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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Oct 27. 2018

8. 주말을 즐겨봅시다

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대학원생의 삶은 단연코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대학원생과 직장인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인은 위선적일 필요가 없다. 아니, 위선적일 수가 없다. 그들은 위선적이기에 너무나 많은 짐들을 지고 있다. 그 짐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평범한 대학원생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술 값, 밥 값, 렌트비, 집세 같이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하는 끝없는 리스트를 주욱 따라가다 보면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된다. 그것뿐이랴.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부담의 값 리스트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 평범한 대학원생이라면 그 리스트를 읽느라 하루가 다 지나가버릴지도 모른다. 여느 직장인이라면 이 리스트를 양복 안주머니에 누가 볼 수 없도록 꼭꼭 접어서 놓았다. 누구도 볼 수 없지만, 누구나 다 아는 그런 리스트를 말이다.

    반면에 대학원생의 삶은 대게 위선적이다. 그들은 직장인들과 같지 않다. 그들의 리스트는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위선의 리스트를 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것은 아마 몇 줄 되지 않을 것이다. 저기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복잡한 표정의 박사과정생의 리스트도 5줄 이상 쓰여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얇은 리스트는 적은 동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대학원생은 몇 줄 쓰여있지는 않지만 꽤나 두툼한 리스트를 간직한다. 누가 보여달라고 하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면서, 무언가 대단한 것이 쓰여 있는 척하면서. 

    어째서 이래야만 하는 것일까? 가끔씩 나의 리스트를 혼자 몰래 꺼내볼 때면 낯부끄러워진다. 볕이 들까 무서워 그 리스트는 구석에 가서 몰래 읽어야 한다. 거기엔 너무나 작고 하찮은 것들이 쓰여있다. 너무나 하찮기에, 나는 뒤돌아서면서 짐짓 괴로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표정들이 있다. 위선으로 덮어야 나올 수 있는 표정들이. 그리고 이미 쓰여있는 리스트를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학원생은 필연적으로 위선적인 삶을 연기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리고 이 위선적인 삶은-위선적이기 때문에- 항상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멀리서 볼 때 아무런 문제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다면, 만약 누군가 삶의 거대한 현미경을 꺼내서 대학원생을 주욱 훑어보자면 불안정한 파동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위선적인 삶에서 목적은 이미 삶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이다. 이데올로기로만 존재하는 종류의 삶이다. 존재하지 않고, 항상 바래야 하는 종류의-누구나 어디선가 들어보았지만 누구도 실천해보지 못한 종류의 삶 말이다. 리스트는 리스트이지만, 대학원생은 이데올로기적인 삶을 연기한다.

    문제는 그런 삶의 가장 작은 단위가 1주일의 사이클을 따른 점이다. 이 거대한 순환은 1주와 1달, 1년의 거대한 프렉탈로 이루어졌다. 그 닮은꼴 안에서 1년은 12개의 후회와 다짐들로, 다시 그 12개의 달들은 작디작은 4개의 서로 다른 작은 후회와 다짐들로 만들어져있. 매주 대학원생은 장구한 세월 동안 지고 스러지는 문명처럼 새로운 시작을 경험하고 다시 그 멸망을 시청한다. 따라서 대학원생에게 주말은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다. 그리고 그것은 한 세기가 끝나는 문명의 몰락과도 같기에,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세기의 끝이 다가오면-토요일- 대학원생은 아침부터 몇 시간 가지 않을 헛된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노곤 노곤한 뇌를 애써 굴리며, 타임라인을 설정한다 물론 눈은 감겨있고, 토요일이라는 행복감에 온 몸은 단 1 cm 도 움직이지 않은 상태이지만. 등으로 느껴지는 전기장판의 따듯함은 모든 걱정을 대기권 밖으로 밀쳐낸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서 몇 시 까지는 무얼 하고, 무엇을 한 다음에 몇 시간 동안 무얼 하고, 또 무얼 하고...... 이런 식으로 끝이 없이 계획되고 수정되는 사이에, 시간은 무력하게도 쏜살 같이 흘러간다. 

