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의 공대생이 쓰는 보통의 대학원 일기
항온항습실은 온도와 습도가 늘 일정하게 유지되는 방이다. 원래대로라면 방의 한 구역을 전체를 고효율 단열재로 막고, 방 내부에 있는 센서에 의해 지속적으로 실 온도/습도에 대한 피드백이 있어 인터렉티브 한 환경 조절이 가능한 형식이라야 하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시설은 가격이 천문학적이다. 그래서 가난한 일반 연구실 -그러니까 실험하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들어가서 일반 환경 구축하는 데에 쓰이는 돈이 조금은 아까운 실험실에서는 -은 차선책으로 항온항습기를 들여놓는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에어컨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크기를 갖고 있고, 굉음을 내지만 어느 정도 적정 가격에, 성능도 괜찮다.
우여곡절 끝에 항온항습기를 들인 지 벌서 1년이 다 되어 간다. 우리 실험실 같은 경우엔 23도, 50%로 설정해놓은 탓에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쾌적한 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연구실마저 실험실과 문짝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문을 열어두면 그 혜택을 덩달아 누릴 수 있다.
하여 연구실에 오래 앉아있다 보면 계절감을 놓치기 일쑤다. 셔츠 한 장만 입고 밖으로 나갔는데 웬걸, 얼어 죽을 뻔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름철에는 실험실의 공기가 묘하게 건조하고, 겨울철에는 어딘가 축축하다. 요즘에는 조금만 옷을 껴 입고 출근하면 연구실에서 한창일 오후 3시쯤에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지난여름에는 너무 추워서(23도에 반팔-반바지는 꽤 춥다) 집에서 깔깔이를 가져와 입기도 했더랬다.
실험적인 측면에서야 항온항습실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필수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찝찝하다고나 할까. 이 '항상 같음'이라는 환경은 어딘지 모르게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내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일 수 있지만, 코와 피부로 느껴지는 쾌적함 뒤에 무언가 어둡고 공허한 것이 숨어있는 것 같다. 그것은 생명과 대척점에 서있다.
생명은 항상 늘 변화하고 적응한다. 항상 같으면 무-생물이다. 날씨가 덥다면 춥게 만들 것이고, 축축하다면 어떻게든 습기를 제거해보고자 할 것이다. 굳이 진화론 같이 거창한 내용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저 창밖에 붙어있는 겨울 모기만 봐도 알 수 있다. 겨울철창문에 어설프게 붙여놓은 뽁뽁이(?)도 어떻게든 문제를 인식하고 극복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사람이라는 이 특이한 종에게 한정시켜본다면, 에어컨 역시 바깥 기온을 거부하겠다는 분명한 의사표현이다. 전체 난방이 여의치 않을 때 우리는 옷을 껴입거나 작은 발난로를 사용한다. 따라서 불편함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곧 생명이고, 이때 건물과 집은 하나의 생명체로써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명체(인간)와 대화하고 주위 환경과 조화하거나 그것을 거부한다.
항온항습실은 그렇지 않다. 이 방은 완벽한 단절을 상징한다. 주위 환경은 이 방과 아무런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 실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과도 이 방은 어떠한 커뮤니케이션이 없다. 이 방의 관심사는 오로지 방의 상태 하나뿐이며, 바깥이 어떻든, 안의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던 항상 똑같은 온도를 유지한다. 모든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려있는 이 방은 그 자체로 닫혀있으며, 상호작용의 부재는 곧 죽음과 같다.
하지만 항온항습실을 자체를 불평할 순 없다. 죽음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저 항온항습기는 나의 학위를 책임져줄 사악한 악마와도 같다. 여기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쥐가 한 마리 연구실에 들어왔다. 이 녀석은 어찌 된 영문인지 블라인드 위에 위태롭게 올라가 있었는데 , 잠깐 저녁을 먹으러 내가 밖에 나간 사이에 연구실 선배에게 발견되었다. 불쌍한 녀석. 어떻게든 블라인드를 기어 올라가다가 선배와 눈이 마주치자(오른쪽 사진이 눈이 마주치기 전) 갑자기 허겁지겁 숨는다고 숨는 것이 그만 블라인드의 살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왼쪽 사진이 눈이 마주친 후). 생쥐는 그 상태로 몇 십분 정도 있었고, 내가 갔을 때는 죽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만히 있었다.
