을 잃었다. 하지만 그다지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목적지라던지, 시간 안에 뭔갈 해야 한 다는 압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밖도 그다지 덥지 않아서 문을 열어두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도로 위에선 노래를 불렀다. 뜬금없이 오아시스(Oasis)의 노래들이 끌려서 미친 듯이 불러재꼈다.

커피 노점상- 모카포트 커피를 처음 마셔봤다


제주도는 산맥을 기준으로 날씨가 나뉘어 있었다. 길가의 노점 커피상에서 물어봤을 때, 서귀포시 근처는 일주일째 짙은 안개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고 하였다. 하여 애월 근처에서는 바다를 보면서 달렸고, 제주도의 남쪽에서는 안개를 보면서 달렸다. 바다가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리게 했다면, 안개는 그냥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하였다. 하얀 안개가 용매가 되어 내 머릿속의 기억이나 생각 같은 걸 녹여내는 모양이었다. 안갯속에 지나칠 뻔한 카페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비쳤다.


그리고 나를 가장 매혹시킨 건 풍경이었다. 지금도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 나의 작은 프라이드(차종)는 어촌 마을 곳곳을 효과적으로 돌아다녔고, 그 끝에서 이상한 풍경과 계속 맞닥뜨렸다. 제주는 이상하게 비현실적인 공간들의 연속이었다. 사람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어촌 마을의 낮은 돌담 집 안에선 살인사건이 일어나거나 의뭉스러운 비밀을 감추고 있을 것 같았다. 길은 지금 생각하면 뜨악할 정도로 좁았다. 하지만 신기하게 자동차를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 섬에는 어떤 이상한 비밀이 있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예의 마을의 끝에선 비현실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아래 사진들은 전부 그런 마을들의 출구에서 찍은 사진이다. 


개인적으로 폭풍의 언덕/성곽길 이라고 이름 붙인 사진들
초현실적주의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다

풍경들은 짙은 안개에 감싸여있었다. 안개에 싸인 풍경은 부정적인 감정이던 긍정적인 감정이던 가리지 않고 빨아들였다. 마치 안개 자체가 어떤 의지를 가진 고등생명체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감정이나 생각들, 이데올로기들이 점점 하얀 가루가 되어서 안개가 되어갔다. 그래서인지 안갯속을 보려고 하면 할수록 안개는 더 짙어졌다. 안갯속을 응시하고 있으면 안개도 이내 곧 나의 속을 들여다보았다. 차갑지도, 따스하지도 않은 시선이었다. 그 중립적인 시선은 내 현실적인 감각을 앗아갔다. 계속해서 보고 있자니 안갯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다는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안갯속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제주도에는 까페가 아주아주 많다. 거의 서울급

그런 생각이 들 때쯤 차로 돌아가서 해안 도로를 따라 달렸다. 그리곤 눈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안갯속의 풍경이 나의 현실 감각을 앗아갔다면, 커피는 현실 감각의 빈자리를 이전과는 좀 다른 종류의 현실 감각으로 채워 넣었다. 커피가 서울에서 마시던 것과 큰 차이가 없어서였을까. 공기에서 바다 냄새가 나고,  바다 파리가 좀 많다는 것 만 빼면 말이다. 한두 시간쯤 커피를 마시다 보면 비어있던 내 속의 공간에 무언가 밀도가 옅고 살랑살랑한 무언가가 자리를 메웠다. 그것을 현실감각이라고 칭한다면, 서울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나의 전체적인 무게가 좀 줄어든 셈이지만 낯설었다.


커피를 마실 때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안갯속의 풍경에서 돌아와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다른 세계에 갔다 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네댓 번을 반복하면 하루가 끝나 있었다. 분명 낡이 밝자마자 게스트 하우스에서 나왔는데, 뭐 별로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날이 저물어 있었다. 핸드폰으로 대강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고 샤워 후 맥주를 한 캔 하고 침대로 들어가 잤다. 6인 도미토리는 사람이 없어서 독방 같았다. 꿈도 없이 깊게 잤다.


제주도에서 거의 유일한 현실적인 행동은 돌아오기 전에 제주 공항 근처에 있는 동문시장에 들러 기념품을 사 오는 것이었다. 시장에서 깜짝 놀랐던 건, 분명 제주도 남쪽에서 4박스에 만원 하던 초콜릿 세트가 15박스에 만원이란 점이었다. 뭔가 힘이 쪽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동문시장에서 나와 술이나 몇 병 샀다. 술도 서울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지만(제주 에일 몇 병, 제주 소주 몇 병으로) 내 돈으로 그런 초콜릿 같은 걸 산다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물론 기내에 액체 종류의 반입이 안되어서 백팩에 억지로 술을 집어넣고 수하물로 부치긴 했지만 말이다(이 내용을 주류상 사장님께 들었다-이거 어떻게 가져가시게요?)


결과적으로 나는 좀 더 가벼워졌다. 좋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어딘가 나사가 빠져버렸다. 분노에 가득 찬 사람이 얼치기가 된 셈이다. 여행은 나를 바보로 만들어 놓았다. 얼마나 바보가 되었냐면...

이렇게 신발을 신고 한나절을 돌아다녔다. 오후 3시쯤 알아챘다. 바보같으니라고(크게 보니까 털 극혐)

하지만 그다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는 거의 화도 나지 않는다. 다만 일이 들어오면 미루거나 대충하거나 한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좀더 가벼워진 셈이다. 가벼운 나-


고통받는 대학원생이 있다면 얼마간 휴가를 내어 제주도에 갔다 오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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