    문득 12시쯤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면, 대학원생의 감각은 거의 여지없이 들어맞는다. 계획은 개뿔, 이미 하루의 절반이 날아가버린 셈이다. 이미 오전의 여유로운 논문 작성 같은 것들은 없다. 밥 먹고 출발하는데 한 시간, 적당한 카페를 찾는데 한 시간 정도 소비되는 것을 감안하면, 이미 여유로운 것 과는 거리가 먼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그 이후의 일정은 순전히 자기 파괴에 가깝다. 잠자리에서 세운 따뜻한 계획은 아랑곳없이, 주중에는 좀처럼 하지 않는 불확실하고 자기 파괴적인 계획들이 순간순간 자리를 채운다. 예를 들면 길을 가다가 갑자기 피시방을 간다던지,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맥도널드를 들어간다던지, 그렇게 햄버거를 다 먹고 나온 뒤에 갑자기 와플이 먹고 싶어서 3인분 정도 되는 와플을 모두 해치워버리는 것 같은 일 말이다. 물론 그렇게 일을 마친 후에는 이전보다 더 큰 혼돈이 기다린다. 사유와 행위가 모두 갈피를 잃는다. 그래서 다시 끝없이 고민하면서, 백팩에 담겨있는 노트북과 읽을거리들은 울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다리는 김유신의 말이 되어 대학원생을 술집으로 이끈다. 짜잔. 적당히 퍼마시다 보면 대학원생의 하루 자기 파괴가 완성된다. 몸과 정신은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짓밟혀 바닥에 나뒹군다.

    전날의 정신적/육체적 여파는 그다음 날에도 영향을 준다. 급하게 눈을 떠 보지만 이미 일요일은 시작되었다. 쑥대밭이 된 대학원생의 주말은 선택의 여지를 거의 주지 않는다. 주말을 휴식의 날이라고 한다면, 이미 절반으로 줄어든 휴식은 대학원생에게 두 배 농도로의 휴식을 강요한다. 때문에 잠에서 간신히 깬 대학원생은 매우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주섬주섬 밖으로 나간다. 전날의 자기 파괴 때문에 몸이 지끈지끈하다. 평일 출근할 때 보다 더 피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무래도 괜찮다. 그리고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간다. 어딘가 삶을 채워줄 수 있는 물건들이 있는 곳으로. 영혼을 두배로 빨리 채워줄 수 있는 곳으로.

    하지만 서울 시내 어디에도 그런 곳은 좀처럼 쉽게 발견할 수 없다. 멋들어진 카페나, 서점, 혹은 쇼핑 등으로 우리의 영혼이 치유되기에는 우리 영혼의 역치가 너무 높아져있다. 대학원생은 옛날이었으면 즐거웠을 그러한 일들을 하다가 문득 자신이 그다지 즐겁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겉으로는 매우 침착한 척하고 있지만, 내면의 혼돈 때문에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엉덩이가 들썩들썩한다던지, 타자를 치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던지, 유튜브를 보고 있는 손이 저려온다. 좀처럼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머리 속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날의 자기 파괴와는 또 다른 폭풍이 몰아친다.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지만, 뭔가 좀 더 근본적으로 대학원생을 흔드는 그런 폭풍이다. 이렇게 영혼이 파괴된다. 전날의 자기 파괴에 망가진 육체와 정신의 잔해 위로, 그 폭풍에 갈가리 찢긴 영혼이 지단 고명처럼 얹힌다.

    그리하여 9시쯤 집으로 돌아온 대학원생의 몸과 정신, 영혼은 거의 없다. 그저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소파나 바닥에 앉아서 멍하니 티브이나 유튜브 따위를 본다. 가능하다면 한 캔의 맥주 정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무의미하고 보잘것없는 시간이다. 생산적이지도 않고, 소비가 곁들여져 있지 않으며, 만 번을 계속해도 한 번도 기억에 남지 않을 그런 시간 말이다. TV에서 사람들은 제 갈길대로 떠들고, 유튜브 안의 사람들은 괴성을 지르고 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시계밖에 더 있을까. 맥주 캔은 느리게 느리게 비워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학원생은 그런 곳에서 기운을 찾는다. 아니, 이미 대학원생의 안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쌓아 올릴 것 밖에 있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갑자기 괜찮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무언가 쌓아 올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조그맣게 시작해서, 결국은 거대해질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따라서 월요일 아침은, 마치 제국의 아침과도 같다. 무너진 전 주의 잔해 위에 세워진 이 일주일의 제국은 이번 주만큼은 완벽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전히 스트레스는 받지만, 월요일 아침, 일과를 가기 전까지의 그 짧은 몇 시간 동안 대학원생은 다시 일주일을 버틸 용기를 얻는다. 머릿속은 이번 주에 해야 할 일들, 끝낸다면 멋질 것 같은 일들로 가득 채워진다. 이번 주는 완벽할 거라고 내 안의 다른 누군가가 속삭인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누구나 이 주의 끝은 비극일 것을 알지만.

그러니까, 대학원생의 스타워즈 시리즈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일주일은 반복된다. 매주 새로운 성이 세워졌다 지는 이 영원한 회귀 속에서, 위선적이고 사소한 그 삶의 반복 속에서 아마도 대학원생은 무너지지 않는 어떤 단단하고 분해되지 않는 어떤 것을 찾는지도 모른다. 그런 게 삶이노라 여기기에는 아직 살아온 날들이 너무 적긴 하지만 말이다. 

    이번 주말도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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