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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Jul 15. 2018

6. 우리의 앞날에는 희망이 없다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이제 대학원에서의 3학기가 끝났다. 석사과정으로 치면 과정이 거의 끝난 상태였을 테지만, 나는 불행히도 석박사통합과정이라 걸어온 길 보다 걸어갈 길이 훨씬 더 길다. 군대로 치면 일병 3호봉 정도랄까. 하지만 보통 석사과정 학생이 배울 수 있는 것보다 제법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로 자의 1%, 타의 99% 정도로 연구실에서 실질적인 사무를 도맡아 하고 있다. 또 3가지 프로젝트(연구과제)를 동시에 맡고 있어서 이런저런 엿같은 상황에 자주 맞닿뜨린다. 고로 나는 짧은 사이에 잔뜩 늙어버린 애늙은이 이다. 

그나저나, 아인슈타인은 26살에 특수 상대성이론을 고안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야말로 갓갓한 애늙은이

이런 애늙은이의 시선으로 볼때, 나의 앞날엔 먹구름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라고 칭하기는 했지만 아마 다른 많은 대학원생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쨍하고 비치는 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대학원은 공부하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다. 돈이 되는 '산업'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대학원생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학원은 노동력을 이용해 연구라는 제품을 생산한다. 생산된 연구 제품은 '필요에 의해서' 라기보다 '전략적인 이유로' 누군가에 의해 소비된다. 대신 대학원생은 대학원으로부터 학위를 제공받는다.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학위가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렇지만 그게 음속의 세배쯤으로 날아다니는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양자컴퓨터가 일 초에 수 조번 덧셈을 하고, AI가 사람의 취향을 지배하는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같은 세상에서 어떤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1년 반 동안 대학원을 다니면서 본 대학원의 초상이다.


몇 가지 초상들을 더 그려보자.


첫 번째 초상은, 연구가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기 보다 누군가의 전략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 거기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정책 방향에 응답해야 하는 공무원, 연구실을 유지/확장하고 싶은 교수, 생각보다 엄청나게 돈이 되는 연구 출판사, 존재의 이유를 증명해야 하는 학교, 책임을 전가하려고 안달 난 기업들 등. 연구는 이런 이해관계 주체들의 등쌀에 표류한다. 그래서 애당초 연구는 연구다워질 수 없고, 계획서 상 계획되지 않은 것들은 연구되지 않는다. 하여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고, 해석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일련의 판타지 같은 과정은 전체 대학원생 업무의 1/5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4/5은 멋지지만 속이 텅 빈 피피티를 만들고, 저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이 사람의 연구 방향을 수용하고, 저 결과를 괴상망측하게 해석하고, 이 단어를 살짝 바꿔서 책임의 소재를 애매하는 일을 배우고 실행한다. 기가 막히지만 그러하다.

교수: 일 더 안해? 나: 엌ㅋㅋ

둘째는, 대학원은 대학원생에게 도시전설을 강요한다. 도시전설이라 함은 무엇인가. 도시전설의 주인공은 과업을 이룬 사람이다. 이들의 과업은 도시 전설로서 대학원생 사이에 떠돈다. 예를들어 2주일 내에 논문을 두 편 쓴 옆 방의 박사라던지, 불이 꺼지지 않는 실험실, 아침 6시에 출근하고 저녁 11시에 퇴근하는 어떤 랩실의 학생들이 도시 전설로 전승된다. 도시전설을 이야기해주는 것 자체에는 큰 잘못이 없다. 그렇지만 관리자는 그 도시전 설이 우리 랩에서도 행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극히 평범한 대학원생이라는 사실과 관리자의 바람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된다. 청춘 성장 드라마 정도가 되어야 할 대학원 생활은 정치 스릴러 내지 액셜 활극으로 변한다. 생각해보자. 여기 한 대학원 생이 있다. 이번 달 안에는 특허를 출원해야 하고, 괴상한 주제로 SCI 논문을 한편 써야 하며, 내일은 빌어먹을 학과 행사가, 모레는 요상한 세미나 발표가, 처리해야 될 서류가 한 더미에, 망할 실험 세팅은 끝내고 끝내고 끝내도 끝 나지 않는 상황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지극히 양심적이고 올바른 방법으로 신속하게 끝낸다. 또한 완벽한 자기관리와 더불어 교수와 밥을 2~3시간씩 먹을 수 있다. 이런 대학원생이 있을까? 그런 도시 전설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나는 저 뒤의 모자만 보이는 사람 정도가 아닐까

세번째 초상은, 내가 시대 감각을 잃어버린 시스템 속에 있다는 어렴풋한 자각이다. 현재의 대학원 시스템은 현대 미술 사이에 위치한 바로크 미술같다. 대학원은 놀랍도록 정형화되고 규격화되어 있다. 그 규칙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대학원의 시스템은 높은 만족을 준다. 비례와 대비, 채색의 규칙성은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하지만 온갖 변칙이 난무하고 정석이 통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말마따마 포스트모던한 법칙이 난무하는 현대-미래 사회에서 대학원의 규칙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미 교수는 명작이 되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새로 그려진 우리는 그저 Old-Fasion에 불과할 뿐이다. 교수는 자신의 스타일 밖에 가르쳐 줄 수 없다.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기술들을 배워가며 나를 그려나간다. 교수를 교수로 만들어 주었던 미덕은 이제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도대체 나를-우리를 누가 구원할 것인가.


지금까지 이야기가 너무 우울했다. 여태까지의 이야기가 다소 현실적이고 묘사적이었다면,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개인적이고 몽상에 가깝다.

저 먹구름이 보여? 내 미래야!

여전히 나의 앞날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는 일종의 대응방향을 얻었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나니 차라리 먹구름이 끼어 있다는게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원래 1달 전 쯤 제주도에서 휴가를 보냈을 때 든 아이디어였다. 이상한 생각이 채워진 제주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이상한 생각의 불씨 정도를 옮겨왔었고, 그때로 부터 1달 정도 되니 그 생각에 살을 붙여 적확한 형태로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이 된다.

여전히 나를 더 잘 그려내는 것이, 나를 더 확고하게 표현하는 것이 나의 삶의 목표이다. 나는 그 점에서는 타협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대학원에서 무엇을 원할 것인가? 그래, 나는 학위를 원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큰 위안을 준다. 나는 학위를 포기하면서 미래 먹구름의 채도를 한단계 낮추었다. 대신에 얼마간 자유를 얻었다. 말하자면, '금지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제 나는 마음대로 글을 쓰고, 괴상한 연구를 하고, 여러가지 사악한 일을 할 생각이다.

내가 원하는 건 진짜 혁명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과연 자유를 얻었을까? 나는 나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어쩌면 미래에 이 글을 읽으면서 별 병신같은 생각을 다 했다고, 열심히 대학원 생활을 하라고 내가 나에게 나꾸짖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좀더 하지 말라고 하는 짓들에 집중해야한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혁명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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