나는 장갑을 끼고 녀석을 조심스럽게 잡으려고 했다. 거미처럼 창문 밖에다 던져버릴 수는 없으니 잘 가져다 뒷산에다 풀어줄 요량이었다. 일단 모기와 같은 해충과 같이 다루기에는 너무 귀여웠고, 오죽하면 이렇게 아무런 먹을 것도 없는 황량한 연구실에 따듯하다고 생각하며 찾아왔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웬걸, 간신히 꼬리를 집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은 몸부림을 치더니 싹 하고 내 손에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는 도저히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책상 밑으로 사라졌다. 연구실 사람들 모두 발칵 뒤집어져서 생쥐가 사라진 곳에다가 막대기를 넣어 흔들거나 소리도 쳐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나는 건물 관리인 아저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우리 연구실에 작고 귀여운 새앙쥐가 있습니다-라고. 하지만 잡지는 못했는데 도망친 것 같다고. 아저씨는 위의 저 사진을 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며칠 이내에 학교 방역팀이 나와 잡아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로 며칠 간 야근을 하면서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새앙쥐가 검고 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녀석은 좋은 짝을 만나 이 연구실 어딘가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다. 쾌적한 환경에 만족하지만 다소 얼떨떨한 상태로. 먹을 것은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는 있을 것 같다고 아내에게(왠지 저 쥐는 남자일 것 같다)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혹시나 먹을까 하여 웨잉 디쉬(weighing dish)에 오레오를 작게 부셔서 구석에 놓아주기도 했다. 그 녀석은 조금이라도 맛을 보긴 했을까.
이렇게 무미건조하고 황량한 항온항습실이지만, 그때만큼은 뿌듯했다. 무엇하나 세상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연구실이 어떤 생명의 요람이 된다는 사실 때문에. 내 모니터 위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선인장 말고도 살아 숨 쉬는 생명이 저 실험실 어디에 숨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지만 이튿날 방역반이 연구실에 찾아왔다. 인상이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웃는 낯으로 들어오더니, 끈끈이 쥐덫을 설치했다. 사각 얼음틀 만한 크기의 쥐덫 위에는 노란색의 끈끈한 풀이 발라져 있었다. 그것은 쥐를 잡기 위한 덫이라기보다는 애완동물의 배변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쥐 같은 설치류는 도망갔던 길로만 다니니까, 아직 이 방에 있다면 언젠간 걸려들 거예요."
젠장. 방역 따위는 부르는 게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무고한 녀석을 잡기 위해 우리는 무시무시한 죽음을 발 밑에 깔아놓은 것이다. 항온항습실의 분위기와 쥐덫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사물 모두 생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아마 이 작은 친구가 덫에 한 발이라도 들여놓게 되면 다시는 연구실 밖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이 항온항습실이 나를 가둬놓는 것처럼.
나는 그 작은 친구의 최후를 보지 못했다. 출장을 간 사이 연구실 인턴이 덫에 걸린 쥐를 발견한 것이다. 인턴은 쥐를 덫째로 들어서 휴지통에 버린 다음 밖에 내어놓았다고 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 녀석은 살아있는 상태였다고, 인턴은 굳이 안 해도 될 첨언까지 곁들여 상황을 설명했다.
빌어먹을 사람들. 모두 지옥에나 가라지.
(이후 나는 계양역에서 또 다른 쥐를 발견했다. 물론 저 친구는 예전의 그 작은 친구와는 좀 달랐다. 이번에 발견한 녀석이 조금 더 동글동글한 느낌이랄까. 그래도 한 해에 한 번 보기도 힘든 쥐를 두 번이나 보는 건 아무래도 무언가 있지 않나-하고 생각했다.)