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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Aug 09. 2018

7. 혼란스러운 하루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요즘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좀처럼 한 가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하나는 안드로메다로, 다른 하나는 해저 2만 리 정도에 놓인 기분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감정 기복이 생기지만 당최 어떤 연유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 (자가분석을 하자면) 필시 최근에 진단받고 먹기 시작한 탈모 예방약(피나스테리드) 때문이 아닐까. '호르몬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퍽 편안해진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나란 사람의 인격이 이제 슬슬 무너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암울한 시나리오도 술술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그래, 28년이면 썩 잘 버틴 셈이지라고 하고 그냥 나의 인격을 날려버리기에는 시기상으로 너무나 중요하다. 


내가 아무리 한량을 자처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실적은 신경쓰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같이 방학이면 뭔가 실험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 많이 시달린다. 수업이나 조교일이 없어서 실험을 몰아 할 수 있고, 시기적으로 과제 평가가 끝나가는 달(대략 10월 정도)과 가까워 어찌 되었든 일정한 성과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 근래 나의 실적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실험은커녕 일상 잡무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는 것이 없다. 아마 시간의 사용을 상-중-하로 나누어서 평가한다면 내 시간은 모두 하하하 하고 웃고 있을 것이다.  

으히히! 돌아라 돌아!

가뜩이나 정신 못 차리는 한량 대학원생에게 조급함을 떨어뜨려보자! 그는 순식간에 성실한 멍청이가 된다. 아침 8시까지 출근해서 저녁 10시까지 죽치고 있는다지만, 실제로 뭔가 열심히 하는 순간은 1~2시간도 안된다. 워드의 흰 바탕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릿속까지 같이 하얘지고, 실험을 하자면 분주하게 돌아다니기는 하는데 실제로 한 양은 아예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실험 스케줄은 계속 밀리고, 부정확한 데이터만 쌓이고, 데이터를 정리할 시간은 없다. 논문을 따로 읽지 못해서 요 근래에 어떤 논문이 나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렇게 위기를 느낄 때마다 성실해지려고 노력하기는 하는데, 그 노력에 비례해서 더욱 멍청이가 된다. 마치 모던 타임스에서 나사를 이상하게 조이고 있는 찰리 채플린처럼 말이다. 

교수: 아니, 그거 그렇게 하는거 아닌데   나: 

그래, 변명의 여지는 있다. 나는 최근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에 시달리고 있다. 이 교수님 발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사람을 말려 죽인다. 최근 교수가 관심 갖고 있는 실험이 있는데, 실험의 세팅에만 장장 3개월이 걸렸다(바로 어제 끝났다). 문제는 교수가 너무나도 세밀한 부분까지 지도-라고 쓰고 간섭이라 읽는다-하는 것이다. 물론 완벽하게 실험을 하고 싶다는 욕망은 이해를 하지만,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전선을 체결하는 방법부터 시편 구분을 위해 써넣는 이름의 글씨체까지 지도한다. 이런 간섭이 아침 10시쯤 시작해서 오후 8시까지(그러니까 숫제 연구실에 눌러사는 양반이다) 계속된다. 덕분에 나는 내 일에는 좀처럼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내가 맡은 과제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하면 거짓말 부터 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무언가 당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길 때마다 나를 찾아대는 통에, 이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망치로 시편들을 다 부셔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다고 교수님 뚝배기를 깰 수는 없잖아요?'). 이런 걸 노이로제라고 할까?

차라리 이런 상황이었으면 생산성은 좋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저건 좀 무섭다

그러니까, 대학원생은 이런 것과 싸워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싸워야 할 대상이 진척이 더딘 연구, 어려운 수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차라리 그런 것들이 나를 괴롭혀 왔으면 얼마나 낭만적일까! 밤을 새우거나 눈이 빠질 정도로 집중을 하는 건 얼마나 축복받은 일일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정말로 대학원생을 괴롭히는 것은 깊은 무기력감, 멍 때리게 되는 상황들, 상급자의 이상한 주문에 맞춰 이것저것 응대하려는 것 같이 그 상황에 끼어 있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진짜 문제가 그것이 아님을 안다.


예전에 어떤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진짜 대학원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어떤 교수님의 회고 및 반성에 관한 것이었다. 그 글에서 나의 폐부를 아프게 찌른 것은, 실제로 나의 생활과 그의 생활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칼럼을 대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대학원생은 바빠 보이지만, 실제로 그 시간의 대부분은 쓸데없는 시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핸드폰을 본다거나, 잡담을 하거나, 이리저리 배회하거나, 졸거나 하는 등의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칼럼의 말은 좀 더 따스했다. 뭐 다 그런 시기가 있으니 힘내라는 결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가슴 아프게 공감한 지점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내가 나의 생산성을 망치고 있다는 것 말이다. 

 오늘도 나는 허공에 시간을 날려 보냈다. 실패한 시간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들이 나를 짓누른다. 나는 한 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 네댓 번은 똑같은 짓거리를 반복해야 했다. 밥을 먹고 나서 핸드폰을 오래 보았고, 책을 읽을 시간에는 잤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외부 실험실에 오래 머물러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또 핸드폰을 잡았다. 논문을 쓰려고 잠깐 킨 노트북에선 페이스북을 더 하였다. 브런치 글이나, 논문이나 똑같이 쓸 시간이 없다고 툴툴거렸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나의 작디작은 양심이 속삭이고 있다. 그래, 만약 내가 정말로 쓰기로 마음먹고, 그럴 필요가 있었다면 나는 금방 썼을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부 환경 탓을 한다. 교수는 정말 비난하기 좋은 상대이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내가 있다. 이거야 뭐, 내가 남을 공격할 처지가 되는지.

하여 나는 내가 부끄럽다.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저 달이 나를 슬며시 떠보는 것 같다. 필시 달은 나를 힐난하고 있다. 모두 나의 책임이라고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건 옳지 않다고. 아마 한 낯의 해가 나를 보았다면 나는 부끄러워서 죽어버렸을 것 같다. 나는 자전거를 한동안 달렸지만(그리고 돌아와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머리가 상쾌해지기는커녕 공기 속의 먼지가 내 머리 위로 더 쌓인 기분이 들었다. 아마 내일쯤이면 내 머리는 점점 더 가라앉아서 땅바닥에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 들어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종종한다. 땅바닥에 붙어 이리저리 다닌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커다란 더듬이로 차가운 벽이나 느끼면서 산다는 건 도대체 어떤 기분일까. 이런 이상한 생각에 오늘 하루가 저문다.


PS. 또 징징거리는 신세한탄이나 하는 글을 써서 마음이 무겁다. 언제나 나는 밝은 기분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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